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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망친 거야?”
나를 붙잡은 서예린의 눈초리가 싸늘하다.
평소에는 순하고 자상해 보이던 외모가, 조금의 미소도 보이지 않아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아까 봤던 웹툰 내용이 떠올랐다.
칼로 주인공을 찌르던 결말.
그녀가 어깨에 매고 있는 작은 손가방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혹시, 저기서 뭔가 튀어나와서 나를 찌르는 게 아닌가.
그런 걱정이 덜컥 들었으나.
“김우진?”
오히려 내가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본 서예린이 당황해서는 나를 부른다.
“아, 미안.”
그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
생각해보면 아무리 집착이 과하다고 해도 칼 가지고 사람 해치고 그러는-.
‘가위 들었다고 했지.’
다시 유아린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경계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였다.
“그래서. 왜 불렀어?”
팔짱을 낀 채로 차갑게 나를 노려보는 서예린은 이전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첫 만남에서도 이렇게까지 나에게 적대적이진 않았다.
아니,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기에 오히려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서예린이니까 좀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나.
그녀의 이러한 단호한 반응들은 보고 있자면 내가 얼마나 그녀를 우습게 생각했는지 떠올리고 자책하게 된다.
“왜 불렀냐니까?”
“그…….”
이렇다 할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머뭇거리고 있자 서예린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PC방을 가리킨다.
“할 말 없으면 난 PC방 갈 거야.”
그리 말하곤 몸을 돌려서 그대로 PC방으로 가버린다.
“하아.”
떠나가는 서예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착잡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순하고 착하던 애가 저렇게까지 나를 싫어할 정도니.
세삼 내가 했던 말들이 얼마나 미친 소리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미 칼을 뽑았다.
그렇다면 뭐라도 하는 게 옳겠지.
정말 서예린이 내게 정을 끊고 싶어졌으며, 이제 더는 엮이고 싶지 않게 됐다면 모를까.
아직 대화도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으니 일단은 좀 뻔뻔하게 가보기로 했다.
PC방 안으로 들어선다.
거의 매일 같이 PC방에서 알바하던 찬우도 여자친구 때문에 알바 횟수를 줄였는지 오늘은 없었다.
가장 구석 자리.
서예린은 혼자서 자리에 앉았는데,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녀에게 쏘아진다.
“…….”
일단 서예린의 옆자리에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화면에 집중한다.
저리 가라고 하거나, 다른 자리에 앉으라고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이 정도면 아직 대화의 여지는 남아 있다는 소리네.’
그나마 다행이랄까.
“게임할 거야?”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예린은 콧방귀를 뀌면서 팔걸이에 턱을 괸다.
“아니, 웹툰 볼 거야.”
그러더니 마우스에서 손을 놓고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기 시작했는데.
얼핏 보인 걸로는 성인 웹툰 사이트였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면 한결같다고 할 수 있으나.
지난번에 찬우가 PC방에서 성인웹툰 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으니 나름 절충안으로 핸드폰으로 보는 모양.
어느새 집중하는 서예린.
나는 애매함에 목을 긁적이며 일단 컴퓨터로 대나무숲을 켠다.
오늘은 아직 관리를 못 했기에 수북이 쌓인 똥글들을 싹 정리해 주기로 했다.
-
익명44: 싱글벙글 오늘의 괴담. 이건 어떤 카페에서 있었던 일인데…….
-
익명368: 이번에 김진평 교수님 고사와 성어의 탐구 너무 어려운 거 아님?
↳ 익명427: ㅆㅇㅈㅆㅇㅈ 족보 구하는 중.
↳ 익명141: 신입생들이 어딜 족보를 구하냐. 나 때는 다 밤 지새면서 공부하고 했다.
- 익명69: 섹x 하고 싶다.
↳ 익명90: 섹x 하고 싶다아앗! 진짜 격하게 하고 싶다아앗!
↳ 익명11: 하, 이 새끼들은 졸업 언제하냐.
- 익명87: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뒷담화 깔 거면 그냥 앞에 와서 말해. 그럴 깡 없으면 걍 아가리 다물고.
↳ 익명198: 너도 할 거면 이름 까고 해라. 뒷담화랑 다를 게 뭐냐.
↳ 익명229: 과라도 말해주삼.
↳ 익명87(작성자): 디지털디자인.
↳ 익명229: ㅎㅇㅈ?
↳ 익명87(작성자): 니 누구임?
- 익명407: 대나무숲 하는 애들 그냥 다 패배자 새끼들 아닌가? 지 하고 싶은 말 밖으로는 못하고 그냥 뒤에서 익명으로 숨어서 하는 거잖아. 딱 봐도 너희 다 친구 하나 없이 딸이나 칠 새끼들이잖음.
↳ 익명52: 이야 어그로 봐라.
↳ 익명39: 먹이금지.
↳ 익명198: 400번대면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인가?
↳ 익명11: 병신 새끼.
- 익명7: 안녕하세요, 질문 남깁니다. 친한 친구가 여자친구 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익명274: ? 포기해야지 뭔.
↳ 익명11: 뭘 포기해. 뺏어 시발.
↳ 익명336: 좋아하는 마음에 따라 다르지 않음? 근데 임자 있으면 포기하는 게 맞긴 함.
↳ 익명466: 에휴, 익명인데 솔직하게 그냥 말하자. 도의적으로는 마음 놓는 게 맞아도 욕망에는 솔직하게 고백이라도 해봐야지.
↳ 익명55: 어린애들 많네; 이미 애인 있는 사람한테는 고백 자체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 익명199: 근데 꼭 친한 친구라고 붙여야 함? 딱 봐도 7 네 얘기인데.
↳ 익명7(작성자): 아닛데ㅎ요.
↳ 익명199: 오타 ㅋ
익명111: 안녕하세요 여러분! 포포에서 포포로 개명한 포포입니다! 내일 9시에 방송하니까요! 많이 봐주세요!
↳ 익명300: 포포!
↳ 익명301: 포포!
↳ 익명302: 포포!
↳ 익명11: 씨발 년놈들.
↳ 익명303: 포포!
↳ 익명304: 포포!
↳ 익명69: 섹x!
얼추 글들을 좀 지우고 했는데도 여전하다.
그나마 마지막 글을 보니 포포는 잘 지내는 모양.
방송 이름을 바꾼다고 막 얘기했었는데 그냥 포포 그대로 가는 모양이었다.
‘이름에 대한 나쁜 추억보다, 좋은 추억이 많다 이건가?’
황사장이 지어준 성의 없는 이름이었으나, 어쨌든 그 이름을 따라 건공과 사람들이 포포를 도와주러 찾아왔으니까.
나름 흐뭇하니 미소를 짓고 있으니.
옆구리를 찌르듯 쏘아지는 시선.
슬쩍 옆을 보자 서예린이 핸드폰을 쥔 채로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섹x좌로 포포 쪽에 답글도 달았던데.
“이거 내가 대나무숲 하는 거 보고 쓴 거야?”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화면 보고 있었으면서.
그래도 대화가 좀 되는 분위기.
주제를 조금 돌려서 다른 쪽으로 얘기를 이어가 보기로 한다.
“너희 어머님께서 갑자기 나한테 보자고 하시는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알아?”
움찔.
내 말에 잠깐 떤 서예린은 기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음? 저장된 이름?”
“하, 하트로 해뒀거든.”
“…….”
그래서 어머님께서 전화를 받으신 거였구나.
딸 핸드폰이 있는데 갑자기 ‘♥’라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받을 수밖에 없겠지.
“내, 내가 어떻게든 설명해 볼게. 네가 엄마랑 만나는 일 없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왜 결과가 보일까.
일단은 알겠다고 끄덕이자 서예린은 한숨을 내쉰다.
조금은 분위기가 누그러진 모습.
“근데 무슨 웹툰을 그렇게 보냐.”
내가 슬쩍 몸을 기울여 서예린 핸드폰을 보자, 남자 주인공이 칼에 찔리는 장면이 딱 나타났다.
아까 내가 보던 웹툰이다.
“…….”
입을 꾹 다물고 서예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무뚝뚝하니 나를 보며 중얼거린다.
“이거 우진이 닮았네.”
“야, 무서우니까 하지 마라.”
“흐힛.”
오늘 보고 처음 흘린 웃음.
서예린은 다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지 않은 척 했지만 이미 다 봤다.
“너 가위도 들었었다며…… 자르려고.”
이때다 싶어서 좀 가볍게 화두를 던지자 서예린이 다리를 꼬며 의자를 뒤로 쭉 당긴다.
“그때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이서랑 아린이가 너 어디 하나 부러뜨렸을걸.”
“뭐야, 그럼 나 구해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반쯤 진심이긴 했지만.”
반이나 진심이었다는 게 소름 돋네.
“그런 웹툰 보지 마라. 괜히 위험한 생각할까 겁나네.”
“이거 재밌어.”
그러면서 슥슥 화면을 돌려 특정 장면을 보여주는 서예린.
남자 주인공이 절륜함과 테크닉으로 여자 캐릭터를 함락시키는 장면이었다.
“섹x 장면도 그림 작가가 잘 그려. 이런 것도 상황적으로 좋아.”
“주인공한테 당해서 타락하는 장면인데 이런 걸 좋아한다고?”
남자애도 아니고 뭐 이런 걸 좋아하나 싶었는데 서예린이 째릿 나를 노려본다.
“어, 좋아.”
그러곤 다시 대화하기 싫다면서 몸을 돌린다.
이번에는 게임을 할 생각인지 마우스를 잡는 녀석.
대화 흐름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당혹스러울 지경이었으나.
- 익명69: 섹x 하고 싶다.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을 빤히 보면서 나는 슬쩍 옆에 있는 서예린을 쳐다본다.
툭.
녀석의 허벅지에 손을 얹는다.
별말 없었다.
그냥 이쪽을 짜증 내듯 힐끔 쳐다봤을 뿐이었지만.
얼굴이 붉어진 게 묘하게 반기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이번엔 손을 올려 가슴을 힘을 줘서 움켜쥔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탄성을 흘리려던 걸 억지로 참은 서예린이 씩씩거리며 내 손을 잡는다.
“하지 마.”
그러면서도 정작 손에 힘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게.
그냥 손목에 얹은 수준이었기에.
손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고 서예린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숨소리를 터트린다.
“하읏- 지 말라고.”
“하면 안 될 것 같긴 하네.”
PC방이지 않은가.
특히나 서예린 같은 경우는 눈에 띄니까 괜히 이런 짓하다가 누군가 볼 수도 있다.
“아…….”
슬쩍 손을 떼자 서예린의 입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흘렀고.
다시 자연스럽게 컴퓨터로 시선을 돌리자 주먹을 꽉 쥔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린다.
“뭐해?! 함락 당할 준비 완료라니까?!”
주먹으로 내 허벅지를 콩 하고 때리면서 짜증 낸다.
“딱 보면 각이 나오지 않아? 청초한 히로인이 점점 육체의 쾌락에 패배해서 앙앙 거리는 전개잖아?!”
“…….”
“찔리고 싶지 않으면 찔러야 할 거 아냐 바보야!”
목소리가 좀 커서 주변 사람들이 들었는지 시선이 모인다.
서예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의자에 풀썩 주저앉고는 중얼거린다.
“씨이, 김우진이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대나무숲에 쓸 거야.”
그건 진짜 하지 마라.
“그, 나는 셋한테 고백했어. 그거 정말 괜찮아?”
일단 확실하게 해두자는 생각으로 묻자, 서예린이 혀를 삐죽 내밀면서 답했다.
“몰라. 싫어. 꺼져. 난봉꾼. 쓰레기. 대나무숲에 관리자 고자라고 써도 되지?”
“못 받아들이겠어?”
“당연한 거 아냐? 3p 한 번 했다고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네! 가위 가져올 걸 그랬네. 그냥 잘라서 소장할 걸 그랬어!”
씩씩거리는 서예린.
나는 일어나서 컴퓨터를 두 대 다 꺼버린다.
“야, 뭐-!”
진짜로 대나무숲에 관리자 고자라고 쓰던 서예린은 컴퓨터가 꺼지자 버럭 외치려 했으나.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끌고 간다.
“조용한 곳에서 얘기 좀 하자. 아마 대화하다 보면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조, 용한 곳?”
“근처에 모텔 있잖아.”
내 말에 서예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분명 끌려오듯 오고 있었는데 어느새 속도가 맞춰졌고.
“내, 내가 그런다고 받아들일 것 같아?!”
입으로는 씩씩거리고 있으나.
정적 고개를 슬쩍 돌리자, 입가에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어휴.’
처음부터 말해주면 됐을걸.
맞춰주기 참 힘들다.
그러다 문득, MT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으며 묻는다.
“근데 예린아, 섹x 안 해도 된다고 막 그러지 않았었냐?”
“……그거 저 아닌데요.”
알았으니까 정색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