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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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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백금색은 별을 상징한다.

저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들은 순백과 금빛이 뒤섞인 백금색이요, 별의 검이라 불리는 엑스칼리버 역시 백금색의 검날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백금색에서 사람들은 별을 떠올리곤 했다.

백금색은 별을 상징하며, 또한 신성하다.

저 밤하늘의 성좌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존재이며, 별들을 모시는 교단 역시 별빛을 신성시했다. 그러므로 별빛을 닮은 백금색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별을 닮았으며 신성한 것.

그런 상징적인 요소 덕에 백금은 이곳저곳에 쓰이곤 했다. 성휘 교단의 등대에, 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백금탑에,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에, 그리고 숱한 귀중한 것들에.

하지만 쓰이지 못한 곳 역시 존재한다.

영혼을 연료 삼아 태워내는 불길.

백금의 마나, 서클, 검기······.

숱한 이들이 백금을 동경했으나, 그 어떤 마법사도, 그 어떤 검사도 백금색의 불길을 피워올리진 못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오직 단 한 명에게만 허락된 색이었으므로.

대영웅 아서.

오직 그 대영웅만이 백금의 불길을 소유했다. 오직 아서만이 백금의 검기를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며, 아서의 사후 수백 년간 단 하나의 반례도 나오지 않아 진리로 굳혀진 명제다.

분명 그럴 텐데.

분명 그리할 텐데.

파우베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녀는 제 앞에서 타오르는 나진의 검기를 보았다. 제 두 눈동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 백금색을 품고 있다. 너무나도 선명한 백금의 검기 앞에 파우베가 마른침을 삼켰다.

‘눈속임. 헛것. 착각.

숱한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파우베가 이를 악물었다.

저것이 설령 그 백금의 검기가 맞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뿐이란 사실을 그녀는 안다. 지금 와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봐야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녀의 등 위로 떠오른 사환(四環), 네 개의 서클이 거칠게 회전했다.

공방에 준비된 매개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파우베의 서클은 주문을 토해낼 준비를 마쳤다. 요동치는 제 마나를 느끼며 파우베는 억지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눈앞의 상대를 죽이는 것.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백금의 검기를 두른 나진을 향해 파우베가 지팡이의 끝을 겨누었다. 그녀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며, 공방에 가득한 매개를 통해 강화된 주문의 위력은··· 가히 5서클에 필적할 것이다.

4서클 주문, 망자의 굶주림.

지팡이 끝에서 파동이 인다. 방사형으로 퍼져나간 파동을 따라 망자들의 손아귀가 솟구쳤다. 솟아난 손아귀는 닿는 것들을 할퀴고, 오염시키고 바스러트리며 끝내는 자신과 같은 망자로 만들어버린다.

살이 썩어 문드러진 망자는 결코 굶주림을 해소할 수 없기에, 단지 영원히 허기에 헐떡여야만 한다.

그 강렬한 사념, 시체와 산 제물들의 영혼 울림을 매개로 삼은 ‘망자의 굶주림’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교단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저 손아귀에 닿는 순간 살갗이 썩어 문드러지며··· 끝내는 망자가 되어 바스러지고 만다.

드드드드드드득!

시야를 가득 메운 채 다가오는 망자의 손아귀.

당연하게도 피할 곳은 없다. 파우베가 발현한 주문을 바라보며 나진은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4서클 주문쯤 되면 그 효과가 위협적이긴 하군.

-그야 그렇겠지. 4서클부턴 공성 병기니까.

멀린이 속삭였다.

-원래는 저런 주문을 쓰게 둬선 안 돼.

-이 정도 수준의 싸움에선 4서클 주문을 쓰는 순간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확실히 멀린의 말대로다.

통상적인 마법사가 저것과 비슷한 위력의 주문을 발현했다면, 치명상을 각오해야 했을 테니까. 피할 곳을 주지 않고 광범위하게 밀려드는 주문은 나진이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마법사와의 전투는 이런 느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가만히 자세를 잡았다. 어찌 보면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그 호흡과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야, 4서클 주문이 위협적인 건 ‘통상적인’ 주문이 상대일 때의 이야기였으니까.

눈앞의 상대는 흑마법사였고, 으레 흑마법사들이 그렇듯 파우베의 주문은 정도(正道)에 속하지 않으며 이치를 더럽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나진은 판단했다.

탁.

검을 높게 끌며 나진이 걸음을 내디뎠다.

물러서지 않은 채, 나진은 망자의 손아귀들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뻗어온 손아귀가 나진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서걱, 나진의 검이 망자의 손을 베어 갈랐다.

파우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주문을 베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무언가 달랐다. 백금의 검기에 닿은 손아귀들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치이이이이이익!

타들어 간다. 주문이.

망자의 손아귀들이 나진의 검에 잘림과 동시에 별빛에 타들어 갔다. 백금의 검기가 닿은 곳마다 그림자가 물러나듯 손아귀들이 바스러졌다.

···백금색은 별을 상징하며, 또한 신성하다.

인류 역사상 오직 아서만이 소유했던 백금색의 검기는 용살의 검, 별의 검 등등 숱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악마들 사이에선 이렇게 불렸다.

심판의 검기.

사이한 것을 불태운다. 절단한다.

그리하여 사이하고 사특한 것들을 심판한다. 악마의 살갗을 불태우고 재생을 방해하며, 오염된 마나를 뿌리부터 부정한다.

-애당초 상성이란 이야기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멀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로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날, 나진의 백금색 검기를 처음 보았을 때.

당시에는 설마 싶었고, 확실하진 않았기에 검기의 성질이 드러나는 소드 시커 때 다시 확인하겠다며 멀린은 제 판단을 유예했었다. 그리고 나진이 시커의 경지에 근접한 지금··· 멀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상의 편린을 담았을 뿐인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별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악마들이 두려워하며, 마녀와 용이 증오하고, 떨어진 별들이 저주하는 별의 검기. 나진의 검에 피어오르는 검기는 아서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았기에 저런 검기를 가진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 아이가 소망한 별이, 그렸던 별이 아서의 별이기에 저런 검기를 가지게 된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처연하게 빛나는 나진의 별을 바라보며 멀린은 쓰게 웃었다. 나진의 검을 휘감은 별빛은 아서의 것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았으니까.

주문이 잘려 나간다. 손아귀들이 타들어 간다.

파우베의 시선이 흔들렸으며, 앞으로 쭉 뻗은 파우베의 지팡이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파우베는 지금 이 순간 공포를 느꼈다.

4서클 주문이 난도질당하고 있다.

자신이 발현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주문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잘려 나가고 있다. 나진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손들이 무더기로 쓸려나갔고, 나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별빛에 타들어가 재로 사위는 손아귀들이 이것이 현실임을 파우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서걱.

울려 퍼지는 것은 섬뜩한 절삭음.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은 치이이익, 하고 잘려 나간 것들이 타들어 가는 소리. 망자를 불태우며 별빛이 다가오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 많던 손아귀들이 모조리 잘려 나가고 없다. 앞으로 쭉 뻗은 지팡이 끝에선 바닥난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곤, 탁.

바로 앞에서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4서클 주문을 정면에서 박살 내며 거리를 좁힌 나진이, 기어코 파우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칵!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검이 파우베의 지팡이를 베었다. 지팡이를 베어 가르며 솟구친 검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떨어진 칼날이 파우베가 두른 장막을 부드럽게 베어 갈랐다.

반발은, 척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장막을 베며 파고든 검이 파우베의 목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도 처연하게 빛나는 백금색의 검기. 그것이 파우베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스걱.

원대한 목표를 꿈꾸던 흑마법사의 최후는 초라했다. 잘려 나간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꾸라지는 파우베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탈력감이 엄습했다.

‘역시 힘들긴 하네요.

-아직 소드 시커가 아니니까.

멀린은 말했다.

-검기가 심상을 담기에 적합한 형태로 변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무턱대고 심상을 불어넣는 데 무리가 없을 리가 없지.

멀린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나진은 칼끝을 가볍게 털곤 납검했다. 확실히, 아직 시커의 경지엔 오르지 못했기에 심상을 담은 검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백색 검기보다 몇 배는 더 짧은 것 같은데.

순백의 별을 담은 검기보다, 백금색의 별을 담은 검기가 곱절은 빠르게 바닥났다. 아직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기분 나쁜 곳이네요.”

수십 년 전 이 도시에서 무언갈 계획했다던 케팔론의 공방. 그 공방의 풍경을 시야에 담은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위가 좋은 나진조차도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을 수 없는 ‘물건’들이 놓여있었으니까.

-어째 흑마법사들은 수백 년이 흘러도 하는 짓이 변함이 없네. 기분 나쁜 건 여전해.

멀린 역시 진저리난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은 위로 올라가서 따로 보고해야겠다고, 나진은 생각했다. 도시의 지하에 이런 게 남아있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나진이 몸에 박힌 뼈 말뚝을 뽑아냈다. 파우치에서 꺼낸 외상용 포션을 상처 부위에 뿌리곤, 디에타 상단의 마크가 붙여진 포션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고급품들로만 골라 담았나 본데?

‘그러게요. 효과가 벌써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나진이 파우베의 시체를 끌었다.

의뢰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시체를 끌고 들어왔던 통로를 찾아 나진이 걸음을 옮겼다. 위로 향하는 통로. 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파우베의 얼굴을 몇 번 가져다 대니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탁.

열린 문의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딘 나진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자신을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는 카프만의 모습이었다.

통로 바깥으로 나온 나진이 카프만과 시선을 마주했다. 쇠뇌를 겨누고 있던 카프만은, 이내 쇠뇌를 내리곤 나진을 향해 다가왔다.

“파우베가 나올 줄 알았더니, 네가 나왔군.”

“제가 맡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허세인 줄 알았지. 몸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데 사환의 흑마법사한테 달려드는 미친놈이 어딨어?”

“여기 있군요.”

카프만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나진이 끌고 온 파우베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긴 모양이지?”

“그렇게 됐습니다.”

“허 참. 대단한 놈일세. 어떻게?”

“검사가 싸우는 게 뭐 별것이 있겠습니까. 달려들어서 베었습니다.”

“그거참 담백하군.”

카프만이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뭐 덕분에 일이 쉽게 됐다. 파우베가 빠지니 남은 놈들 처리하기도 쉬웠고. 저기 보이지? 몸에 구멍 뚫어둔 거.”

“잘 보입니다.”

“이제 일을 보고하러 가면 되는데······.”

카프만이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마치 가렵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끝을 흐리던 카프만이 나진을 바라봤다.

“저번에 내가 물어봤던 거, 기억나냐?”

“뭘 말입니까.”

“교단의 암부냐는 질문.”

“기억하곤 있습니다. 대답이 필요하십니까?”

그때는 대답하지 않아도 됐다 한 질문.

그저 혼잣말이라고 카프만이 대답을 듣지 않았던 질문이다. 카프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지. 보다 보니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교단의 암부는 너처럼 싸우진 않거든. 그것과 별개론 암부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프만은 질문을 던졌다.

“지하도시 아트만. 거긴 요즘 어떠냐?”

예상외의 인물에게서 들린, 예상외의 질문.

나진의 사고가 한순간 정지했다.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이유. 눈앞의 사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끝에 나진이 내린 결론은 하나다.

즉각적인 대응.

나진이 파우베의 시체를 놓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드는 과정까지 걸린 시간은··· 나진이 평소에 판단을 내리는 시간보다 1초 늦어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1초는.

“왜인지 그럴 것 같더라니.”

선공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같으니라고.”

나진의 몸에 화살이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