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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2 KiB
Raw Blame History

  • 익명90: 매일 하나씩 힌트를 드립니다. ‘영어영문과’ 학생임.

“뭐야 이건.”

주희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빈 강의실 아무거나 하나 잡고 들어가서 가져온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5시간 공강이라는 사기를 팍팍 꺾는 시간표에 마음이 깎이는 도중이었는데.

유아린이 따로 보내온 톡을 보고 대나무숲을 확인하고 있었다.

  • 유아린: 또 우리 과임. 이 정도면 네가 뭐 하는 거 아니냐?

시답지 않은 장난은 무시하고 익명90이 쓴 글 밑에 달린 댓글들부터 확인한다.

↳ 익명11: 개가 주인을 물었네 ㅋ

↳ 익명175: 또 너희야 영문과?

↳ 익명28: 근데 이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섹x좌 매일 섹x만 쓰는 거 아님?

↳ 익명229: 절대 모르지.

↳ 익명198: 그냥 섹x좌한테 관심 못 받아서 저러는 거 아님?

다행인 건 대부분이 익명90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익명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정체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였으나.

  • 익명75: 뭔 소리임. 알 수 있지.

사그라들거라고 생각했던 장작이 불이 지펴진다.

  • 익명75: 당장에 관리인 된 익명59도 관리자 정체 알아내서 관리인 된 거잖아.

  • 익명75: 관리자가 그만큼 철저하게 숨었는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음. 그러면 익명69처럼 매일 글 싸지르는 애도 뭔가 알 방법이 있지 않겠음?

“유아린 진짜!”

어떻게 하나하나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 이건 진짜 나중에 벌을 좀 줘야 할 것 같다.

이를 으득 물면서도 평소였으면 그냥 차단해 버렸겠지만.

“하, 머리 아프네.”

상황이 복잡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저놈이 정말로 서예린이 있는 영어영문과를 맞췄으니까.

여기서 그냥 무시하면서 차단했다가 다른 방식으로 익명69가 서예린이라는 걸 알린다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익명90이 갑자기 급발진해서 달려들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상하기 힘들다.

그냥 대놓고 학과 게시판 같은 곳에 붙여놓을 수도 있다.

무시해서 서예린이 알아서 처리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사실 그게 나답다면 나다웠고 또한 편한 방법이긴 했으나.

“어휴, 이래서 친구 사귀면 안 되는데.”

짧은 시간이었어도 지내면서 쌓은 정이 있기 때문인지 괜히 걱정되었다.

특히나 서예린과 함께 다니면서 녀석이 외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지 알고 있다.

어딜 가든 주목받고,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심지어는 성희롱까지도 심심치 않게 듣는 삶.

그런 일상의 스트레스를 그나마 조용히 풀기 위해서 대나무숲의 익명69로 활동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만약 이런 것까지 들키게 된다면 서예린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휴학하거나 자퇴하는 거면 그나마 양반인 걸 수도.

일단 바로 유아린에게 톡을 보낸다.

  • 김우진: 너 어디야.

  • 유아린: 학교 근처 카페. 왜? 오려고?

  • 김우진: 네가 와야지.

  • 유아린: ㅗ

  • 김우진: 진심이야. 교3에 있으니까 얼른 와.

  • 유아린: 교양관? 멀리도 있네.

말은 그러면서 오는 중인지 대답은 따로 없다. 그런 와중에 나는 짜증 내면서도 대나무숲의 주제를 조금 비틀어 본다.

  • 관리자: 관리인 1호가 지난 일요일에 일을 너무 못해서 벌을 주려고 하는데 뭐가 좋을까요?

이러면 익명90의 저격도 관심이 덜해지겠지. 실제로 대나무숲의 모든 관심은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 익명274: 그거 아직도 벌 안 줌?

↳ 익명16: 그냥 관리인 박탈시키 삼. 솔직히 일요일에 보기 힘들었음;

↳ 익명98: 무급인데 벌까지 받음? 좆소네 그냥.

↳ 익명175: 딱밤 10대.

↳ 익명198: 지난번에 말했는데. 묶어두고 엉덩이 개때리삼. “죄송해요♥”라고 말할 때까지.

↳ 익명62: ㅈㄴ 흥분된다.

↳ 익명129: 198은 진짜 개 씹덕 망상에 ㅈㄴ역겹네.

↳ 익명11: 책임은 니가 져야지 관리자야. 네가 일을 좆 같이 못하는 애로 뽑았는데.

내가 장난으로 올린 글이라는 걸 다들 알아서인지 장난스러운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중간중간 진지해 보이는 애들이 있긴 했으나 따로 답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익명90에게 가 있던 관심을 끌고 왔다. 덕분에 댓글도 달리지 않는 익명90의 게시글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데.

나한테 따로 1:1 문의가 들어왔다.

  • 익명69: 저거…… 뭐에요?

당연히 서예린도 보고 당황했겠지. 서예린은 몰라도 익명69가 저격당한 상황은 생소할 것이다.

  • 익명69: 호, 혹시 관리자님이 뭐 흘린 건 아니죠?

날 의심할 만하겠지.

익명 커뮤니티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면 관리하는 사람 쪽에서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 관리자: 나도 그쪽이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흘려요.

하지만 나도 모든 사용자를 알 수는 없다. 서예린도 그걸 모르진 않겠지.

  • 익명69: 그, 그쵸?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죄송해요.

의심할 만은 하다.

아니, 오히려 안 했으면 그게 이상했겠지.

  • 관리자: 근데 진짜 영문과인가 보네요. 찔려서 이렇게 말하신 거 보면.

  • 익명69: 세, 섹x!

얼씨구.

할 말 없으니까 그냥 막말이나 하는 것 좀 봐라.

살짝 귀엽게 느껴져서 웃음을 삼키면서 계속 타자를 친다.

  • 관리자: 저 글 삭제는 안 할게요. 오히려 삭제하면 진짜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관리자로서 익명90이 어떻게 그쪽 정체를 알아냈는지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요.

  • 익명69: 섹x!

  • 관리자: 그러니까 괜한 걱정 말고. 반응도 하지 말고 평소처럼 굴어요. 알았죠?

  • 익명69: 섹x!

  • 관리자: 도와주기 싫게 만드시네.

  • 익명69: ……감사합니다.

바로 숙이는 것 좀 봐라. 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못 본다는 게 좀 아쉬웠다.

  • 관리자: 대나무숲 이용자잖아요. 걱정 말고 그냥 편하게 써요. 익명으로 스트레스 풀 수 있는 곳도 별로 없는데.

사실 많긴 해도 우리 대나무숲처럼 청결하고, 검증된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곳은 드물다.

  • 익명69: 딸감 보내드릴게요.

  • 익명69: (사진)

“아, 진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눈은 어느새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어라?”

당연히 서예린 본인 사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양의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가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사진첩에 저장하면서 슬쩍 되묻는다.

  • 관리자: 다른 배우네요? 평소 보내주던 배우는 어디 감?

  • 익명69: …….

  • 관리자: ?

  • 익명69: 뭐, 뭔가 미안해서요.

  • 관리자: 미안해요? 저한테?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 익명69: 아, 아뇨. 아는 애한테 뭔가 좀 미안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그런 사진을 보내지 않을 정도로 최근에는 정신적으로 안정화됐다는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관리자인 내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이곳저곳으로 서예린의 팬티 사진이 퍼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 관리자: 저는 이쪽이 취향이네요.

일부러 이쪽 사진만 보내라고 답장한 후, 다시 사진을 확인한다.

‘쓰읍.

진짜 내 취향인데?

나는 약간 풍만한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전 여친이 좀 평범한 편이라서 그런 건가?

이거 배우 누구냐고 익명69한테 다시 보내볼까 싶은 순간.

“흐응, 좀 늦게 올 걸 그랬네?”

“…….”

서늘하면서도 혐오감이 물씬 담긴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찌르고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뒷목이 잡혔는데 악력이 생각보다 강한 게 지압 효과가 있었다.

상큼하게 퍼지는 과일 향.

이제는 익숙해진 통통 튀는 목소리.

블론드 머리가 내 뺨을 간질이는 게 마치 뱀이 핥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여자가 취향이세요?”

내 화면에 있는 풍만한 서양 여자를 보면서 유아린이 되물었기에 나는 슬며시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빨리 왔네?”

“말 돌리는 거 봐라, 어휴.”

“크흠.”

“저런 여자가 너 같은 애 좋아하겠냐? 성격도 더럽고, 음흉한 데다가 여자도 밝히는데?”

“그럼 너 같은 애를 좋아할 좋은 남자가…… 아, 찬우 있지.”

“이 새끼가.”

바로 내 뒷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유아린. 태권도 했다더니 악력도 꽤나 상당하다.

“아파! 알았어! 찬우 얘기 안 할게!”

“어휴.”

이제야 손을 놓아준 유아린은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허시 초코우유를 건네준다.

그러고 자신은 초코몽을 꺼내서는 쫍쫍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땡큐.”

“됐고, 뭐 때문에 불렀는데.”

갑자기 불린 거치고는 생각보다 빨리 와준 유아린 덕분에 할 말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냥 익명69랑 대화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했을 뿐이지만.

“할 일이 있어. 대나무숲 관련된 거야.”

“그럴 것 같긴 했는데…… 무급으로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이거 무슨 장학금이나 학점도 안 나오잖아.”

“일요일에 일 더럽게 못했던 벌이야.”

“켁! 케엑!”

내가 심드렁하니 말하자 갑자기 사레가 들린 유아린이 초코몽을 밀어내며 벌떡 일어난다.

그러더니 확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 쥐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외친다.

“어, 엉덩이 안 맞을 거야!”

“……엥?”

“시발 놈아! 엉덩이 맞는다고 흥분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그거 맞고 순종하고 그런 거 다 판타지야 미친 씹덕 새꺄!”

“아니 무슨 소리세요.”

황당하단 표정으로 내가 대꾸했음에도 유아린은 여전히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 쥔 채 턱으로 노트북을 가리킨다.

“대, 대나무숲 보고 말하는 거 아니었어?”

“또 무슨 뻘글을 보고…… 아?”

내가 올렸던 글 때문에 지금 한창 관리인을 어떻게 벌주는지 얘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게 익명198이었다.

  • 익명198: 묶은 채로 강의실 책상 같은 곳에 눕혀두고 엉덩이 개 때리는 거임.

  • 익명198: 스타킹 같은 거 신었으면 때리다가 그거 찢어주고.

  • 익명198: 암컷타락 시켜서 나중에는 해달라고 “쥬, 쥬이니임!♥ 제바알♥”할 때까지.

↳ 익명11: 넌 진짜 좆같다.

↳ 익명85: 198 지지합니다. 그리고 이용자들은 1호가 벌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함.

↳ 익명243: 코토리 쨩처럼 침 질질 흘리면서 암컷타락하는 게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 익명10: 이 새끼들 다 퇴학시키면 안 되냐?

“시발.”

왜 이런 엿 같은 걸 보게 한 거지.

눈 버렸다는 생각에 익명198을 1시간 차단해 줬다. 사유는 내가 엿같아서라고 적어준 후.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유아린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엉덩이 대.”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