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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환(七環)의 흑마법사, 케팔론.

대략 60여년 전 레겐오프 시를 거점 삼아 국가 전복을 꾀한 반역도. 비록 그 계획은 실패했지만 제국의 일천 년 역사를 뒤흔들 뻔했던 사건인 만큼, 제국은 케팔론과 엮인 일에는 치를 떨어댔다.

레겐오프 시에서 케팔론이 시도했던 ‘초월의식’이 결정적이긴 했으나, 그 이전에도 케팔론은 숱한 학살극을 벌이며 제국을 좀먹는 벌레와도 같은 작자였으므로.

그렇기에.

레겐오프 시의 지하에서 케팔론의 공방이 떡하니 발견됐단 사실에 제국과 성혈 교단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 책임지고 불태웠다면서?』

『여기 적혀있지 않소. ‘기록과 흔적의 말살, 적색 마탑주 아드리온의 지휘하에 이루어져.’ 과인의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닌 듯헌데······.』

『뭐 하시오?』

『책임자 안 데려오고.』

젊은 황제가 직접 적색 마탑주를 호출했다.

대략 13년 전에 은퇴하고 제 영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을 즐기던 전(前) 적탑주는, 때아닌 호출에 황실에 끌려와 정강이를 까여야만 했다. 겸사겸사 사상검증도 당해야만 했고.

황제가 친히 전대 적탑주를 조지는 가운데, 성혈 교단에선 사건을 마무리 짓기위해 교단의 처형인을 직접 레겐오프 시에 파견했다.

······그렇게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일련의 사건의 목격자 겸 첫 발견자.

나진은 이번 사건과 깊게 얽힌 인물이었기에, 교단의 처형인은 레겐오프 시를 방문하며 나진에게 면담을 요청해 놓았었다. 물론 나진이 그 면담에 응해야만 할 의무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참고인일 뿐이니까.

하지만 의무가 없다 하여 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려 교단의 처형인이, 소드 마스터가 콕 찝어 면담을 요청했는데 그걸 거부했다간 어떤 후폭풍이 불지 모르는 법이니까.

‘황실 소속이나 공작가 출신이면 또 몰라도···.’

적어도 한낱 모험가가 거부할 수 있는 면담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진은 레겐오프 시에 남아 교단의 처형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교단의 처형인.

그 첫인상은 섬뜩함이었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새하얀 머리칼. 얼핏 보기엔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이나, 그녀가 최소 150년을 살아왔단 사실을 나진은 곱씹었다.

‘외견만 보고 나이 파악하기가 힘드네요.’

-그렇겠지. 소드 시커급만 돼도 외견은 젊었을 때로 고정되니까. 마스터쯤 되면 아예 수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멀린이 심드렁히 답했다.

-150살 정도면 뭐 한창때네.

150살이 한창? 천 년이 넘게 살아온 마법사의 말은 흘려듣기로 나진은 결정했다. 시간 감각이 아무래도 자신과는 다른 것 같았으니까.

또각.

저 멀리서 유엘 라지안이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걸이에선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 특유의 격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힘이 빠진, 가벼운 걸음이었다.

‘아, 이거······.’

그 걸음걸이가 향하는 곳. 그리고 유엘 라지안의 붉은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 그곳이 정확하게 자신이 서있는 쪽임을 눈치챈 나진이 신음했다.

‘아무래도 찍힌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도시의 영주와 이단심문관, 그리고 이번 파우베 토벌 작전을 책임졌던 하이트를 내버려둔 채 유엘은 나진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리곤 탁.

그녀가 나진의 앞에 멈춰 섰다. 여전히 그녀는 무표정했고, 또한 무감정해 보였다. 조금 전 보았던 입꼬리의 움직임조차 착각이었다는 양, 바로 앞에서 마주하게 된 유엘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느껴졌다.

스륵.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기울인 고개를 따라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백색 머리칼 사이로 유엘이 나진을 바라봤다.

“이름이 뭡니까?”

대뜸 던져진 질문.

나진은 순간 이것이 눈앞의 인물의 목소리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큼이나 유엘의 목소리는 이질적이었다.

상상한 것보다 가느다랗고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

사람을 만에서 십만 단위로 갈아 죽인 살인귀에겐 썩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진은 뒤늦게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반입니다.”

“아, 당신이 사건의 참고인이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유엘은 여전히 존대를 했다.

그러나 주변에선 그 사실을 딱히 특별히 여기지 않는 듯한 반응이었는데, 뒤늦게 나진은 유엘 라지안에 대한 정보 중 하나를 기억해 냈다.

유엘 라지안은 누구에게나 존대를 한다.

모든 것이 그녀에겐 다만 똑같기 때문에.

제국의 태양인 황제에게도, 그리고 거리에 굴러다니는 거지에게도 그녀는 존대를 한다. 그 사실을 지적한 이가 몇 있었지만······.

‘지적하고도 머리가 목에 붙어있는 자는 없다.’

그래서 불편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 거로군. 빠르게 납득한 나진은 곱게 유엘의 존대를 받아들였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요.”

유엘이 담담히 말했다.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는 둘째 치고, 그 목소리에는 높낮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질적인 목소리로 유엘은 말했다.

“안내하시지요.”

그녀가 나진을 가리켰다.

본래 그녀가 나진에게 청한 것은 면담이고, 안내자 역할은 따로 있었지만··· 그게 뭐 알바냐는 듯 유엘은 나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안내는 이쪽 분에게 받겠습니다. 다들 할 일 하십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듯하니.”

이단심문관들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흩어졌다. 영주와 하이트만이 자리에 남아 멀뚱멀뚱 유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 그것이···.”

영주가 눈치를 보냈고 하이트가 말했다.

“혹 따로 동행인이나, 기사와 같은 인력이 필요하시진 않는지······.”

그 질문에 유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표정이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예?”

의문 어린 목소리.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하이트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고개를 숙인 하이트가 실언이었다며 길을 텄다.

애당초, 유엘 라지안에겐 동행이 필요 없다.

기사와 같은 인력이 필요할 리도 없다.

으레 초월의 경지에 오른 초인이란 자들이 그러하듯, 유엘 라지안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강자다. 상식을 운운하며 재단하려 들어선 안 된단 뜻이다.

이 도시에 상주하는 모든 전력··· 그러니까 모든 기사와 모든 마법사, 그리고 잔류 중인 용병과 병사들 모두가 그녀에게 달려든다 한들 그녀에게 피 한 방울 흘리게 만들지 못하리라.

소드 마스터란 그런 존재니까.

유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진을 대동한 채 지하 수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곳입니다.”

유엘을 안내하며 나진은 유엘에 대한 인상을 조금 수정했다. 멀린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린 유엘의 인상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피에 미친 광인(狂人)이었다면······.

또각.

지금 제 뒤를 따라오는 유엘에 대한 인상은 무감정한 인형이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릴 때 느꼈던 짙은 살기가 지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꼭 그때 자신이 겪었던 게 착각이라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지하 수로의 깊은 곳, 파우베를 추격해 도착했던 곳에 나진은 도착했다.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면 케팔론의 공방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다. 이단심문관들이 봉인을 해제해 둔 통로였다.

“저곳이군요.”

유엘이 또각,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나진보다 앞선 곳에 섰다. 이젠 나진이 유엘을 뒤따라 걷는 모양새가 됐다. 통로를 따라 공방으로 내려가며 유엘이 말했다.

“이반이라고 했습니까.”

“예.”

“나이가?”

“스물여덟입니다.”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그렇기에 말에 담긴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신분상의 나이론 스물여덟이 맞습니다.”

“위장 신분이란 뜻이군요. 제국법상 신분 위장의 죄는 가볍지 않으나, 그건 제국의 관리분들의 일이지 제 관할은 아닙니다. 관심이 없단 뜻입니다.”

유엘이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는데,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번들거렸다.

“저는 당신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호기심이며, 당신에게 해를 입힐 의도는 없습니다.”

나진은 직감했다. 저건 경고였다. 다시 한번 거짓을 입에 담았다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어딘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약조나 맹세를 하신다면, 나이를 밝히겠습니다.”

“제게는 당신의 신분을 밝히게 할 권한과 권력이 있단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수단 역시 제게는 많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 맹세를 원하십니까?”

“예.”

유엘이 나진을 바라봤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고도 흔들림이 없는 노을빛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히죽.

유엘의 입꼬리가 조금이지만 움직였다.

“좋습니다. 맹세하지요. 성혈 교단의 주신, 가시덩쿨의 순교자의 이름 아래 맹세하지요. 지금 나눈 대화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되었습니까?

그리 질문하는 유엘에게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열여덟입니다.”

“어리군요.”

“그렇습니까.”

“예, 젊다기보단 어립니다. 당신의 경지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어리군요. 놀랍습니다.”

유엘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메마른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진이 떨떠름한 눈동자로 바라보자니, 유엘은 박수를 멈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박수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럽습니다. 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요.”

“박수는 제 나름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의 뜻은 없으니 웃으십시오.”

유엘이 제 입꼬리를 양손으로 치켜올렸다.

“소드 마스터의 박수는 귀한 것입니다. 제 놀라움은 조금 더 귀한 것이지요.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나진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유엘이 고개를 돌린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십만 단위로 갈아 죽인 살인귀가 제정신이겠어?

그것도 그렇군. 멀린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진은 유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방으로 내려가면서도 유엘은 나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사실이 공표됐다면 제국은 발칵 뒤집혔겠군요. 검성 카론이 당신을 만나러 곧장 찾아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자라면 분명 그러겠지요.”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던 목소리에, 조금씩이지만 높낮이가 느껴졌다. 유엘의 목소리가 희열로 물들어감을 나진은 눈치챘다.

“하지만 당신을 처음으로 만나고,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유엘 라지안이 당신이 처음으로 마주한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영광이군요.”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유엘이 걸음을 멈췄다.

케팔론의 공방 깊은 곳에 그들은 들어와 있었다. 한눈에 펼쳐진 온갖 끔찍한 광경 앞에서, 유엘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한숨에는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자신의 제복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꺼내든 것은 물병이다.

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물병의 마개를 따고, 입에 털어 넣었다.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독하디독한 술이 풍기는 강렬한 향이 풍겨왔기에.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단숨에 한 병을 비운 유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당신에게 검을 휘두를 명분이 제게는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야기.

나진이 당황한 가운데 유엘은 계속해서 말했다.

“제국법상 신분 위장은 중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캄브리아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으므로, 예외법이 적용돼 저는 당신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혼잣말이었고.

“저는 제국법상으로 즉결 판결권을 가지고 있으나 당신에게 휘두를 순 없군요. 성혈 교단의 처형인으로서 가진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을 심문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무력이 아닌 대화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신에겐 아직 죄가 없으므로.”

자신이 검을 휘둘러도 될 이유를 찾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곳으로 내려오는 동안 당신의 체내 기(氣)를 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비정상적인 성취. 악마와의 계약을 의심했습니다. 조금의 마기라도 검출된다면 저는 교단의 처형인으로서 당신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없더군요. 아주 깨끗합니다.”

길게 내뱉은 한숨.

“제가 당신에게 검을 휘두른다면, 이는 명백한 불법이고 교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 사실이 안타깝군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유엘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콱, 그녀가 허공을 움켜쥔 순간 풍경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풍경은 이윽고 하나의 형태를 띤 채 그녀의 손에 물결쳤다.

유엘은 허공을 움켜쥐었으나,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대검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대검을 움켜쥔 순간 나진이 반사적으로 뒤로 거리를 벌렸다. 짙은 살기가, 그녀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 풍겼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운 까닭이다. 살기가 질량을 가지기라도 한 듯 공간을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눌렀다.

나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고, 정신을 차려보면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살기를 견디는 정신력, 거리를 벌리는 직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드는 검사로서의 행동. 훌륭합니다. 정말이지 안타깝군요.”

검을 뽑아 든 채 유엘은 고개만을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희열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제국법상 상호 간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결투에서 죽음은 합법적입니다. 결투를 청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소드 마스터와의 결투.

만일 이 결투를 검성이 청했다면 나진은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검성은 당연하게도 손속을 둘 것이며, 나진의 검을 식견하고 가르치기 위해 결투를 청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자는 다르다.

저자의 목적은 단 하나다. 피 흘리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결투. 생과 사를 가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생사결. 받아들이는 순간 제 목이 떨어질 것이다.

‘엑스칼리버를 뽑는다면?’

아니, 그래도 반드시 진다.

경지가 다르다. 경험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엑스칼리버를 불러낸다 한들 그 간극을 좁힐 수 없다는 사실을 나진은 안다.

“거절, 하겠습니다.”

“소드 마스터와의 대결은 값진 경험입니다.”

“살아남아야 그 경험이 의미가 있겠죠.”

“틀린 말은 아니군요.”

유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결투는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안타깝다는 듯 숨을 내뱉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케팔론의 공방이 펼쳐져 있었다. 성혈 교단의 처형인으로서, 유엘은 저 공방을 깔끔하게 정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저거라도 베어야겠군요.”

그녀가 움켜쥔 대검을 한손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나진은 보았다.

신문지를 가위로 오려내듯 눈앞에 있는 것들이 세상에서 도려내지는 모습을. 현상이 먼저 일어나고 소리는 뒤따랐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익!

사람의 비명을 닮은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