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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던 이아금이 눈을 떴다.

푹 자고 일어났는지 몸 상태가 만전이었다.

창문 너머에서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아찔함이 이아금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아금은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각이다!”

힘찬 함성과 함께 반쯤 구르면서 욕실로 입장.

어젯밤에 미리 길어 놓은 물로 허둥지둥 세목.

옷을 꿰어 입고 고구마를 생으로 씹으며 출근.

그리고 공동 주택을 나서기 직전에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 휴가였다.

이아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콧노래와 함께 귀가해서 외출복을 벗었다.

직후, 물 흐르듯이 침대에 누웠다.

싱그러운 봄날, 따스한 햇빛, 서늘한 바람, 기분 좋은 적막함, 맑은 공기, 새들의 지저귐.

잘 마른 이불,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비싸게 주고 산 침대, 나만 빼고 출근하는 인파.

여기가 바로 극락이었다.

이아금은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의식이 서서히 수면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잠들기 직전에 방해꾼이 나타났다.

암컷 인면조 특유의 까불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아금, 이아금! 편지, 편지, 편지!”

이아금은 꿈나라에서 강제로 복귀 당했다.

나른한 잠기운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버렸다.

눈동자가 말똥말똥한 것이,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이아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인면조 한 마리가 보였다.

작은 원통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인면조가 당돌한 표정으로 말했다.

“느림보래요! 느림보!”

이아금은 지성인답게 바보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원통을 열고 돌돌 말린 편지를 꺼냈다.

편지의 발신인은 장선화였다.

‘오늘 정오, 수선 동아리 모임이 있을 예정이...’

문장이 이상한 지점에서 끊겨 있었다.

앞부분을 너무 큰 글씨로 적은 탓에 뒤로 갈수록 급격하게 공간이 부족해진 모양이었다.

보낸 이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는 편지였다.

이아금은 다 읽은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이만 가 봐.”

인면조는 멀뚱히 서서 물었다.

“편지 가져다 줬는데 뭐 없어?”

갑자기 유창해진 언어 구사 능력.

당황한 이아금이 되물었다.

“뭐라고?”

“인심 한번 야박하다, 야박해.”

“아니, 아니...”

말문이 막힌 이아금에게 인면조가 말했다.

“집에 먹을 거 없어? 있으면 아무거나 빨리 가져와 봐. 먹고 얼른 가게. 아, 물도 한 잔 줘.”

이아금은 말대꾸 한 번 못해 보고 한 입 크기의 나무 열매와 물이 든 그릇을 가져다 줬다.

누가 보면 여기가 인면조 집인 줄 알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원래 이렇게 된다.

열매를 먹고 물도 마신 인면조가 배를 두드렸다.

“아, 잘 먹었다.”

그러더니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이아금은 인면조의 꽁무니만을 멍하니 쳐다봤다.

---

저택에 도착한 이아금은 나룻배에서 내렸다.

대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뭔가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오목눈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지?”

“짹짹!”

“아니, 진짜 뭐지?”

대치 상황을 해결한 건 뒤늦게 달려온 하녀였다.

하녀는 문을 가로막은 식산대붕을 굴렸다.

식산대붕은 당최 뭐가 재밌는지 자지러졌다.

수문장을 치워 버린 하녀가 인사했다.

“이 수사님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이아금은 시키는 대로 대문을 넘었다.

하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안내했다.

식산대붕은 자연스럽게 닫힌 문 뒤에 앉았다.

이아금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거 대붕이 분신 맞죠? 뭐하는 거예요?”

“장난치는 거예요. 문 옆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누가 지나가려고만 하면 몸으로 막는 식이죠.”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하녀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게 말이죠...”

하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증언은 이랬다.

며칠 전, 새로운 몸을 얻어서 신이 난 식산대붕은 하루 종일 들판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다리가 걸려 성대하게 넘어졌다.

작고 가벼운 신체에 적응이 덜 된 탓이었다.

가뜩이나 둥근 체형을 지닌 식산대붕은 탁 트인 들판을 데굴데굴 굴렀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하녀들은 황급히 달려갔다.

적잖이 놀랐을 아기 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식산대붕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날개를 파닥이며 연신 조잘거리고 있었다.

명백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녀들은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일제히 식산대붕을 밀기 시작했다.

빠르게 구르는 흰 구체, 마치 눈덩이 같았다.

행복에 겨워 지저귀는 식산대붕.

덩달아 즐거워진 십 대 중후반의 하녀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놀이는 정확히 1시진(2시간)만에 중단됐다.

하녀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지름이 1장(3m) 정도 되는 공을 굴린 것이다.

제아무리 식산대붕의 분신이 경량형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었다.

하녀들은 저마다 팔뚝을 주무르며 돌아갔다.

충분히 놀아 줬으니 이만하면 됐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기 새의 의견은 약간 달랐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부터였다.

식산대붕은 수문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여길 지나가고 싶으면 나를 굴리라는 의미였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이아금이 물었다.

“연기기 수사의 힘으로도 굴릴 수 있어요?”

“덩치에 비해서는 월등히 가벼운 편이에요. 저번에 보니까 연못에도 둥둥 뜨더라고요.”

“그건 진짜 신기하네요.”

곧이어 식당에 도착했다.

동아리 활동 전에 점심부터 먹을 예정이었다.

약속 시간을 정오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집주인이 이아금을 반겼다.

“아금아, 딱 맞춰서 왔어. 어서 앉아.”

“언니, 식탁이 왜 반의반만 남았어?”

“단란하고 좋잖아?”

밀착 식사를 마친 일행은 동아리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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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실에는 칠판과 분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란은 자연스럽게 단상 위에 올랐다.

대수림 제일의 유명 강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서란은 가장 먼저 학생들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 강의를 담당하게 된 일일 강사, 류서란이라고 합니다.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화려한 경력에 걸맞는 깔끔한 인삿말.

담청과 장선화가 기립 박수를 쳤다.

나머지 두 학생은 그냥 앉아서 쳤다.

서란은 멋들어진 글씨로 판서를 했다.

‘우주 구조물 건설 계획’

그리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자, 여기서 질문! 우주란 무엇일까요?”

학생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딴청 피웠다.

심지어 장선화마저 일일 강사를 외면했다.

존경은 존경이고,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우주는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동아리실은 삽시간에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서란은 걱정하지 않았다.

지목해서 시키면 그만이니까.

서란은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말했다.

“오늘이 2월 4일이니까... 이아금 학생, 일어나서 우주란 뭔지 답변해 주세요. 틀려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

이아금은 오랜만에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도대체 뭘 어떻게 조합하면 2월 4일에서 자기 이름이 도출될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지목 당했으니 일어나긴 해야 했다.

이아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인계 바깥에 존재하는 공허의 공간?”

서란은 두 팔을 머리 위로 모아서 원을 그렸다.

“정답입니다! 자, 모두 이아금 학생에게 박수!”

또 다시 시작된 담청과 장선화의 기립 박수.

이아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입문 직후에 배운 건데 안 까먹어서 다행이었다.

서란은 수업을 계속했다.

“우주의 정확한 정의는 인계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의 바깥쪽, 즉 천공 결계 너머를 의미합니다.”

서란은 설명을 하며 속으로 남몰래 웃었다.

전생과 현생, 두 우주는 서로 명백히 달랐다.

행성 전체를 두르고 있는 무형의 결계라니.

서란 입장에서는 하늘을 나는 불멸자들보다도 이 사실 하나가 더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우주에 대해 떠들던 서란은 문득 질문을 했다.

“자, 다음 질문! 우리가 사는 인계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요? 평평한 원반? 아니면 구체?”

이번에는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앞자리에 앉은 담청과 장선화였다.

둘 다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서란은 장선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선화 학생이 약간 더 빨랐네요.”

장선화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체 형태입니다!”

“네, 정답입니다! 자, 다들 박수!”

“에이, 이걸 누가 몰라요.”

담청의 동공이 급격하게 요동쳤다.

일평생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세계관이 무너졌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잃은 듯 혼란스러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업은 진행됐다.

행성 전체를 둘러싼 천공 결계의 안팎으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힘이 항시 작용한다.

놀랍게도 두 힘의 권역은 천공 결계를 사이에 두고 딱 달라붙어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결계 너머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전혀 다른 힘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는 인계 중심부로 향하는 인력이었다.

대기와 바다, 범인, 수도자, 요괴 등등 만물을 속박해서 대지에 묶어두는 힘이었다.

쉽게 말해서 행성의 중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계 바깥을 향하는 척력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전생의 우주에는 이런 게 없었다.

이 힘이 인계가 발휘하는 척력인지, 아니면 공허 저편에서 작용하는 인력인지는 여전히 논쟁 거리였다.

서란의 계획은 이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에 우주 구조물을 올려 놓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두 힘 덕분에 구조물이 허공에 못 박힌 듯 고정된다.

인공 위성보다는 궤도 엘리베이터와 더 유사했다.

서란은 칠판의 그림을 지우며 말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업 종료 선언.

화장실이 급했던 금영영은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동아리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언제 왔는지 오목눈이가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