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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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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사실 고민이 많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걸까?

다른 방법으로 목선과를 얻을 수는 없었을까?

십대문파가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래서 예전에 쓴 보고서를 다시 읽어 봤다.

격노한 채 휘갈겨 쓴 비판 항목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흐른 탓에 대부분 휘발되었던 분노 게이지가 다시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잘 생각해 보니, 뱅크런 이후의 구제 금융 코스 정도면 충분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서란은 사다리 차기와 고혈 빨기에 시달리는 동대륙 산수들을 위해서 결심했다.

정의로운 도둑이 되기로.

서란은 범선 타륜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경마로 전 재산을 날렸다... 경마로 전 재산을 날렸다... 전 재산을...”

상상하는 것은 파산 직전의 도박 중독자.

주변의 모든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발밑이 무너져 내린 듯 아득한 기분이 든다.

마침내 서란은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했다.

서란은 핼쑥한 얼굴로 범선에서 뛰어 내렸다.

“선배님, 은행 앞에 비행 법기를 정박시키시면 곤란합니다. 범선은 지정된 장소에... 선배님?”

범선 좀 옮겨 주십사 요구하려던 은행 직원은 서란의 핏기 없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서란은 직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허둥지둥 은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대수림 최고의 유명 인사 류서란이 보인 이상 행동에 주변 산수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창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을 강좌 수강료를 납입하는 시기라서 그렇다.

덕분에 평소보다 은행 방문객이 훨씬 많았다.

서란은 가장 짧은 줄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요동치는 동공, 수시로 주변을 살피는 시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옷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전형적인 신경 쇠약 증세였다.

서란 바로 앞에 있던 산수가 말했다.

“선배님,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제 앞으로 가시지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서란은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비켜준 자리로 갔다.

앞 사람한테 바짝 붙어 박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산수들은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차례차례 자기 순서를 서란에게 양보했다.

마침내 서란은 창구 직원과 대면할 수 있었다.

“어, 어떤 용무로 본점을 방문해 주셨나요?”

창구 직원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보편타당한 상식과 사고 능력을 두루 갖춘 창구 직원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이건 분명히 대형 사건의 전조였다.

창구 직원은 하필 자기가 일하는 시간에 이런 일을 터트린 하늘을 원망했다.

서란이 떠듬떠듬 말했다.

“영석... 내 영석 주세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창구 직원은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직원은 애써 밝은 얼굴로 물었다.

“예금 인출을 희망하시는군요? 이 문서에 인출하시려는 영석 개수를 적어서 예금자 증명용 옥패와 함께 제출해 주시겠어요?”

서란은 문서 따위는 쳐다 보지도 않았다.

“영석... 전부 인출... 어, 어서 돌려줘요...”

창구 직원은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다.

“보통 예금을 말씀하시는 거죠?”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당최 틀리질 않았다.

“아니, 제 적금이요! 빨리 전량 인출해 주세요!”

적금, 전량 인출, 빨리.

서란의 다급한 외침이 은행 내부에 울렸다.

또렷한 발음 덕분에 모두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은행 방문객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창구 직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류 수사님, 아니 아니... 고객님께서 가입하신 초장기 적금 상품은 중도 해지 시 남은 약정 기간에 따라 추가 수수료가 발생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중도 해지 수수료.

그게 바로 십대문파의 안전장치였다.

천문학적인 중도 해지 수수료를 남은 약정 기간에 따라서 비례적으로 감소시키는 방식이었다

지금처럼 반 년만에 적금을 해지하는 경우, 서란이 부담해야 할 수수료는 예금 총액의 3할이 넘었다.

서란이 흔쾌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에, 십대문파는 마지막 남은 의심마저 거둘 수 있었다.

십대문파는 지극히 합리적인 논의 끝에 서란의 영석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기로 했다.

서란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믿은 셈이었다.

단순 변심 때문에 적금을 깨고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을 땅바닥에 버리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게 십대문파 수뇌부의 종합 의견이었다.

하지만 상식인은 상성상 광인을 이길 수 없는 법.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었다.

십대문파는 서란 덕분에 값진 교훈을 배웠다.

이제는 수업료를 지불할 일만 남은 상태였다.

서란의 외침이 뱅크런 작전의 대미를 장식했다.

“해지 수수료 3할 2푼 당장 낼게요! 그러니까 제 영석 전부 돌려 주세요! 어서요!”

창구 직원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기분이었다.

전부 끝장이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끝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영석 인출에 은행 직원이 총동원됐다.

3할이 넘는 해지 수수료를 지불한 상태에서도 서란의 영석은 천문학적인 수량이었다.

양이 너무 많아서 불가피하게 개수가 아닌 부피로 측정해야만 할 정도였다.

충격적인 사태에 산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석을 가득 실은 수레가 은행 앞에 정박한 서란의 범선으로 줄지어 이동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레의 행렬.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영석이었다.

은행 방문객은 다들 비슷한 의문을 가졌다.

해지 수수료가 3할이 넘는다고?

류서란과 십대문파, 요즘 사이 좋지 않았던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정말 수상한 걸?

상황이 다분히 의심스럽긴 했다.

게다가 서란이 보인 행동에도 헛점은 많았다.

심사숙고하면 의도를 눈치채는 건 금방이었다.

동대륙 산수들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서란의 계획은 대성공했다.

머리가 좋은 산수들은 남들보다 먼저 영석을 인출하기 위해 창구로 앞다퉈 달려갔다.

상황이 뭔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고민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현명한 이들은 일단 줄부터 섰다.

십대문파에 중대한 변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

반대로 류서란이 개수작을 부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산수들 입장에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서둘러서 영석만 인출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손해를 볼 가능성은 전무했으니까.

은행 내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영석을 싣고 밖으로 나가는 수레 행렬, 창구로 몰리는 인파, 소란을 듣고 추가로 모여든 인파.

이 사달의 주범인 서란은 만선의 범선을 이끌고 유유히 대수림 방향으로 사라졌다.

서란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회수팀에게 영석으로 가득 찬 범선을 인계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화물칸이 텅 빈 다른 범선으로 갈아타고 다음 은행으로 향했다.

다음 날, 동대륙의 모든 은행이 업무를 중단했다.

파산 직전의 은행.

들끓는 예금자들의 분노.

고뇌하는 십대문파의 수뇌부.

동대륙 전역이 불타오르기 직전, 십대문파의 수뇌부는 제각기 편지 한 통씩을 받았다.

서란이 보낸 구제 금융 제안서였다.

기나긴 보물 목록도 별첨되어 있었다.

곤경에 처한 문파를 살리고 싶다면 목록에 적힌 보물을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십대문파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쌍룡문 결단기 수사 유진광은 이런 고민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어쩌다 십대문파가 산수 한 명에게 굴복했는가.

어쩌다 문파 본산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는가.

자줏빛 눈동자의 올빼미 인형이 말했다.

“왜 준비된 천년오행목의 숫자가 제 요구보다 부족한 겁니까?! 단순 착오라고요?! 미치셨습니까?! 설마 그런 얕은 수작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문파 살릴 마음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언제나 거만하던 수뇌부 인사 하나가 비굴한 낯빛으로 올빼미 인형에게 굽신거렸다.

“류 수사님, 그런 게 아니옵고...”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빨리 빼돌린 보물이나 가져 오세요! 제가 예전에 똑똑히 기록해 놨습니다! 쌍룡문 창고에 천년오행목이 몇 개나 있는지! 어차피 뒤져보면 다 나옵니다!”

완장을 찬 올빼미가 신호를 보내자 다른 올빼미들이 우르르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과 바닥, 천장을 거칠게 뜯어냈다.

은닉 보물이 우수수 발견됐다.

보물 하나라도 덜 빼앗겨 보겠다고 어떻게든 발악한 흔적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었다.

서란의 징수는 그야말로 무자비했다.

수천 년 넘게 동대륙을 수탈하며 쌓아올린 쌍룡문의 부가 실시간으로 눈 녹듯 사라지는 중이었다.

혹독한 강제 다이어트 과정을 마치자, 창고 안에 남은 보물은 평소의 절반이 채 안됐다.

서란이 초장거리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는 올빼미들은 가져온 대형 범선의 화물칸을 개방했다.

얼마 전, 쌍룡문 은행에서 인출한 산더미 같은 영석이 고스란히 땅바닥에 쏟아졌다.

올빼미 군단은 텅 빈 화물칸에 쌍룡문 창고에서 턴 보물더미를 차곡차곡 싣고는 떠났다.

소란 속에서도 유진광은 여전히 고민했다.

십대문파는 어째서 한 사람에게 굴복했는가.

어쩌면 겁을 집어 먹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경쟁을 포기하고, 위험을 피하며 계속 도망친 끝에 이런 막다른 길까지 몰렸을 수도 있겠다.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싸울 수도 있었다.

은행이나 대수림 장악력을 내줄 용기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로지 손실만을 피하다 보니 이 지경이 됐다.

비승을 꿈꾸는 이가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 건 도대체 언제부터였던가.

어느새부턴가 십대문파는 도전하지 않게 됐다.

그저 현 상황에만 안주할 뿐이었다.

반면에 류서란에게는 야성이, 각오가 있었다.

그러니 십대문파가 진 것도 당연한 셈이다.

가축이 맹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란은 모든 강의를 이런 문구로 시작하곤 했다.

수선은 곧 초월.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유진광은 다시 한 번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역 간 영기 편중이 해소된 요즘, 마음이 맞는 산수들끼리 문파를 창설하는 일도 잦다고 들었다.

대수림에서 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부귀영화보다는 수행이 더 성미에 맞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