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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애들한테 말해주고 올게. 괜히 상처받지 마라.”

“상처 안 받아요.”

어색하니 웃으며 답하자 민주희 선배는 내 상태를 살피더니 어깨를 툭 쳐준다.

“그래, 이런 걸로 상처받을 애가 아닌 것 같긴 했어.”

“…….”

“그래도 억울하긴 할 테니까 내가 애들한테 말해둘게. 이상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해도 애들이 곧이곧대로 믿어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민주희 선배는 그런 소문 따위에 휘둘리거나 하지 않고 나를 믿어주는 게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나를 무조건 신용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대학 생활 나쁘지 않게 했네.’

그래도 멋진 선배 하나가 믿어주니까.

다른 애들한테 설명하는 건 주희 선배한테 맡겨두고 나는 다시 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섹x좌께서 여기 계셨구나?”

뒤에서 들려온 유아린의 목소리.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유아린은 한껏 재밌다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항, 이래서 찾으려고 하셨구나? 섹x를 그렇게 하고 싶으셨어요?”

“…….”

“어디, 누나가 한 번 주선해 봐?”

“뒤지기 싫으면 가라.”

“흐핳! 개 웃겨. 아니, 익명90이 너 저격한 거 아냐?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냐?”

“우연이야. 걔 아무것도 모르는 거 맞아.”

애초에 성별부터가 틀렸는데 익명90이 서예린에 대해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단호한 내 대답에 유아린은 옅은 숨소리를 흘리며 물어왔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익명90이 틀렸나 보네?”

별말 없이 긍정하자 유아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영어영문과인건? 그건 맞췄잖아.”

“우연이겠지.”

“에잉 쯧쯧. 바보야.”

혀를 차며 팔짱을 끼는 유아린.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둘째 날이랑 셋째 날은 내가 봐도 찍은 게 맞아. 사실상 둘 중 하나였잖아?”

• 익명90: 두 번째 익명69는 사람을 피하는 경향이 있음.

“아싸거나 아니거나. 근데 익명으로 섹x하고 싶다고 매일 도배하는 애가 인싸일 경우는 드물지.”

해볼 만한 도박이었겠지.

• 익명90: 세 번째로 익명69는 남자임.

“남자거나 여자거나. 이것도 둘 중 하나야. 마찬가지로 남자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남자라고 했겠지.”

“…….”

유아린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근데 영어영문과인 건? 우리 대학에 학과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콕 집어서 말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에잉.”

재미없다면서 내게 핸드폰을 내민 유아린. 거기에는 익명69의 작성 기록들이 나와 있었다.

“익명69?”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알기 위해서 익명90이 했던 걸 똑같이 해봤지. 그러니까 딱 알겠더라고.”

결국 익명69의 스토커라고 봐도 무방한 게 익명90이다. 유아린은 똑같이 익명69의 글을 읽어봤다는 소리고.

“보면 대부분이 쓸모없는 도배에 똑같은 말들뿐이야. 매일 섹무새 짓 하고 있지만.”

툭.

유아린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댓글’ 쪽이었다.

“익명69는 댓글을 잘 안 남기는 편인데 남긴 게시글의 공통점이 뭔지 알겠어?”

내민 화면을 보고 있자니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영어영문과 관련 글들이네.”

“맞아!”

내 말에 유아린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자신이 찾아낸 정답을 좀 더 칭찬해 주길 바라는 모양.

“영문과 관련된 글들에는 하나 같이 익명69가 댓글을 달았어. 노래방 저격 때도 그렇고, 곱창집에서 곱창 낼 때도 그렇고, 예린이 관련 얘기 나올 때도 그렇고.”

“…….”

“전부 다 영문과 관련 글들이야. 그러니까 익명90은 나름 추측해서 찔러본 거야. 익명69가 영문과가 아닐까 하고.”

만약 아니었어도.

“아님 말고 라면서 넘기면 그만이지.”

왜냐면 익명이니까.

뒤통수가 찌르듯 아파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익명90이라는 사람을 향한 미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본인은 그냥 웃으면서 쓴 거겠지.

어차피 아니면 아닌 거니까 싶어서 대충 찔러본 거겠지.

정작 그거에 나랑 서예린은 호들갑스럽게 또한 심각하게 대응했을 뿐이지만.

“만나봐야겠네.”

만나보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 가슴 속에 지닌 감정이 무엇인지, 익명90을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엉? 만난다고? 아직도 찾으려고?”

“응, 겸사겸사 나 누명 쓴 것도 풀고.”

“……도와줘?”

넌지시 물어오는 유아린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혼자 찾아볼게. 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내 대답이 신통치 않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유아린은 볼을 살짝 부풀리더니 냉큼 가버렸다.

그 뒤, 나도 다시 주방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파트는 제육볶음.

이게 은근 손이 가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두면 금방 할 수 있는 메뉴다.

맛이나 볼 겸 그리고 여기서 조리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싶어 시범으로 조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

어느새 내 옆에 선 채로 멀뚱히 서예린. 흰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아까 유아린이랑 똑같은 복장이었다.

아무래도 저게 서버들 유니폼인 모양이었다.

“먹어볼래?”

계속 제육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묻자 서예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좀 뒤로 가. 옷에 양념 튄다.”

“아, 응!”

그러더니 쪼르르 내 등 뒤로 도망치는 서예린. 꽤나 기대되었는지 등에 가까이 선 채로 계속 제육볶음을 보고 있다.

“우진아.”

“왜? 좀만 기다려.”

“네가 대나무숲에 이상한 거 쓴다고 애들이 막 그러던데?”

“…….”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예린은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미소로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너 아닌 거 다 알아.”

그렇겠지.

너니까.

“그리고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치?”

얼씨구?

“세…… 서, 성관계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우리 이제 성인이니까 그런 것도 익숙해질 때긴 하지.”

“…….”

“어쨌든 난 너 응원해 우진아. 네가 설령 대나무숲에 그런 글을 써도! 나는 언제나……!”

덜그럭.

결국 프라이팬을 놓고, 가스 밸브를 잠근다.

“섹x좌는 나쁜 놈이야.”

그리곤 서예린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

“나쁘지. 그런 글을 막 도배하고 있으니까. 그치?”

갑자기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서예린은 당황해서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꾸한다.

“그, 그, 그래도 적정선을 지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에이, 도배에 적정선이 어디 있어. 그냥 눈살 찌푸려지면 선 넘은 거지.”

그러자 서예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뭔가 말하려고 입을 움찔움찔 떤다.

“서, 선을 넘었으면 대나무숲 관리자가 알아서 자르지 않았을까?!”

삑사리까지 낼 정도로 당황한 모습. 나는 방긋 웃으면서 서예린에게 고개를 저었다.

“관리자도 포기한 걸 수도 있지. 애초에 섹x 섹x 거리는 애를 어떻게 좋게 보겠어.”

“섹……!”

“응? 봐. 너도 지금 말 못 하잖아.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매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착하다고 말해.”

“차, 착하지 않아도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눈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서예린.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양쪽 어깨에 손을 얹어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다.

“그래 놓고 너도 섹x라고 말 못 하고 있잖아. 하면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말 못 하는 거 아니야?”

“아, 아니야! 세…으뜨는 나쁜 게 아니야!”

“말 못 하는데?”

“세…! 세……!”

“세? 세? 결국 너도 말 못 하잖아! 실은 익명69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야!”

“그럼 말해!”

“세, x스!”

작게 소리친다는 게 딱 이런 느낌일까. 양손을 모은 채로 하늘을 향해 외친 서예린.

나는 복싱 코치처럼 고개를 크게 흔들면서 더욱 거칠게 압박한다.

“그래! 이 자식아! x스는 나쁜 게 아니잖아!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떽뜨!”

“다시!”

“떽뚜우!”

“한 번……!”

한 번 더 하라고 외치려던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이게 도대체 무슨 광경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의 최이서.

“떽뚜! 떼에엑뜨! 떼에엑!”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떽! 어딜 성인 여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있어 남사스럽게!”

바로 손절을 치면서 말려보지만.

“떽뜨덱드으.”

말렸음에도 서예린은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꽉 감은 채로 계속 중얼거린다.

결국 머리에 열이 오를 대로 잔뜩 오른 서예린을 밖으로 내보내서 바람을 쐬게 했고.

“뭔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최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애를 저렇게 만든 건데?”

“…….”

“내 머리로는 방금 그 상황에 어떻게 도달했는지 상상이 안 돼서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나도 서예린의 그런 반응에 욱해서 강하게 나섰는데 좀 후회하고 있다.

그래도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걸 말해주자.

“내 잘못 아냐.”

명백하게 서예린 잘못이고, 벌을 받았을 뿐이다.

“…….”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던 최이서는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단톡에 업무 시간표 올라온 거 봤어?”

“봤지. 노동청에 신고하고 싶은 거 참았어.”

밤부터 새벽까지 일하는데 쉬는 시간이 얼마 없는 거 보고 아주 기분 더러웠다.

“어쩔 수 없잖아. 대신 쉴 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사준다면 거절하진 않지.”

과대가 책임지고 사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치? 너 쉴 때 나랑 겹치니까. 그때 같이 돌아다니자.”

“그…… 래?”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순간적으로 입술이 굳었다.

뭔가 데이트 느낌이 나지 않나 싶었는데. 이미 최이서는 서빙하는 애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착각인가?’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가 싶었으나.

주방 천막을 나서기 전, 최이서가 슬쩍 고개만 돌려서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나를 보며 작게 웃어 주었다.

“데이트 맞아.”

아.

“마, 맞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