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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아, 술 한 잔 따라 보거라.”

민주희 선배가 온 덕분에 분위기가 그나마 환기가 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야말로 고기집의 환풍구와 같은 존재.

나는 넙죽 술을 따라드리며 주희 선배에게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늦으셨네요.”

“음? 늦었다고 꼽주냐?”

호탕하게 웃으면서 술을 마시는 주희 선배. 따로 같이 어울릴 필요도 없다는 듯 그냥 혼자서 마셔버리는 모습이 호쾌함 그 자체였다.

“친구들이랑 당구 좀 치고 왔지.”

“당구도 치세요?”

솔직히 들을 때는 좀 놀랐지만 막상 아저씨들 사이에서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당구치는 주희 선배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물론, 지금은 흡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담배를 피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름? 우진이 좀 치냐?”

바로 반기면서 나랑 같이 당구 치러 가자고 말할 것 같은 주희 선배에게 나는 웃으며 답했다.

“포켓볼만 쳐봤는데요.”

“쓰읍, 꼬추 떼라.”

그걸 여자가 말하는 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성희롱 미쳤네요.”

“푸흣!”

옆에 있는 서예린이 웃음이 터져 버렸으나 무시했다. 얘는 지금 성적인 얘기만 나오면 웃는, 거의 사춘기 감성이니까.

“아니, 근데 웬 포켓볼이냐. 보통 애들이랑 당구 치러 가면 4구치잖아.”

“……전 여친이랑 쳤는데요.”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세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내게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는데 민감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럼 선배는 어쩌다 치셨어요? 당구장은 여자들끼리는 잘 안 가잖아요.”

“나?”

술잔을 잠깐 내려다보던 주희 선배는 손을 내밀어 다시 한 잔 받더니 입에 털어 넣으신다.

무슨 연료 주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으음, 뭐 너도 얘기했으니까.”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했는데.

“고딩 때 큐로 애들 패다가 손맛이 좋아서 가봤지.”

듣지 말 걸 그랬다.

“선배랑은 당구장 가면 안 되겠네요.”

“크흐, 당구장만 가면 안 될까.”

주희 선배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다른 곳에 가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는 소리에 살짝 섬뜩했다.

PC방을 가면 키보드로 때리고, 노래방을 가면 마이크로 때리려나?

다시 술을 홀짝이시며 슬쩍 내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보시고는 어깨를 으쓱거리신다.

“근데 우진이가 참 능력이 좋긴 해. 우리 과 이쁜 애들 둘을 옆에 끼고 있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을 한 번씩 훑어봤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긴 했다.

주변 애들이 힐끔힐끔 보면서 은근 질투를 내비칠 정도로, 서예린이랑 최이서의 사이에 있는 이 자리는 상당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나, 개 쩌네.”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자 바로 양쪽 허벅지가 꼬집혔다. 둘 다 남들 모르게 나한테 눈치를 준 거였다.

하필 둘 다 꼬집힌 덕분에 허리가 굽혀지며 손이 아래로 내려가 꼬집힌 부분을 문지르고 있는데.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스벌, 나는 연애 언제 해보냐.”

주희 선배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귀엽다면서 아예 맥주잔에 소주를 채우신다.

이거 잘못하면 이상한 술주정에 꼬일 수도 있겠다.

“선배 정도면 관심 있는 사람 한둘은 있을 것 같은데요.”

거의 직장 생활하는 대리처럼 말하는 최이서를 보면서 주희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어휴, 고딩 때는 새끼들이 쫄보라서 말이지. 눈만 마주치면 도망가는데 뭘 얘기할 틈이 있냐.”

“그래도 지금은 아니잖아요.”

잔을 내밀어 건배를 유도하는 최이서. 우리 넷은 각자 잔을 들어 부딪치곤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야, 아니면 뭐 하냐. 지금은 공부하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다. 나 전액장학금 받아야 해.”

“그건…… 꽤나 공감 가네요.”

슬쩍 내 쪽을 흘기면서 동의하는 최이서. 다음 학기에 보자던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연애는 지금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

그런데 여기서 좀 뜬금없게도.

술을 가장 늦게 삼킨 서예린이 끼어들었고, 주희 선배도 흥미를 가졌다.

“너 말 잘해야 한다. 여기서 네가 연애 관심 있다고 말하면 득달같이 달려들 늑대 새끼들이 한둘이 아니야.”

선배가 그리 말하니 고기집이 살짝 조용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서예린의 발언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서예린은 망설이지 않고, 꽤나 당돌하게 말했다.

“이 시기에만 겪을 수 있는 게 있잖아요. 연애도 안 해보고 사회에 나가면 좀 억울할 것 같아요.”

“키야! 그것도 맞는 말이야. 예린이 조만간 남자 하나 잡겠구만.”

서예린 정도면 말만 걸어도 사귈 수 있지 않겠냐면서 호들갑을 떠는 주희 선배.

그러면서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축제 무대 때로 넘어갔다.

주희 선배는 서예린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는데.

“진짜로? 진짜 명함 받았어?”

“아, 네에…… 근데 죄송하다고 거절했어요.”

“축제 때 온 이준민이 너한테 번호 달라고 했던 것도 맞아?”

“……그, 으, 네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힐끔힐끔 내 쪽을 보면서 대답하는 서예린. 뭔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에 왜 그런가 싶었는데.

핸드폰으로 토독토독 뭔가를 적더니 나한테 알림이 왔다.

• 익명69: 걱정 마.

“뭘 걱정해.”

“흐아!? 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가 대놓고 서예린을 보면서 대답해 주자 당황해서는 나를 찰싹찰싹 때리는 서예린.

괜히 밀회를 주고받는 기분이라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그런 와중.

입고 있는 옷이 살짝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옆을 확인하니 최이서가 내 옷자락을 잡은 채로 아주 미세하게 당기는 중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못 본 척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자니 이번엔 주희 선배의 타깃이 내 쪽으로 왔다.

“그러고 보니 우진아, 이제 슬슬 과제 촬영할 거니까 알아둬라.”

“술자리에서 일 얘기하시는 거예요?”

“어, 할 거야. 예린이도 있으니까 딱 됐네.”

유아린이랑 같이 합동해서 만든 시나리오. 덕분에 시나리오 특혜자가 사라져 누구도 과제에서 빠지지 못하고 꼼짝 없이 참여하게 됐다.

“과제 안 한다던 선배들은 어떻게 됐어요?”

그때 노래방에서 주희 선배가 깽판 치고 꺼지라고 욕하지 않았던가.

바로 고기를 질겅질겅 씹는 주희 선배의 모습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어떻긴 뭘 어때. 그년들은 나 지나갈 때마다 눈 깔고 있지. 빼고 할 거야.”

“괜찮은 거 맞아요? 시나리오에 여자가 좀 필요하지 않았나?”

여학생들 담력시험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조는 지금 주희 선배랑 서예린 둘밖에 여자가 없다.

“배우만 해줄 사람 좀 구해 봐야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최이서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주희 선배.

이 사람, 이래서 지금 조별 과제 얘기 꺼낸 거구나?

나도 그대로 최이서를 쳐다보자 어느새 다시 집게를 잡고 고기를 굽고 있던 최이서가 당황한다.

“어? 나, 나?”

“이서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과대라서 책임감도 강하지 않나?”

내게 묻는 주희 선배.

최이서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며 받아친다.

“그것뿐인 줄 아세요? 최이서는 운동도 해서 체력도 좋고, 은근 사람 배려할 줄도 알고, 속마음은 또 얼마나 깊은데요.”

“와, 정말로?”

“아, 그럼요. 이런 여자가 어딨어?”

“이야! 그런 이서라면 곤란한 우리 조의 상황을 조금만 알게 되어도 도와주지 않을까?”

주희 선배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최이서는 한숨을 내쉰다.

“바쁘기도 하고, 연기 같은 거 해본 적도 없는데…….”

하지만 말은 그러면서도 표정은 가볍다. 슬쩍 나를 흘겨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노골적이긴 해도, 칭찬이 듣기 좋았으니까 할게요.”

“오예, 배우 확보. 일단 주연은 조원인 예린이가 하고. 이서는 최대한 분량 없는 걸로 줄게.”

“부탁드려요.”

그러면서 주희 선배와 최이서는 과제 관련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그때 옆에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서예린. 오물오물하면서 삼겹살을 먹고는 있는데 뭔가 바라는 눈치다.

“너도 칭찬해 달라고?”

대충 때려 맞추자 서예린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는데.

“흐음, 눈이 두 개네?”

“…….”

“귀도 두 개야, 칭찬해.”

“…….”

“콧구멍 벌렁거리는 거, 칭찬해.”

“…….”

“고기 계속 처먹는 거 칭찬해. 돼지 되겠어.”

“삼.”

“숫자 잘 센다. 칭찬해.”

“이.”

“숫자 반대로 세고 있지만 칭찬해.”

“일.”

“화내려고 주먹 쥐고 있지만 하나도 안 무서운 거 칭찬해.”

“이 씨!”

그대로 나한테 투덕거리면서 주먹질을 시작한 서예린.

“오소이.”

서예린의 주먹을 막아내면서 피식 비웃어주자 녀석의 주먹질이 더 빨라진다.

슬슬 버티기 힘들어서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간다고 도망친다. 가게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게 아니라 계단실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해서 밖으로 나왔다.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니 서 있는 건.

뜬금없게도 한강 선배였다.

“우진아.”

꽤나 진지한 표정.

그러면서도 물러섬이 없는 모습은 당당함과 위압감마저도 들 정도였다.

“아까 다 들었어. 예린이 얘기.”

“……서예린이 연애에 관심 있다고 말한 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

“귀가 엄청 밝으시네.”

“장난치지 말고.”

이러다가 한 대 맞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일단 물러난다. 싸우면 내가 질 것 같으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지. 나 진심으로 예린이 좋아하고, 노리고 있다고.”

“그러셨죠.”

“이제 안 참을 거야. 진지하게 관심 있다고 말하고, 시간 들여서 관계 쌓은 후 고백할 거야.”

“…….”

“너한테 양보해 달라는 거 아니야. 경쟁하자는 거지. 선의의 경쟁.”

뭔가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이렇게 말하는 애랑 내가 술 마시고 확 김에 하룻밤 자버렸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말하겠는가.

가슴이 미어졌으며, 내가 나쁜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 음…… 선배.”

“왜 우진아.”

운을 띄웠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이런저런 고민 하다가 결국.

“서, 서로 힘내요!”

내가 악수를 청하자 한강 선배는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강하게 손을 잡으셨다.

“그래, 힘내보자.”

미안해.

내가 진짜 미안해.

“저, 저는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리 말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선배가 나를 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널 좀 오해하고 있던 것 같다. 누가 사귀게 되던 혹은 둘 다 실패하든. 우리 술이나 한잔 나중에 따로 마시자.”

“그, 그럼요!”

그리 말하고 밖으로 냉큼 나간다.

기묘한 죄책감.

왜 내가 만화에 나올 법한 쓰레기 남자가 된 기분이 지워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 있었네!”

그때 계단을 훌쩍 뛰어서 내려온 유아린. 씩씩거리면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정찬우를 진짜 데려와? 그것도 우리 테이블에 앉혀? 그래 놓고 너는 여자 셋 끼고 아주 좋아 죽지?”

“잘 왔다. 나 좀 몇 대 때려줄래?”

“넌 뒤졌……! 음? 뭐라고?”

“때려 달라고.”

맞지 않고는 지금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진심이야?”

“물어보지 말고 때려라. 내 자신이 싫어지니까.”

그리 말하며 눈을 천천히 감는다.

그래, 이 정도 고통은 일단 느껴야겠…….

퍼억!

“어억! 미친! 잠시만요! 존나 아파!”

때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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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풀이 다음 날.

월요일에는 따로 누구 만나는 강의도 없고 그냥 혼자서 조용히 학교에 있다가 오기 때문에.

라면과 편의점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모바일 게임, 블랙 아카데미를 하는 중에 뜬금없는 사람한테 톡이 왔다.

• 한강 선배: 혹시 소식 들었니?

“음?”

김밥을 입에 하나 쏙 집어넣으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바로 뒤이어 다른 사람에게 온 톡 하나.

• 주대장: 아, 시발 제발.

• 주대장: 진짜 세상이 나한테 왜 이렇게 가혹하냐.

“우움?”

뭔 일이냐고 답장을 보내려고 했으나 한강 선배 쪽에서 또다시 톡이 왔다.

• 한강 선배: 예린이 잘 부탁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도착한 다음 톡.

• 주대장: 한강 이 새끼.

• 주대장: 영장 나와서 한 학기 버리고 군대 간단다.

“……엥?”

둘이 무슨 개그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