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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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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오오?”

가현대에 이제 1년 동안 다니고 있지만 정작 나는 기숙사를 와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기숙사 건물이 아예 학교 뒤편에 있으니까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기숙사 건물이 크고 넓은 게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정도.

“좋지? 나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다.”

씨익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주희 선배. 기숙사생들만 따로 쓰는 카드가 있는지 그걸 찍은 다음 나를 안으로 데려가신다.

“근데 여기 여자 기숙사 아니에요?”

“맞는데?”

“……그럼 저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여자 기숙사 같은 경우는 당연히 금남 구역이지 않은가. 나는 따로 불러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성큼성큼 끌고 들어가시는 게 당혹스럽다.

“뭔 상관이야. 어차피 애들도 다 남친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

“그냥 남친인 척하고 들어오면 돼.”

뭔가 엄청 쿨하신 모습이 당혹스럽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선배는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뭐야 민주희. 남자 만들었어?”

“미쳤네? 민주희가?”

“어, 개년들아. 오늘 내 방으로 오지 마라.”

중간중간 다른 선배들이랑 얘기하면서 지나치는데 수위가 보통이 아니다.

“왜? 같이 먹장.”

“흐흐흐, 맛있어 보이네?”

“미친년들아. 애 놀라잖아.”

도대체 어디 과이신지 몰라도 아주 과격하신데 한번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뭔가 마음속에 있는 최이서와 서예린의 싸한 눈초리가 꽂혀 드는 느낌이라 그냥 모른 척했다.

“농담이야! 잘 놀다가!”

“주희 저년 그냥 울게 만들어.”

폭풍 같던 선배들이 지나가고.

주희 선배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신다.

“무시해. 저것들 남자 사귄 게 벌써 몇 달은 지나서 괜히 더 그러는 거야.”

“참 개방적인 장소네요.”

“……쟤네만 저런 거야.”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주희 선배가 나를 데려간 곳은 기숙사의 가장 높은 3층이었다.

거기서도 구석 쪽 방으로 향했는데 그쪽은 복도 불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괜히 더 어둡게만 느껴졌다.

쿵쿵.

“은우 언니. 언니, 아는 사람 왔어.”

기숙사 방이라서 당연하지만 초인종 같은 건 없었기에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주희 선배.

“꺼지라고 해!”

그리고 저쪽에서 들려온 대답도 시원찮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첫인상 자체는 소심한 느낌이 강했는데 대학원에 들어간다는 게 그녀를 저렇게 만든 걸까.

격한 반응에 어깨를 으쓱인 주희 선배는 나를 슬쩍 보더니 한마디 보탠다.

“남자야. 아는 사이 같던데?”

그러자 정말 몇 초도 되지 않아서 열린 문.

“누구……?!”

마스크랑 모자를 쓴 인상적인 모습으로 나온 이은우에게 나는 손을 살짝 흔들며 웃어줬다.

“우리 아는 사이죠?”

“과, 관리……!”

인상을 팍 찌푸리자 이은우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문을 활짝 열어줬다.

“들어와.”

“관리? 너 뭐 관리하니?”

“본인 몸 관리를 못 했다 그런 거 아닐까요?”

삐죽거리면서 한마디 해주자 이은우의 몸이 들썩거렸다. 어쨌든 물치과 화석이자 익명90에게 기숙사에서 지내는 법을 배울 시간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익명90.

그러니까 이은우의 기숙사 꿀팁은 유용했다. 특히나 나 같은 경우는 자취를 하다가 금전적으로 힘들다는 걸 면접에서 어필하면 쉽게 붙을 수 있을 테니, 관련 서류를 따로 준비해 오라는 건 꽤나 신뢰도를 주었다.

“하으, 감사합니다.”

기지개를 키면서 허리를 편다. 주희 선배는 얘기 나누라면서 이미 본인 방으로 돌아가셨다.

“푸하!”

왜인지 나랑 얘기하면서 계속 맥주를 들이 키고 있는 이은우.

기분 좋다면서 살짝 얼굴이 빨개지고, 안경을 슬며시 벗은 게 괜히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슬슬 갈게요. 그리고 대나무숲에 섹무새 도배 좀 적당히 하고요.”

최근 익명69보다 더 빠르게 익명90이 도배를 하고 있다 보니 새로운 섹X좌가 아니냐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내 경고에 이은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외로워서 그래에에! 내가 외로워서어어!”

“…….”

“대학원 가고, 조교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이제 바빠 죽겠는데 욕구불만이고오오!”

아, 이거 오래 잡혀 있으면 큰일 나는 구도다.

“그러시구나, 전 이만 갈게요.”

일단 얻을 건 다 얻었으니 냉큼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느새 나를 뒤에서 와락 껴안는 이은우.

“한 번마안! 따아악! 한 번만 하자? 응?”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이 여자는 진짜 성욕에 미친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남자 낚겠다고 섹무새 짓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지금은 진짜 폭발한 느낌.

“사귀자고도 안 한다니까? 응? 그냥 꼬츄만 까서 슥삭슥삭하면 끝날걸?”

“진짜 언어 수준 천박한 거 봐라…….”

한숨을 내쉬면서 이은우를 밀어낸다. 내가 서예린이랑 최이서의 유혹을 받아왔던 입장으로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맥주 몇 캔 마셨다고 술에 꼴아서는 흥얼거리고 있는 모습하고는.

우웅!

그때 울려온 전화.

나는 계속 달라붙어 오는 이은우를 밀어내면서 핸드폰을 슬쩍 확인했고.

  • 최이서 -

거기엔 지금 가장 전화 받고 싶지 않은 사람 1위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아, 제바아아알!”

이제는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대학에 살아가는 좀비.

떨쳐내려고 다리를 털어내면서도 전화가 끊기지 않고 계속 울렸기에 하는 수 없이 받았다.

“여보세요?”

  •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아, 뭐 좀 배우고 있었어.”

  • 배우다니? 편집?

“아니, 그… 게 아니라!”

좀 떨어지라고 반대 발로 밀어내도 거나하게 취한 이은우는 말 그대로 폭주 중이었다.

“아오! 진짜!”

  •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어오는 최이서. 순간적으로 숨길까 고민했으나, 지난번 일도 있으니 굳이 그녀에겐 뭔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지금 여자 기숙사인데……! 이상한 사람한테 붙잡혔어!”

  • 여자 기숙사? 이상한 사람?

살짝 싸해진 최이서의 목소리였으나 나는 계속해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다음 학기 기숙사에서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꿀팁 좀 들으려고 주희 선배 아는 분한테 왔는데……!”

아오, 힘은 또 왜 이렇게 좋아.

대학원에 가기 싫다는 집념이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아 준다.

“이분이 술에 취해서 계속 나한테 찝적거리시는데 내가 떼어내고 있어! 이제 발로 미는 중임!”

  • ……몇 호야.

싸늘한 최이서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던 걸까. 순간적으로 이은우의 손에 힘이 풀리며 덕분에 뒤로 빠질 수 있었다.

“아오! 드디어 놔줬네. 이제 갈 거야. 응, 걱정 말고. 내일 오전 강의니까 그때 보자.”

  • 안 가줘도 괜찮아?

“내가 애냐. 괜찮으니까 걱정 마.”

  • ……막 유혹에 넘어가고 그런 거 아니지?

“넘어가긴 뭘 넘어가.”

  • 넘어갔잖아 지난번에.

지난번이면…… 최이서가 집에 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건…….”

  • 그건?

“그러니까…….”

  • 그러니까?

뭐지.

왜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얼른 대답하라는 최이서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는 괜히 입을 꾹 다물었다.

  • 주무세요? 대답하세요.

최이서의 유혹에 넘어갔던 이유는…… 그게 최이서였기 때문이었으나 그걸 대답하는 게 괜스레 부끄러웠기에.

“아, 몰라. 끊어.”

  • 히, 내일 봐?

“싫어. 내일 자체 공강할 거임.”

  • 내일 봐?

“싫다고.”

  • 내일 봐?

진짜 못 이기겠네.

“내일 봐.”

최이서의 웃음소리를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여, 여친 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이은우에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친은 아니고.”

“그럼 썸 같은 건가?”

“……단어 되게 올드하시네.”

“요, 요즘은 썸이라는 말 안 써?!”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쨌든 아시겠죠? 저 이제 그만 가야해요.”

“히잉.”

아쉬워하는 이은우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톡이 하나 왔다.

  • 주대장: 우진아 아직 거기 있지?

  • 김우진: 네, 이제 가려고요.

  • 주대장: 지금 사감쌤 순찰 돌고 계시거든? 좀만 있다 나와라.

“…….”

공교롭게도 아직 좀 더 이 방에 있어야 할 것 같았고.

치익.

오랜만의 뜨밤이 불발됐다는 생각에 다시 냉장고에 있던 맥주 한 캔을 꺼내서 마시고 있는 이은우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사감 선생님의 목소리에 그녀는 멍하니 나를 보더니 히죽 웃는다.

“그냥 자고 가아.”

또 다시 교태어린 목소리가 섞여나온다.

여자에 미친 남자는 몇 명 보긴 했는데 이렇게 남자에 미친 여자는 또 처음이다.

“으응? 자고 가아.”

이전에도 느꼈지만 이은우가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여도 꼬리칠 때를 보면 꽤나 색기가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그만하라고 진지하게 짜증내려고 하는데 또 타이밍 좋게 울려온 전화.

주희 선배인가 했는데 이번에도 뜬금없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 서예린 -

‘얘네 무슨 날인가?

평소에도 종종 전화가 오긴 하지만 이렇게 둘이 연달아 온 적은 없던 거 같은데.

“여보세요?”

  • 여보세요? 뭐해?

왜 아까 했던 말을 똑같이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여자 기숙사에 있는데.”

  • ……거긴 왜?

최이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서 해준다. 이은우가 지금 내 앞에서 굶주린 채로 노려보고 있어서 무섭다는 말까지 굳이굳이 추가해서 넣어줬다.

서로 모르겠지만, 대나무숲에서 섹무새로 함께 의리 넘치게 활동하고 있으니 뭔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 장난하나. 스피커로 바꿔봐.

싫었으나 서예린의 기세가 워낙 강렬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스피커로 돌려서 이은우 쪽으로 내밀었고.

  • 저기요.

“네, 네?”

  • 남의 꼬x 손대지 마세요.

나는 바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

이쯤 되면 어이없다 못해 질린다는 표정을 한 이은우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중지를 슬그머니 치켜들었다.

“넌 그냥 뒤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