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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학원 빼먹고 엄마한테 전화 왔을 때 수준의 긴장감.

• 최이서 -

지금 최이서의 전화는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걸 받아야 할까?

고민이 잠깐 있었으나 재촉하듯 울려오는 핸드폰의 진동에 결국 손가락을 화면에 대고 통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전화를 받자 저 건너편에서는…….

• 뭐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평소랑 크게 다를 바 없는 최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에 긴장이 풀리며 차분해짐을 느꼈다.

영상 자체는 우리 쪽의 요청으로 금방 내려가기도 했고, 대나무숲 펌글도 내가 바로 삭제했으니까.

사실 유아린 같은 대나무숲에 상주해야 하는 사람 정도만 그 영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최이서 학번으로 가입된 익명287은 지난번에 내가 안현호의 계정인 줄 알고 차단했었고.

원본이 올라갔던 SNS 같은 경우는 최이서가 SNS를 안 하다 보니 당연히 알 방법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쫄 필요가 없는데.’

최이서랑 미묘한 관계 속에서 지내고 있긴 해도 그녀가 내 여자친구인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근데 왜 이렇게 죄악감이 드냐.’

서예린이랑 하룻밤 잔 걸 가지고 최이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일단은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지금 주희 선배랑 같이 한강 선배 집에 왔거든. 조별 과제 때문에.”

• 음, 되게 독특한 조합이네?

그렇지 독특한 조합이긴 하지.

“아마 한강 선배가 오늘 한강에 버려지지 않을까 싶어. 범인은 주희 선배고.”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슬쩍 뒷걸음질 친다.

한강의 비명 소리가 아주 찰진 것이 무슨 고문하는 줄 알 것 같다.

진짜 전심전력으로 패고 계신 주희 선배의 모습을 보니 다시는 깝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가 무슨 깡으로 선배 위치를 브리핑했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그거 때문에 지금 좀 바쁘네. 왜 전화했어?”

• 아, 너희 영화 촬영한다고 했잖아. 언제부터 시작하나 해서.

“으음, 변수가 좀 생겨서 선배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네. 이쪽 일 끝나면 내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할게.”

• 그래…… 오늘 운동할 거야?

최근 홈트에 빠져 있는 나였기에 자신감 넘치는 웃음과 함께 답했다.

“하자, 최근 나 몸이 좀 좋아진 것 같아. 탄탄해진 듯?”

• 그래, 그럼 그때 보자.

뚝.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최이서. 괜히 철렁했던 가슴이 편해짐을 느꼈다. 큰 산을 하나 넘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억! 어거걱! 살려주세요오오! 동네 사람드으으을!”

“나도 패러 가야겠다.”

저건 남자와 여자.

두 성별 모두의 적이다.

거세를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희 선배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우웅!

• 유아린 -

또 걸려 온 전화.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 왜.”

• 죽을래? 왜 전화랑 톡 다 씹냐.

“그럴 일이 있어. 왜 그러는데.”

당당한 내 말투에 유아린은 오히려 짜증이 솟는지 투덜거리며 외쳤다.

• 왜 그러냐고? 진심으로 묻는 거냐?!

“아…… 아까 영상 때문에?”

• 와, 대단하네.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 본인 섹x 잘한다고 퍼져서 기분 좋으신가?

“그거 과제 연습이었어.”

• 뭐?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해 낸 얼버무릴 구실. 서예린한테도 SNS 유포자한테도 이렇게 설명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진짜 연습하는 영상 찍어서 보내주면 알아서 사과문이랑 영상 올려주겠지.

“과제 연습이었다니까? 서예린이랑 한강 선배가 이번에 영화 찍는 거 주역이잖아. 그거 때문에 연습했던 거야.”

• 각본 짤 때 내가 도와준 거 잊었냐? 그런 장면 없거든?

“하, 아주 우리 팀원이시네? 죄송한데요. 저희끼리 상의해서 따로 추가한 내용이거든요?”

어딜 부외자가 끼어들고 있어.

우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 너희 영어로 대본 써야 한다며.

“연기 연습은 한국어로 해도 되는데요.”

• 하아, 이서한테도 그렇게 변명해라 이 새끼야.

음?

갑자기 최이서 얘기가 왜 나오세요.

“최이서는 모르지. 이미 원글이랑 펌글 다 지워졌으니까.”

• …….

“방금 통화도 했는데? 조금도 부끄럽거나 거리끼는 건 없지만 혹시 몰라서 경고하는데 최이서한테는 말하지 마라.”

잠깐의 정적.

그리곤 유아린은 혀를 차며 답했다.

• 못난아.

“왜 멍청아.”

• 그거, 이서 나랑 같이 봤어.

…….

………….

“시발.”

---

“왔어?”

노을이 저무는 산책로의 정경은 평소에도 늘 보는 것이었으나 오늘따라 묘한 사무침이 담겨 있었다.

풍경 속에 운동복 차림으로 몸을 풀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짙은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학생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응, 왔어.”

손을 슬쩍 흔들며 인사하자 최이서도 피식 웃으면서 받아준다.

“홈트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는데 어디 실력 좀 보자.”

그리 말하며 최이서는 달리자는 신호를 줬고, 나도 바로 그녀의 옆에서 뜀박질을 시작했다.

문득, 매일 아침 점호를 끝내고 구보를 하게 될 한강의 미래에 경례를 하고 싶어졌다.

“후우, 후우.”

일정한 호흡으로 달리는 최이서.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정하게 달리고 있는 발걸음에 맞춰 나도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달린다.

따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애초에 운동하면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고 말이다.

그저 그렇게 달리고 있자니 어느새 평소 끝나는 지점까지 도착했으나.

“좀 더 뛰자.”

최이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좀 더 나아갔고, 나도 그것에 따랐다.

‘체력이 좋아지긴 했구나.’

처음 달렸을 때 여기서 멈췄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이 이상 달릴 수 없었으니까.

체력적 한계가 있었기에 정해진 골인 라인. 하지만 그걸 오늘 너끈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슬쩍 눈만 흘겨 최이서를 쳐다본다. 내가 골인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도 달릴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녀 역시 뭔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후우, 후우.”

거의 30분은 더 뛴 다음에야 최이서는 멈췄다. 그럼에도 아직 호흡이 크게 거칠지 않은 걸로 봐서는 더 뛸 수 있어 보였지만.

“하아아악! 하아아악! 슈버어얼!”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조금 성장했다고 으쓱댄 게 몇 분 전이고 거기서 만족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오래 뛴 덕분에 주변은 이미 컴컴해져서 가로등 불이 켜졌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책로 끄트머리까지 와버렸다.

“더럽게 힘드네 진짜!”

근처 벤치에 거의 기어가듯 가서 앉자 나를 보던 최이서도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분명 같이 뛰었는데 벌써 호흡이 돌아온 최이서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하천이 흐르는 방향을 보며 물었다.

“여러 고민을 해봤거든?”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말이 상당히 진지하다는 건 음색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나기도 했어.”

“…….”

“너를 막, 반으로 접어서 죽일까 싶기도 했고.”

뭔데.

왜 진짜로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건데.

순간 섬뜩했으나 어쨌든 최이서의 말을 계속 경청한다.

“그러다가 실망하기도 했고.”

“…….”

“또 그러다가 내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무어라 말해주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서예린이랑 같이 잤던 건 변함이 없으니까.

“여자친구가 아니니까.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가만히 있기는 힘들더라고.”

“…….”

“그러면서도 내가 너를 굳이 이렇게까지 좋아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비수처럼 말들이 가슴에 꽂혀 들어오지만 그렇다고 대꾸할 말은 없었다.

관계에 있어 수동적인 나였기에 최이서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면 나는 그걸 따르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내가 뭔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너 데리고 호텔이나 가볼까 싶기도 했고 말이야.”

“크흠.”

“근데. 그러면 내가 너무 싸지는 것 같아.”

“…….”

“나름 처음으로 경험하는 건데. 단순히 질투에 눈멀어서 시합하는 것처럼 하는 건 내 스스로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당연하지.”

동의했다.

누군가가 했다고 해서 자신도 얼른 뒤쫓아야 한다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망치는 건 어리석었다.

“내가 너무 느린 걸까?”

천천히 고개를 돌린 최이서가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다들 금방금방 어른이 되고 있어.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지는 것 같아.”

“…….”

“그래서 솔직히 좀 걱정됐어. 내가 올바르게 가고 있는 걸까 하고.”

슬그머니 뻗어온 최이서의 손이 내 손등을 부드러이 어루만진다.

그것에는 나름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내 페이스대로 가는 게 맞는지 말이야.”

입가에 지어지는 부드러운 미소는 최이서 나름대로의 답변이기도 했다.

“맞는 것 같아. 나는 이대로 가는 게 맞아.”

“…….”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결국 너는 나를 의식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려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예린과 관계를 가졌을 당시.

가장 먼저 걱정했던 건 최이서였고.

영상이 퍼졌을 때도, 전화가 왔을 때도, 만나자고 안심했을 때도.

나는 최이서를 항상 신경 쓰고 있었다.

어느새.

내 안에 최이서라는 사람이 꽤나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을 타고 최이서가 부드럽게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이게 내 속도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최이서라는 사람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따, 땀 냄새나…….”

그게 싫었던 건지.

혹은 전 여친이 생각났던 건지.

생각 이상으로 감정이 동요되고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으나 일단 억지로 밀어내려 해봤으나.

“난 네 땀 냄새 나쁘지 않아.”

최이서는 오히려 팔짱까지 끼면서 달라붙어 왔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딱 들어갔다.

‘얘는 왜 땀 냄새도 묘하게 향긋하지.’

향긋하기도 했으나 묘하게 남성의 성적인 판타지를 자극하고 있기도 했다.

팔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흉부와 더불어 유혹하듯 풍기는 페로몬.

몸을 빼고 싶어도 벤치에 앉아 있어서 어디 도망갈 수 있는 장소도 없다.

“나는 일단 정리가 된 것 같아.”

후련하니 말한 최이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팔의 닿던 촉감과 온기 그리고 체취가 사라지자 묘한 아쉬움이 찾아왔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희 집으로.”

상쾌한 미소와 함께 언급한 건 뜬금없게도.

“……우리 집?”

“응,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간다고 민지한테도 얘기해 뒀어.”

그 말에 나는 멍하니 최이서를 바라보다 답했다.

“콘돔 없는데?”

“이 씨……!”

뻐억!

바로 주먹이 날아든 최이서. 하여간 버릇 어디 안 간다.

벤치에서 몸을 웅크리자 최이서는 내 등을 쾅쾅 때리면서 외쳐댔다.

“방금! 방금 전까지! 그런 거 안 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천천히 갈 거라고 말했는데! 좀! 그냥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런 거잖아!”

“아, 아니! 누가 들어도 방금은 네가 오해하게 말했잖아!”

이건 진짜 억울하다!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최이서의 양 손목을 붙잡고 바로 일어선다.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최이서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솔직히 맞지? 네가 오해하게 말한 거 맞지?”

“후우! 후우!”

숨을 고르던 최이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답했다.

“맞아, 솔직히 좀 짜증 나서 일부러 오해하게 말했어. 너 패고 싶어서.”

“…….”

아주 지능적이네.

천천히 손을 놓아주자 최이서는 손목을 돌리면서 노려본다.

“내가 말했지, 질투 정도는 좀 봐달라고.”

“주먹질까지 봐 드릴 생각은 없는데요.”

내가 그리 말하자 최이서는 팔짱을 끼며 답했다.

“편의점 들러서 술 사 가자. 너 오늘 진짜 죽었어.”

“…….”

“예린이랑 했다 이거지? 크게 후회할 거야.”

“뭘?”

구체적으로 뭘 후회할지 궁금해졌기에 최이서에게 물었으나 몸을 휙 돌리며 그냥 가버렸다.

아무튼.

오늘, 최이서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갈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