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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4 KiB
Raw Blame History

개강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강의를 듣는 척하고 있던 나는 옆에 있는 최이서를 힐끔 쳐다본다.

산뜻한 봄에 걸맞게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는 그녀.

손목 쪽이 통이 넓어서 헐렁한 것이 건강미 넘치는 최이서의 몸을 좀 더 아담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그게 귀여웠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최이서는 힐끔 내 쪽을 보더니 노트에 뭔가 적어서는 이쪽으로 내민다.

  • 왜.

내가 심심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

  •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을 정리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최근 내가 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학기다 보니 다들 바쁘게 지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깊게 고민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기도 했으며, 골드원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꿈만 같기도 했다.

애초에 친구들이지 않은가.

서예린이나 최이서 그리고 유아린.

다 좋은 친구들인데 이런 이유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한다는 게 좀 안타까웠다.

‘이것도 욕심인가?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괸다.

강의는 지루했고, 최이서는 묵묵히 공부에 집중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 10분 정도만 쉬고 이어서 합시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마침 교수님이 강의를 잠시 멈추셨다.

“장실 다녀옴.”

“응.”

바로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최이서 주변으로 몇몇 1학년들이 몰려 있었다.

“그래서 그 선배가-!”

“야야!”

“크흠, 크흠! 하윤아? 우리 자리로 돌아가자.”

대화 중인 걸로 보였는데 내가 온 걸 본 순간, 바로 도망치듯 흩어지는 녀석들.

돌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던 개미들이 재빠르게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뭐야?”

자리에 앉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는 최이서.

“너 소문 진짜 안 좋다.”

“내 뒷담이었구나.”

그럴 것 같긴 했다.

최이서는 좀 당혹스러워하면서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

“선배들이랑 싸운 적이 많아서 성격이 나쁘다는 얘기도 있고, 여자도 막 여러 명 갈아 끼운다는 소문도 있더라.”

“정말 억울하군.”

“…….”

팔을 꼬집으며 노려보는 최이서.

뻔뻔한 척 굴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3학년 여자 선배 셋한테 고백했다가 다 까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진짜 억울한데?!”

아니, 선배들이랑 싸운 적은 있어도 고백한 적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지 않은가!

“에휴, 대학도 결국 작은 사회야. 이리저리 소문이 다 돌고 돈다니까.”

그러더니 나를 보던 최이서가 슬쩍 제안해 온다.

“내가 말해줄까? 그거 다 헛소문이라고?”

“네가?”

“응, 1학년들한테까지 이미지 나빠지는 건 좀 아니잖아. 어차피 3학년은 내년이면 졸업반이고. 애초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와서 애들이 도망쳤어.”

“됐어.”

살짝 고민되긴 했으나, 거기까지 최이서한테 바라진 않았다.

“성격 나빠서 선배들이랑 싸운 것도 사실이고, 여……자 편력이 그닥 좋지 않은 것도- 나름 사실이니까.”

3학년 선배들한테 고백박았다는 건 진짜 억울하지만 말이다.

“흐음, 그래?”

알겠다고 답한 최이서는 슬쩍 팔짱을 껴왔다.

“왜 이래.”

너무 뜬금없이 스킨십을 해왔기에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장난스럽게 히죽 웃어온다.

“1학년들한테 걱정 말라고 해두는 거지.”

“음?”

“나쁜 자식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몸을 좀 더 붙여오는 게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간 드라마에서 그런 거 있잖아. 나쁜 남자를 내가 길들이는?”

“……그런 거 보니?”

“민지가 보는 거 같이 봤거든.”

이상한 거 본 거 아니라면서 내 어깨를 턱으로 쿡 누르는 최이서.

그러더니 이번에는 살짝 볼이 붉어지면서 속삭이듯 중얼거린다.

“지, 지도 이상한 거 보면서.”

“이상한 거?”

“몰라, 물어보지 마.”

본인이 말해놓고 왜 저러는지.

“맞다. 야, 너랑 서예린이 내 방에서 자고 갔을 때 있잖아.”

“마, 말 작게 해! 그리고 너 없이 우리만 자고 간 거잖아.”

“아…….”

부끄러워하는 최이서.

그러면서도 팔짱을 풀진 않는다.

“하여튼. 그때 뭐했냐? 뭐 했는데 주희 선배가 너희 단속 잘하라고 나한테 뭐라 하셔.”

“…….”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최이서는 그냥 못 들은 척하며 몸을 틀었다.

“말 안 해줄 거야?”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대화를 피하는 최이서.

그래, 굳이 말하기 싫으면 나도 캐물을 생각까진 없었다.

다시 강의실에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강의가 다시 시작되려는 순간.

“그, 근데 우진아.”

최이서는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더니.

“하, 한 번에 여섯 명은 힘들지 않을까?”

“응? 무슨 소리야?”


최이서랑 같이 점심을 먹지 않을까 싶었는데 1학년들 멘토멘티 프로그램 때문에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한다.

그냥 따로 기숙사에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약속이 잡혔다.

불린 곳은 PC방.

부른 사람은 한강 선배.

여러 추억이 있는 PC방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우리의 얼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심지어 여기 알바생인 찬우까지 말이다.

‘쟤는 여친 생겼다면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분명 1학년 후배랑 사귀게 되었다면서 좋아했었는데.

어쨌든 컴퓨터 하나에 머리 박고 모여 있는 것들의 등을 두들기며 다가간다.

“뭐 하냐, 멍청이들.”

“왔냐, 등신.”

“늦었잖아 쓰레기.”

한마디를 지지 않는 거 봐라.

“뭐하냐고.”

한강이 앉은 자리에 모여서 뭘 보나 확인했더니, 무슨 놀이공원을 보고 있다.

“웬 놀이공원?”

내가 묻자, 표정이 어둡던 정찬우가 바로 나한테 애원하듯 부탁한다.

“제발 좀 말려봐. 다 같이 놀이공원 가자고 하잖아!”

“……이 멤버로?”

미친 새끼들인가 이거?

믿지 못하겠어서 되묻자 바로 발악하듯 대꾸하는 표진호와 한강.

“우리 이제 일주일 뒤에 입대라고!”

“시이바알! 군대 들어간다니까 다들 나 버리고 가는 거 실화냐?”

표진호는 그렇다 치고, 한강 선배는 여자가 많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딱 거기까지지 뭐.

본인도 즐기려고 만난 거니, 상대도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군대 가는 걸 알면서도 만날 인연도, 기다려 줄 정도 없었단 거겠지.

“나 아직 여친이랑도 안 가봤는데 왜 형들이랑 가야 하냐고!”

억울하다며 정찬우가 저항해 봤으나.

“갈! 넌 군대 안 가 이 새끼야?!”

“지금 꼬추님들 얘기하는데 여친을 들먹여?!”

안 되겠다.

이 새끼들 지금 눈 돌아갔다.

아까부터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안현호. 핸드폰으로 누구랑 톡을 보내고 있는지 꽤나 집중하고 있다.

  • 규아: 오빠, 그러면 오늘 저녁에 술 사주시는 거예요? 약속!

  • 안현호: ㅋㅋㅋ 그래 알았어.

‘어휴, 시발.

여기 그냥 동물의 왕국이다.

이 새끼 나한테 최이서 가지고 뭐라 했던 게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후배로 보이는 여자애를 꼬셨다.

얘네가 이게 문제다.

속은 등신들인데 당장에 얼굴이 괜찮아서 사람들이 속는다는 거.

‘규아? 지난번에 봤던 1학년 과대였나?

뭐, 어쨌든.

알아서 잘해보길 바라며 놀이공원 가자는 걸 어떻게든 저지해 볼 생각이었다.


실패했다.

‘저것들 왜 놀이공원에 꽂힌 거야.

무슨 대나무 먹는 판다 보겠다고 지랄들을 하는데 진짜 때려죽이고 싶은 거 겨우 참았다.

내가 싸움만 좀 잘했으면 바로 때려죽이는데 아쉽다.

결국 PC방에 왔으니 같이 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이럴 거면 나를 왜 부른 거야?”

넷이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걸 옆에 둔 채로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혼자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다.

시간 충전한 게 아까울 정도.

“구급상자 필요한 사람.”

“나나나나.”

“5탄 있는 사람 있어?”

“한 달 뒤에 진짜 총 쏘는데 게임에서도 총 쏘는 내 인생이 레전드네.”

이미 헤드셋 쓰고 자기들끼리 얘기할 거면 진짜 나를 왜 부른 걸까.

내가 저 게임을 안 하기도 했으나, 저게 넷이서 팀을 이루는 게임이라 애초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갈까.

여기 있어 봤자 뭐 할 것도 없으니 그냥 돌아가려고 일어나려던 순간.

“호이?”

흰색 모자를 쓴 여자가 옆자리에 앉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청바지를 입고, 가벼운 후드집업을 걸친 서예린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음? 서예린?”

“뭐해? 다 같이 게임하러 왔어?”

“어…… 그렇긴 한데.”

나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려서 한강 선배 쪽을 쳐다본다.

가장 끝자리에 있었기에 나랑 멀었음에도,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예린아…… 안녕. 오랜만이네.”

“선배? 군대 가신 거 아니었어요?”

깜짝 놀라며 묻는 서예린.

“아, 그게 말이야-.”

한강은 멋쩍게 대답하려 했으나.

“선배 뭐하냐고!”

“아, 왜 가만히 있으세요!”

“너 이 새끼야! 전쟁 나도 총 놓고 인사하러 갈 거야?!”

세 사람의 질타에 입이 꾹 다물어진다.

“가서 하세요.”

친절한 미소로 응대하는 서예린. 골드원 빵집에서 일할 때가 떠오르는 상업적 미소였다.

“아, 그래.”

결국 반쯤 떠밀리듯 다시 자리에 앉은 한강.

다시 게임하긴 했지만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아직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우진아, 같이 게임하자!”

한강과 있었던 짧은 인사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제안하는 서예린.

솔직히 브론즈랑 게임하기 싫었기에 일부러 말을 돌린다.

“너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오늘 강의 없어?”

“응, 나 월요일 공강이야. 게임하자.”

“아하. 너 근데 PC방 오는 거 싫어했잖아.”

지금도 브론즈의 외모 때문에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브론즈는 쿨하게 대꾸했다.

“이제 별로 신경 안 써. 게임 들어와.”

옛날의 서예린이 봤으면 정말 깜짝 놀랐을 텐데.

많이 성장했구나, 브론즈.

“근데 집에도 컴퓨터 있지 않았나? 굳이 PC방에 왔어?”

“지난번에 외박해서 엄마한테 컴퓨터 뺏겼어. 왜 아직 안 들어와?”

“에휴.”

그때 내 방에서 자던 걸 말하는 거였다.

주희 선배한테 잡혀서 최이서와 브론즈 둘 다 주희 선배 방에서 자고 갔다고 들었으니까.

“들어오라고, 우진아.”

웃으면서 말하지만 스산함이 담긴 브론즈의 목소리.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소신 발언을 해본다.

“브론즈랑 게임 안 함.”

“실버가 뭐라는 거야.”

“응, 실버인데 브론즈보단 잘해.”

“진짜 안 할 거야?”

“어, 안 함.”

저 망나니랑 같이 게임하면 피곤해져서 배 째라는 듯 말하자.

“BDE-578. 딱 고전적인 작품이더라.”

“……?”

브론즈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유에하라 유이? 그 사람 작품이 엄청 많더라?”

이년이.

내 방에서 뭐 했나 싶었는데 노트북을 봤구나!

야동 빼고 숨길 게 없는데 야동을 걸려 버렸다.

나는 다급하게 브론즈의 어깨를 잡고 으름장을 놓는다.

“너, 그거 사생활 침해인 거 알고 있지? 선 넘은 거야.”

“우리한테 선도 있었나. 이미 볼 거 다 봤잖아. 선은 네가 안에 쌌을 때 이미-.”

“쉬이잇!”

뒤에 지금 일주일 뒤에 군대 가는데 총 쏘는 게임 하고 있는 녀석들이 듣는 순간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경고하자 서예린도 작게 속삭이며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우리 공유할 거 다하던 사이잖아.”

“그, 건…….”

맞지.

익명69와 관리자 시절에 품번 추천도 해주고 했으니까.

“코스프레도 좋아하면서 왜 싫어하는 척했어. DVQ-117였나?”

“예린 씨!? 얼른 게임하죠! 바로 합시다!”

다급하게 게임하자고 외치자 서예린은 이제야 만족스레 웃으면서 끄덕이다 문득.

“근데 우진아.”

“……왜요.”

“PSV-693. 이건 좀 아니지 않아?”

“그게 뭔데. 내가 품번을 다 외우고 다니진 않아.”

“7P던데.”

“……아, 그거-.”

그냥 그런 것도 하나 있으면 좋지 않나 싶어서 대답하려던 순간.

아까 강의실에서 최이서랑 나눴던 얘기가 뇌리를 스친다.

‘그, 근데 우진아.

‘하, 한 번에 여섯 명은 힘들지 않을까?

“아, 아아아악!”

수치심이 몰려와 얼굴을 움켜쥔 채로 비명을 지른다.

‘반드시 삭제한다! 내가 진짜 노트북 아예 포맷한다!

오늘 돌아가서 노트북에 있는 야동들을 전부 삭제하자고 다짐했고.

서예린이랑 30분 게임 한 판하고 난 다음.

‘흠, 야동은 죄가 없지.

삭제는 좀 선 넘은 것 같아서 보류하기로 했으며.

또 30분 게임 한 판 더 하자.

‘그냥 부끄럽지 않을 야동을 다운 받아두면 되는 거 아닐까.

오랜만에 집에 가서 폴더 업데이트를 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