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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5 KiB
Raw Blame History

철컥.

보통 집에 들어오면 심신의 평화가 찾아오며, 마음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평소와 같은 집 꼬락서니를 보고 있어도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치우고 좀 살아라.”

왜냐면 뒤에 최이서가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담담하게 안으로 들어온 최이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 집을 간단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온 적도 있고, 심지어 자고 간 전적도 있다 보니 꽤나 익숙하게 움직인다.

“야, 일단 씻어. 땀 흘렸는데 못 씻었잖아.”

“아, 그렇지.”

이불을 정리하려는 최이서를 말리면서 수건을 던져주자, 녀석도 찝찝했는지 냉큼 화장실로 들어간다.

갈아입을 속옷은 아까 편의점에 들렀다 사 왔기에 그거 입으면 될 테고 옷은 내 운동복 같은 거 빌려주기로 했다.

“아, 씨.”

화장실에서 샤워 중인 최이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을 냉장고에 넣거나 환기시키며 집을 청소하고 있자니 괜히 옛날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옷도 챙겨줘야 하니까 뭘로 줄까 옷장을 뒤져보다, 옛날에 전 여친이 자주 입던 커다란 내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주는 건 선 넘는 건가?

하지만 이거 말고는 따로 입힐만한 옷이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큰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꼴린다.

“우진아, 나 옷 좀 가져와 줘.”

그 말에 나는 손에 쥐고 있는 티셔츠를 슬쩍 가져가서는 말했다.

“바, 바지 입을 마땅한 게 없어서 셔츠 큰 걸로 가져옴.”

끼익.

슬쩍 문이 열리며 최이서의 얼굴이 살짝 보인다. 째릿 노려보는 눈치였으나 별말 없이 받아 간다.

‘뭐야, 입어주는 거야?

정말로?

일단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준 거였는데 진짜 입어준다고?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밖에서 기다린다. 뭔가 예전에 오윤지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와서 씻었을 때랑 비슷한 기분.

두근거리면서 바깥의 찬바람으로 심호흡하고 있자니.

“무, 문 잘 안 닫히는 거 내가 고치라고 했잖아.”

쭈뼛쭈뼛 부끄러워하며 밖으로 나오는 최이서.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때문에 목에 수건을 두르고, 티셔츠 끄트머리를 손으로 잡고 쭉 내리고 있으나 무릎보다 좀 더 위라서 허벅지가 보인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감동 받았다는 제스처로 엄지를 들어주자 최이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크게 싫어하진 않았다.

“너도 씻고 와.”

“……시벌.”

꼬리치는 건가?

하자는 소리 아니야 이거?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로 엉거주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중간에 최이서가 왜 그렇게 가냐고 물었으나.

“건강한 남자라서 그래.”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나도 씻기 시작했다.

“……후.”

일부러 찬물로 샤워하면서 정신을 다잡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금 전 최이서의 파급력이 꽤나 강렬했는지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아서.

금기를 범하기로 했다.

쭈욱.

구석에 박혀 있던 샴푸를 짜낸다.

장미향이 인상적인 고급 로망스 샴푸. 비싼 가격이지만 따로 쓰진 않고 그냥 짱 박아둔 물건.

전 여친 물건이다.

“이제 난 현자다.”

전 여친의 샴푸 냄새를 맡으니 흥분이 가라앉다 못해, 머리가 냉정하게 굳어갔다.

이제 나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오늘 최이서는 나한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그걸 지키기 위한 내 나름의 각오.

덕분에 머리에서 장미향이 나는데 전 여친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소름 끼친다.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자 최이서는 내가 자는 메트리스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왔어? 저녁 찜닭 시켰는데 괜찮지?”

“좋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다 좋다. 지난번처럼 엄청 매운 메뉴만 아니면 크게 상관없다.

“근데 너는 평소에 뭐 해?”

이제 뭐 하나 싶었는데 막상 최이서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

“보통 너튜브 보거나 아니면 OTT로 영화 같은 거 보지? 그것도 아니면 게임하거나.”

최근에는 게임을 주로 하긴 했다.

“게임? 무슨 게임?”

영화 쪽을 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이서가 게임에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다.

“너 게임에 별 관심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냥 너 뭐하나 궁금해서.”

“……그럼 밥 오기 전에 게임 한판 해도 되나?”

내가 슬쩍 묻자 최이서는 당연하다면서 웃었다.

“너희 집인데 뭘 나한테 허락을 받아. 그냥 해.”

그러고는 다시 매트리스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기 시작한 최이서.

누구랑 톡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민지가 아닐까 예상해 보며 접이식 식탁에 올려진 노트북을 키며 아빠 다리로 앉는다.

매트리스가 바로 뒤에 있었기에 노트북 화면이 훤히 보이지만 어차피 부끄러울 건 없었다.

게임을 켜고 바로 한 판 시작하려는데.

  • 라인전은이겼음: ㅎㅇ?

마침 친구창에 있는 친구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망나니 같은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브론즈 3의 탑신병자.

서예린이었다.

‘얘는 왜 지금 게임을 하고 있냐.

서예린 같은 애들은 친구랑 약속이 늘 있는 편 아닌가?

얄궂게도 만나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답장하지 않고 슬그머니 게임 매칭을 시작했으나.

  • 라인전은이겼음: ?

  • 라인전은이겼음: 왜 혼자 돌려.

  • 라인전은이겼음: 나 승급해서 브론즈3이야.

  • 라인전은이겼음: 같이 하자.

  • 라인전은이겼음: 야.

빨리 좀 잡히라고 시간을 보고 있었으나.

우웅!

결국 핸드폰까지 연락이 왔다.

우웅!

“우진아 전화 오는데?”

슬쩍 눈을 흘기며 묻는 최이서. 이상하게 긴장돼서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왜 무시해.

꽤나 심통이 난 목소리.

“하아.”

여기서 대화가 길어지면 최이서한테 들킬 수도 있으니까 결국 서예린을 게임에 초대했다.

“대신 오늘은 마이크 안 쓴다?”

  • 왜? 마이크 쓰면서 하는 게 좋잖아. 네가 뭐라 그래서 나 헤드셋도 따로 샀는데.

몇 번인가 같이 게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보니 마이크 음질 구리다고 뭐라 했었다.

“헤드셋 무선인데 충전을 안 해뒀어.”

  • 그냥 이렇게 통화하면 되는 거 아냐?

“어, 아냐.”

뚝.

그대로 전화를 끊고 게임을 돌린다.

  • 라인전은이겼음: 뭐임?

  • 라인전은이겼음: 오늘 엄청 틱틱거려 김우진.

  • 라인전은이겼음: 블랙아카데미 일퀘는 했어?

그래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이야기가 자연스레 다른 방향으로 넘어갔다.

평소에 서예린한테 막 대했던 보상이 이렇게 오는구나.

게임은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다. 점화 쌍도끼 서예린은 닉값은 잘해서 라인전에서 솔킬만 두 번을 따냈으나 그 뒤는 갈 곳 잃은 짐승이 되어서 떠돌고 있었고.

열심히 원거리 딜러를 보좌한 서포터인 나는 바쁘게 맵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흐응.”

그때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

턱을 내 어깨에 얹은 채로 화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최이서.

뺨을 스치는 숨결이 나도 모르게 몸이 굳게 만들었다.

“재밌어?”

‘뭐지?

집에 놀러 온 본인은 내버려두고 혼자서 게임한다고 화난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목소리 톤이나 분위기를 봤을 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느낌.

“나름?”

최대한 게임에 집중하면서 대답하자 이번에는 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허리에 둘러지는 최이서의 손길.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게임 속 위험 핑이 나한테 정신을 차리라며 경종을 울려댔다.

  • 라인전은이겼음: 머함?

  • 라인전은이겼음: 정신 놨음?

  • 역천폿: ㅈㅅ 렉걸림

  • 라인전은이겼음: 야동 다운 받으면서 겜 하지 말라고.

  • 라인전은이겼음: ……가줘?

“이 사람 말 엄청 천박하게 하네.”

눈살을 찌푸린 최이서였으나 그러면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새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최이서를 느끼며 나는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진정해, 꼬추야.

허리에 감긴 최이서의 손이 조금만 내려와도 바로 탈주 박고 혼내주려고 준비 중이던 찰나.

띵동!

“아, 배달 왔다.”

그대로 내게서 떨어져서 현관으로 간 최이서.

찜닭이 최이서를 살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서렌을 눌렀고, 아까부터 욕만 하고 있는 정글과 미드 원딜이 찬성하면서.

찬성4 반대1로 서렌이 되었다.

  • 라인전은이겼음: ?

  • 역천폿: 나 바빠서 나감. ㅂ

탑에 고속도로를 뚫었던 서예린은 당황하면서 이게 무슨 상황이냐 따지고 들려 했으나, 얼른 노트북을 덮고 식탁을 치운다.

“나 화장실 좀.”

“세팅해 둘게.”

찜닭을 세팅하는 최이서를 뒤로한 채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받은 건.

  • 여보세요?

“최이서 도대체 뭐야.”

최이서랑 같이 동거 중인 민지였다.

나랑 사이가 썩 좋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난 일은 이미 다 풀었기에 통화 정도는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최이서의 이상한 행동들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을 법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 아…….

실제로 민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림과 동시에 민망해하고 있었다.

아까 민지랑 톡하고 있던 걸로 봤을 때 나름대로 서로 현 상황에 대해 얘기했던 거겠지.

  • 그, 네가 과에서 예린이? 걔랑 잤다며.

“…….”

  • 그거 혼내준다고 오늘 이서가 진짜 단단히 준비하던데. 아까 너 게임한다고 해서 은근 유혹하는 법도 알려줬음.

“너였냐?!”

어쩐지 거의 숙달된 조교의 시범이더라!

  • 그, 그래도 내가 이서한테 너 변호 엄청 해줬어. 너 이미 윤지랑도 사귀기도 했었고! 네 나이 또래 애들 중에는 업소 가는 애들도 있는데 너는 건전한 거라고!

“업소를 가는 애가 있다고?”

  • ……내 친구들 중에는 가던데?

“시발.”

붉은 진실을 알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끊는다.

어쨌든 최이서의 의도는 알아차렸다. 나를 유혹하겠다는 소리인데 중요한 건.

‘안 하겠다고 했지.

한마디로 내 고간을 터트려 죽이겠다는 최이서의 암살 전략.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최이서가 밥 먹으라고 불렀으나.

“너 이러다가 내가 덮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니다.

일단 오늘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내가 본인의 계획을 눈치챘다고 생각했는지 최이서도 천천히 일어나며 팔짱을 낀다.

아까 전까지 나한테 달라붙으며 살갑게 대하던 거랑 정반대로 싸늘하다.

“내가 거절하면 넌 안 할 거잖아.”

“그래서 그렇게 자극하고 있는 거라고? 미안한데 나도 남자야.”

내 말에 최이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콧방귀를 뀐다.

“피임구 없는데? 지금 나가서 사 올 거면 난 집에 갈 거야.”

콘돔 없다는 걸 믿고 이 지랄을 했구나. 내가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킬 걸 알고 있으니까.

“항상.”

주머니 안,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상자를 꺼내 든다. 검은 상자에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연예인이 그려져 있었다.

“준비된 남자.”

“……너 그거 언제 샀어.”

“너 술 고를 때.”

웃으며 상자를 흔들자 최이서는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내쉰다.

결제를 내가 했다 보니 이것까지 확인하진 못한 모양이었는데. 편의점 직원이 숨겨서 결제하는 걸 도와줬던 덕분에 가능했다.

“항복하고 누워 최이서.”

“…….”

넌 너무 나를 자극했어.

지금 티셔츠만 입고 있는 것도 선을 세게 넘은 걸 알고 있어야 한다.

내 말에 최이서는 질린단 표정으로 밑에 있는 찜닭을 가리킨다.

“찜닭부터 먹고. 이거 식으면 맛없잖아. 당면도 있다고.”

“…….”

좀 아쉽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밤은 기니까 천천히 탁자로 다가가는 순간.

최이서는 무슨 영화에서 나오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다음 도움닫기를 통해 탁자를 뛰어넘어 내 명치에 발차기를 날렸다.

“어억!”

“아오! 김우진!”

그대로 허리가 활처럼 휘면서 바닥에 넘어졌으나, 쥐고 있던 콘돔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하지만 최이서 역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타 파운딩으로 이어 나갔다.

“놔! 놔! 이거 놔! 너 뼈 부러져! 이거 놓으라고!”

“억! 어억! 아파! 미친년아! 아프다고!”

“놔! 말했어! 딱 놔!”

“팬티 보인다고! 회색 시발! 내가 색 좀 예쁜 거로 사라니까!”

“닥쳐! 어차피 안 보여줄 거였어! 넌 오늘 손만 잡고 잔다!”

“함 주라!”

“주긴 뭘 줘! 지금 하면 예린이 때문에 초조해서 하는 거잖아!”

뻐억!

결국 가슴에 꽂힌 최이서의 정권에 몸에 힘이 풀리며 축 늘어졌고.

내 손에 있던 콘돔 박스를 낚아채더니 최이서는 그대로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던져 버렸다.

“지, 집요한 년……!”

괴로움에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린 채로 탄식하자 최이서는 상쾌하니 웃으며 찜닭을 가리킨다.

“먹자.”

먹긴 뭘 먹어.

“너……!”

“왜? 또 있어? 있으면 덤비고.”

없다.

하나 더 사 왔어야 했는데.

나는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며 그나마 마지막 저항으로 외쳤다.

“6,600원 계좌이체 해 나쁜 년아!”

네가 던진 콘돔 값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