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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습격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롤드 역시 나진의 제안에 수긍했으며, 엑스퍼트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습격을 감행하고도, 결투에서 패배하고도 상대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해함과 동의는 다르다.
“단지 죽음을.”
모두가 나진의 제안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제 임무가 실패했음을 깨달은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질로 잡힌 이가 죽은 이상,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단 까닭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감겨준 클라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습격자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로젤린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들 또한 있었으니까.
“한 명 정도는 동의하겠군. 남은 둘과는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그리 말하며 클라우스와 제롤드, 나진은 로젤린이 있을 곳으로 이동했다. 제안을 건네기 위해서. 허나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나진은 깨달았다.
제안을 건넬 필요가 없어졌음을.
“······.”
사방에 흩뿌려진 핏물.
잘게 쪼개진 마법사의 시체를 발로 짓뭉개며 로젤린이 단검을 까딱이고 있었다.
“오, 왔냐?”
슬쩍 뒤를 돌아본 로젤린이 웃었다.
나진은 그녀의 주변을 흘겨봤다. 로젤린의 바로 곁에는 이를 악물고 잘린 팔의 단면을 지혈하고 있는 바사우스 말렉이 있었다.
“보아하니 아주 박살을 낸 모양이야? 덤으로 설득도 한 모양이고?”
“그렇게 됐습니다. 로젤린 님 쪽은?”
“뭐, 나도 싸우다 보니 꼭 죽일 필요까진 없겠다 싶어서 팔 한 짝으로 봐주려 했는데······.”
로젤린 아스칼로는 강자였고, 강자에겐 상대를 죽이지 않고도 패배시킬 방법이 많았다. 허나 로젤린의 발아래에는 잘게 쪼개진 시체가 한 구 놓여 있었다.
5서클의 마법사, 시르켈 크라벨린.
그녀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로젤린은 몹시도 불쾌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로젤린이 끌끌 혀를 차며 발끝으로 시체의 머리를 걷어찼다.
“저년이랑 저놈은 안 되겠더라고. 말을 좀 싸가지 없이 해야지.”
시체는 한 구가 아니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가 하나 더 놓여있었으니까. 바사우스 말렉은 팔 하나를 잘리는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마법사 시르켈과 궁병 타일러는 그리하지 못했다.
“내 앞에서 마녀(魔女)를 입에 담은 놈들이, 나를 마녀라고 부른 놈들이 어찌 됐는지 몰랐나 봐. 모르길래 알려줬지.”
그리 중얼거리며 로젤린 아스칼로가 고개를 돌렸다. 붉게 소용돌이치는 눈동자가 나진을 응시했다. 그리곤, 히죽 하고 로젤린이 미소 지었다.
“소드 시커가 된 거, 축하한다.”
만족스레 웃으며 그녀가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다음에 술이나 한번 사라는 말을 남긴 채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나진의 곁에 서 있던 클라우스는 다소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서운 여자로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제롤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은 일단락됐다.
늦은 밤 도시로 돌아온 나진은 의원에게 간단한 치료만 받은 뒤 곧장 숙소로 향했다. 응급처치만으로 끝날 부상이 아니라며 의원은 나진을 만류했지만, 나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정상적인 회복력이 들켜봐야 좋을 것도 없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나진은 숙소로 돌아갔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몹시 피곤했다. 미리 구비해둔 포션을 입에 털어 넣고, 상처 부위에 포션을 들이부으며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몸 성할 날이 없다, 정말이지.
싸울 때마다 몸에 구멍 한두 개 뚫리는 것은 기본이요, 온몸 가득 흉터가 나는 건 덤이다. 물론 흉터는 일주일쯤 지나면 없어지기야 하겠지만······.
‘이건 안 사라진단 말이지.’
나진은 제 어깻죽지를 매만졌다.
이반이 새긴 흉터였다. 엑스칼리버를 손에 넣기 이전에 얻은 흉터였으므로, 이 흉터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나진은 쓰게 웃었다.
“하여간······.”
의자에 걸터앉은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소드 시커, 검의 구도자.
언젠가 이반이 나진에게 이야기했던 목표에 오르게 된 지금, 나진은 다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나진은 이반과 같은 소드 엑스퍼트였다. 물론 그날의 이반보다 강해진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을 테지만······.
‘이제는···.’
이반이 나아가지 못했던 영역.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 사실에 나진은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이반보다 훨씬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나진의 안에서 이반은 거대한 존재였다.
내가 소드 시커에 올랐음을 알게 됐다면 이반은 어떻게 반응할까. 웃음을 터뜨릴지도, 하여간 미친 새끼라며 욕하며 어깨를 두들길지도, 늘 가던 주점에서 축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모습을 그려보며 나진은 길게 숨을 뱉었다. 조금, 아니 무척 지하도시가 그리웠으니까. 그 도시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나진의 머릿속에 지하도시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반의 집무실, 광장, 오펜과 수련했던 공터, 호겔 영감의 대장간······.
그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던 나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상상만으로 그려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진이 두 눈을 감고서 제 내면에 집중했다. 제 내면에 만들어진 심상에 발을 디디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깜빡.
나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현실에서의 나진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면에서의 나진은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면 드넓은 지하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풍경.
열걸음 남짓하던 공간은, 이젠 저 멀리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넓어져 있었다. 그리고······.
툭, 하고.
누군가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는 푸른 머리칼을 늘어트린 멀린이 있었다. 더욱 뚜렷하고, 선명한 존재감을 가지게 된 멀린. 그녀가 나진에게 장난스레 미소 지어 보였다.
“어때. 더 선명해졌지?”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간도 훨씬 넓어졌고요.”
“별도 더 빛나고 있지.”
“그것도 두 개씩이나 말입니다.”
하늘과 땅에 걸려있는 별. 두 개의 별은 여전히 각자의 위치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변의 풍경을 쓱 둘러보던 나진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나저나, 이거 어떡합니까?”
“뭘 말야?”
멀린이 고개를 기울였고 나진은 피식 웃었다.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말입니다, 그때 멀린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나진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소드 시커, 백각 등급까지 2년으로 잡아보자고. 아서왕이 그 정도 시간이 걸렸다고 말입니다.”
“그랬···었지?”
“그리고 전 무슨 2년이냐고, 1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었고요.”
멀린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녀가 슬쩍 나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나진은 멀린이 시선을 피하게 두지 않았다. 멀린이 고개를 돌린 방향을 따라 나진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걸 어째. 저 반년밖에 안 걸렸습니다.”
“잠깐, 반년이라니? 7개월이야. 7개월하고도 정확하게 12일 걸렸거든?”
“흠, 그것도 맞네요. 반년하고 7개월하고도 12일하고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나진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7개월과 일 년 사이에도, 그리고 이년 사이에도 큰 격차가 놓여있다고 생각하는데.”
“······.”
“제가 이겼네요. 내기.”
끄으으윽, 하고 멀린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내가 졌어. 하여간······.”
그리 투덜거리며 멀린이 나진을 흘겨봤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런데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 뭔가 좀 달라진 느낌인데.”
“원래 이쪽에 더 가깝긴 합니다.”
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멀린이 뭘 지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벼워진 분위기. 장난스러운 말투. 그리고 깝죽대는 언동. 사실 이쪽이 본래 나진에 가깝긴 했다.
“그간 너무 딱딱해져 있던 거죠. 상식적으로, 지하도시에서 깡패들과 어울려 지냈던 애송이가 그리 진중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그래서 별로입니까?”
“아니?”
멀린이 히죽였다.
“나도 이쪽이 더 마음에 들긴 하네. 사람이 언제나 진지할 필요는 없으니까.”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진지해질 때 진지해지면 되는 거니까요.”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다.
그것은 단지 육체와 무력의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영혼적으로도 한단계 성숙했다는 것. 나진을 흘겨보던 멀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나진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서의 목표는 다 이룬 것 같은데, 이제부턴 어떻게 할까요?”
캄브리아에서의 목표.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는 것. 그 목표를 달성한 지금 나진은 다음을 질문하고 있었다.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음에 기뻐하고, 안주하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작점에 섰을 뿐이니까.
“무슨 소리야? 목표를 다 이뤘다니.”
나진의 말에 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남아 있잖아.”
“하나?”
“잊었어? 이 도시의 전설을.”
그녀가 말했다.
“두 마리의 용이 매장된 곳. 용의 무덤.”
캄브리아의 또 다른 이름.
머나먼 과거, 이 도시에서 여정을 시작한 아서는 하나의 위업을 이루었다. 그 위업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화자 되고 있다. 저 밤하늘에 별자리로서 수놓아진 까닭에.
“캄브리아에서 아서와 나는 두 마리의 용을 떨어트렸어. 그들을 이 도시의 아래에 봉인했지.”
제 1 좌(座), 용을 떨어트린 인간.
아서가 밤하늘에 박아 넣은 첫 번째 별.
“용이란 본디 불멸(不滅), 첫 번째이자 마지막 용인 나락의 용의 역린에 엑스칼리버를 박아 넣기 전까지, 용들은 절대 죽지 않아. 봉인될지언정 죽음을 맞이하진 않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부활해.”
멀린이 나진에게 속삭였다.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지?”
나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멀린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했으므로.
“이젠 너도 별 하나 정도는 얻을 때가 됐잖아?”
그토록 바라던 별. 그 별을 손에 넣을 시간이 다가왔다고 멀린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관건이에요.”
사건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나진은 부상을 회복하고, 디에타는 나진의 아래로 합류하게 된 이들의 신원을 확보하고 위장 신분을 마련했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된 후.
향후 행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 그녀의 집무실에 방문한 나진에게 디에타는 말했다.
“지금까지 교단은 교단과 관련되지 않은, 써도 뒤탈이 없을 사냥개만을 사용했어요. 하지만 이제부턴 그리하지 않겠죠. 이야기가 달라졌으니까요.”
그녀는 이야기했다.
“교단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어요. 그들이 당신에게 집착하는 목적이야 잘 모르겠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당신의 말대로라면······.”
디에타가 혀를 찼다.
“이제부턴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움직이겠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섰으니까요. 그러니, 지금부터가 관건이란 거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아마도, 저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은걸요?”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에 대해선 작전을 시행하기 전부터 디에타와 한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에 이반과 나누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교단이 쉽게 처리할 수 없을 거물이 되어라.
이반은 그렇게 말했고, 그 기준을 소드 시커로 선정해 두었다. 그때는 그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소드 시커라는 존재가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진 존재인지 알게 됐으니까.
“소드 시커급의 강자는, 반드시 제국에 보고해야 하고······.”
“실력에 합당한 신분을 갖게 되죠. 소드 시커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보증일 테니까.”
“바로 그거예요.”
디에타가 나진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디에타 상단의 문양과, 캄브리아 재단의 문양이 새겨진 서류.
“가짜 신분을 벗어던질 때가 왔단 거죠.”
제국의 중심에 던져질 서류.
이반이라는 가짜 이름이 아닌, 나진이라는 두글자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