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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5 KiB
Raw Blame History

해는 저물고 밤은 깊었다.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진 것이다. 어둠이 얕게 깔린 숲속에서 악마 사냥꾼 제롤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고, 팔뚝에는 칼날에 베인 듯한 흉터가 몇 개나 찍혀 있었다.

팔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다시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칼자루로······.

핏물이 흘렀다. 흘러내리는 핏물을 바라보며 제롤드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놈이다. 결코 제 살을 그냥 내주는 법이 없다. 제 살을 내주거든 이쪽의 살도 한 움큼은 뜯어가야 성이 풀린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후우······.”

제롤드가 숨을 몰아쉬며 옆을 흘겨봤다.

그곳엔 클라우스 아텐이 있다. 그의 옷 역시 피로 검붉게 얼룩져있다. 피를 흘린 것이다. 제롤드는 이 상황 자체가 썩 이해가 가질 않았다.

‘소드 엑스퍼트 아니었던가?

소드 시커에 근접했을 뿐.

대상은 소드 엑스퍼트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세상 어느 엑스퍼트가 시커급 둘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

제롤드가 앞을 보았다.

그곳엔 검을 늘어트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진이 있다. 그는 제롤드와 클라우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렸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이쪽의 상처가 움직임이 조금 더뎌지는 정도라면, 저쪽은 움직이는 게 힘들어진 수준이다. 기껏 해봐야 앞으로 한두 번일까.

곧 결판이 날 것이다. 승자는 당연하게도 이쪽이겠지. 하지만 제롤드의 입장에선 썩 찝찝한 승리였다. 시커급 둘이서 엑스퍼트 하나를 상대하는 주제에,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 승리한다니?

‘젠장······.

정말이지 이러고 싶지 않다.

차라리 첫 습격에서 결판이 났다면 좋았을 텐데. 저 청년이 어떤 인물인지, 검을 맞대며 알게 되기 전에 죽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추잡하고 추악한 승리는 패배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승리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제롤드는 땅을 박찼다. 하다못해 저 청년이 과다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검으로 마무리 지어주고자. 제롤드의 검 위로 세찬 검기가 피어올랐다.

이걸로 끝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나진에게, 한순간에 거리를 좁히며 제롤드가 검을 휘둘렀다. 제롤드가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 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반응할 힘조차 바닥난 것이겠지. 제롤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기를 가르며 파고드는 대검.

대검이 나진의 몸을 양단하려는 찰나의 순간.

밀려드는 풍압에 나진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나진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로 앞에서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제롤드는 무심코 숨을 헛삼켰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노을빛 눈동자.

만신창이인 육신과 달리 그 눈동자만큼은 고요했다. 직후, 나진이 움직였다. 늘어트렸던 검이 잔상을 흩뿌리며 움직였다. 뒤늦게 반응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 쾌속이라 불릴만한 검격이 제롤드의 대검을 후려쳤다.

카아아아아아아앙!

검기와 검기가 충돌한다.

충돌의 순간, 제롤드는 제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여태껏 줄곧 검기의 충돌에선 이쪽이 이득을 보았으니까. 나진은 검의 궤적을 비틀고 회피하기에 급급했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나······.

키이이이잉!

이번만큼은 달랐다.

거센 반발력. 칼자루를 쥔 제롤드의 손이 떨릴 만큼의 반발력이 발생했다. 제롤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반발력에 이기지 못해 나진의 몸이 저 멀리 밀려났으나, 밀려난 건 나진뿐만이 아니었다. 제롤드의 대검은 완전한 궤적을 그리지 못한 채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가 있었다.

그리고 땅에 내디뎠던 군화 역시.

제롤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자신의 두 다리를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조금 전 빛나던 검기는 분명······.

제롤드 오톤이.

클라우스 아텐이.

눈을 크게 뜬 채 나진을 바라봤다. 저만치 밀려난 나진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잡았다.”

나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던 답. 자신에게 부족했던 한 걸음. 드디어 그것을 붙잡았기에.

파삭.

나진의 검기에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번데기가 부서지는 소리를 닮아 있었다.

별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다.

낮은 곳에서 태어나 쓰레기처럼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꿈을 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지하도시 아트만은 소년에게 있어 감옥이었다.

거대한 감옥.

평생 나갈 수 없으리라 여긴 감옥.

그 감옥을 나서게 됐음에도 소년은 여전히 죄수였다. 소년은 스스로를 죄수라 여겼다. 그렇기에 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죄수가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기사는 빛나는 이여야만 하니까.

기껏 자유를 얻었음에도.

선을 넘었음에도.

철창을 부수고 감옥을 탈출했음에도.

소년은 여전히 무언가에 얽매여 있었다. 말투와 표정은 딱딱해졌으며 어깨에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근본은 글러 먹은 사냥개이며,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니 아예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하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부정.

감옥을 나서고도 소년은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죄수라 여겼으며, 여전히 족쇄를 발목에 채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소년은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깨달았기에 그는 웃음을 흘렸다.

‘잘못 생각했지.

소년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거야.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하도시, 아트만.

빌어먹을 고향이자 자신이 갇혀있던 감옥. 증오해 마지않는 곳이며 감추고 싶을 출신이지만,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진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지하도시의 풍경이다. 그러나 기억하던 것처럼 도시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그곳에는 두 개의 별이 있으니.

높게 뜬 별과 낮게 뜬 별.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년이 꿈꾸었던 별이 그곳에 있다. 낮게 뜬 별을 바라보며 나진은 쓰게 웃었다. 애당초 자신이 처음으로 동경했던 기사가 누구인가? 이반이다. 아탕가의 기사 이반.

제게 꿈을 심어준 기사.

자신의 등을 떠밀어준 스승.

그는 말했다. 선을 넘어서 저 멀리까지 달리라고. 자유로이 달리라고. 너는 이제 자유라고. 모시던 기사의 유언이다. 지키지 않아서야 어디 가서 이반의 종자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닐 수 있겠는가.

‘착각했어요, 이반.

나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가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제롤드와 클라우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진에게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다. 섣불리 다가서면 죽는다. 그런 직감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흐름이 뒤바뀌었다.

일대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러나 요동치는 흐름과 정반대로 새하얀 검기는 착 가라앉았다. 세차게 요동치는 검기는 그곳에 없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검기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나진이 검을 내렸다. 새하얀 검기가 바스러졌다. 번데기가 부서지듯이, 혹은 뭉쳐있던 실들이 풀려 흩어지듯이. 흩어지는 검기와 함께 숲속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여전히 나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동자로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다. 기껏 해봐야 열 걸음 남짓한 공간. 그러나, 그 공간이 지금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풍경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외곽을 따라 건물들이 솟아오른다.

나진이 거닐었던 도시의 풍경이, 나진이 쓰레기를 뒤지고 살았던 골목길이, 더럽고 어두운 곳이지만 분명히 나진이 살아왔던 곳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모두를 나진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새하얀 별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반, 당신은 내게 참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정말이지 당신의 말대로다.

「힘 좀 빼고 다녀라, 이 녀석아.」

「좀 웃고 다니고.」

「그렇게 살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

나는 자꾸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만다. 무게를 잡으려 한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내 어깨에는 당신의 목숨과 명예가 얹어져 있다. 어디 당신뿐만인가? 오펜이, 호겔 영감이, 나를 도와주었던 이들의 무게가 얹어져 있다.

정말이지 무겁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만다.

엑스칼리버를 뽑았다. 영웅이 되어야만 한다. 저 밤하늘의 위대한 성좌인 멀린이 나를 지켜본다. 그녀는 내게 영웅이 될 거라고 속삭인다. 그래, 영웅이 되어야겠지. 나는 자연스레 아서왕을 떠올리고 만다.

아서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좀 더 점잖게. 조금 더 기사답게.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만 것이다. 표정이 딱딱해지고 말투가 굳었다. 지하도시의 사냥개인 나는 점차 흐릿해졌다.

하지만 내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부정하지 않겠다. 이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나는 약속하지 않았던가.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맹세했다.

하늘에 별을 새기기로.

그것은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맹세였기에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나는 훼손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별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음에도 별을 꿈꾸고, 기어코 별을 저 하늘 위에 걸어둘 것이다.

“후우······.”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에 힘이 빠지고 자세가 부드러워졌다. 자연스레 호흡 역시 가벼워졌다. 저 멀리까지 넓어진 심상. 나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곳에는 멀린이 서 있다.

멀린의 손에는 작은 새장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나진을 향해 새장을 던졌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새장. 그 새장을 바라보며 나진은 웃었다.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가벼이 검을 휘둘렀다.

놀랍도록 부드럽고, 또 자연스러운 움직임. 검을 휘두른 순간 검기는 솟구치지 않았다. 흐름을 끌지도 않았다. 단지 칼끝이 빛날 뿐이었다.

검의 끝이 빛났다.

검 끝에는 새하얀 별이 맺혀 있었다.

현실에서의 검은 허공을 갈랐으나, 심상 속에서 휘둘러진 검은 새장을 갈랐다. 너무나도 간단히 잘려 나가는 새장. 바스러지는 새장을 바라보며 나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번데기는 부수어졌다.

새장은 박살 났다.

소년은 우화(羽化)에 이르렀다.

파바바바바바바박!

허공에서 빛이 폭발하듯이 점멸했다. 나진의 칼끝을 시작으로 빛이 이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진 빛은 마치 별자리와 같은 형상을 띠고 있다.

완전히 분해되고 재구성된 검기.

그것은 더이상 소드 엑스퍼트의 검기가 아니다. 심상의 편린을 담아낼 뿐인 검기 역시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이룬 검기. 심상을 온전히 담아낸, 오직 나진만이 가진 검기다.

눈을 뜬 소년의 눈동자는 백금색으로 빛났다.

소드 시커(Sword seeker).

검의 길을 걷는, 검의 구도자.

우화를 마친 소년은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다.

“우화(羽化)······.”

클라우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우화. 소드 시커, 혹은 그에 준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저것과 비슷한 과정을 그 역시 거친 적이 있었다.

심상의 풍경이 확장되고, 창을 휘감은 오러가 완전히 재구성되는 감각.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 감각을 느꼈던 클라우스는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보았다.

제 앞에 이제 막 우화를 거친 청년이 있다. 나진의 칼끝을 따라 맴도는 별자리를 클라우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라봤다. 별자리 형태의 검기. 저런 형태의 검기가 역사상 존재했던가?

소드 시커의 검기가 제각각이라곤 하나,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저런 형태의 검기를 클라우스는 오늘 처음 봤다. 숱한 강자들과 맞서 싸워온 제롤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진이 피워올린 검기는 어두운 숲속에서도 찬란히 빛났다. 찬란한 별자리가 어둠을 몰아낸다.

인간의 검으로 그려낸 별자리. 처음 마주하게 된 검기의 앞에 제롤드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가 대검을 강하게 쥔 채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직감했다. 전황이 뒤집혔다. 유리함과 불리함이 반전했다.

제 앞에 서 있는 것은 소드 시커.

분명한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강자.

웃음을 흘리는 것은 제롤드뿐만이 아니다. 클라우스 역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화라니! 시련이 인간에게 성장을 강요한다곤 하나, 대부분의 시련은 인간을 죽인다. 그러나 저 청년은 시련을 넘어서 성장을 이루어냈다.

‘놀랍군, 정말이지.

목숨을 건 결투를 하는 중이란 사실조차 망각한 채 클라우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감탄함과 동시에 그는 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검기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완벽했던 검사가, 강맹한 검기마저 손에 넣었다.

이제부턴 한 번 한 번의 공격에 저자를 피 흘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몸이 찢어지지 않게끔 주의해야 하리라. 상황이 뒤바뀌었으나 흐름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격이다.

단 일격에 승부가 난다.

클라우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심상이 너울치며 창을 휘감았다. 제롤드는 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숱한 악마를 찢어 죽였던 대검에 그의 심상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히 깃들었다.

일격(一擊).

찰나가 승부를 판가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