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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 발을 디딘 후 매일이 배움의 연속이었다. 나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며, 깨달음의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오곤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나진은 거인들이 그 큰 몸집과 달리 매우 민첩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식량을 도둑맞았을 때 그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어어어어어어어!

식량을 도둑맞은 거인이 울부짖었다. 다소 억울함이 느껴지는 울부짖음이었다. 나진은 그 울부짖음에 십분 공감하지만, 함께 주저앉아 울어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할 건 해야지. 나진은 전력으로 질주하며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노려봤다.

탁, 탁, 탁!

제 몸집만 한 항아리를 어깨에 지고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투구기사. 저 항아리를 매고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지가 의문이었지만, 나진은 그 의문은 뒤로하고 투구기사에게 소리 질렀다.

“시발, 도망칠 거면 도망칠 거라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닙니까!”

“어허, 기사가 어찌 도주를 논하는가? 쯧쯧. 이거 아직 덜 배웠구만.”

“그럼 지금 이건 뭡니까?”

“무릇 기사라면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법. 저곳에 빛이 있다. 빛을 향해 달려라!”

“이게 뭔 개소리······.”

“아님 거인하고 한판 뜨든가.”

“뭐합니까? 안 달리고.”

등 뒤에서 ‘쿵쿵’ 하고 거인의 걸음 소리가 요란스럽게도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진과 투구기사는 전력 질주했다.

우오오오오오오······!

등 뒤에서 거인들의 구슬픈 목소리가 메아리쳤지만 나진은 무시했다. 그 뭐, 식량도 많아 보이던데 좋은 건 좀 나눠 먹어야 할 거 아닌가. 욕심만 가득해선.

“근데 이거 도둑질 아닙니까? 기사가 도둑질해도 돼요?”

“쓰읍. 도둑질이라니? 거인들에게 후원받은 거야. 저길 봐라. 잘 들어가라며 저렇게 배웅도 해주지 않나.”

“······.”

나진은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이쪽을 향해 애절하게 손을 뻗고 있는 거인들이 있었다.

우어어어어어.

다시 보니까 배웅 같기도 하고. 그 배웅이 다소 격했기에 나진도 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거인들은 열심히 추격해 왔지만 나진과 투구기사를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신화시대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시대에는 경공을 펼칠 줄 아는 거인은 없었으므로, 보법이 다른 두 사람을 거인들이 추격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어려운 거 맞습니까? 진짜 매섭게 쫓아오던데.”

“아끼던 식량을 도둑맞으면 눈깔이 돌기 마련이지.”

“도둑맞다뇨. 후원해 줬다면서요?”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라. 피곤해지는 법이야.”

거점에 귀환한 뒤, 투구기사는 식량창고에서 털어온 항아리를 쿠웅 하고 내려놨다. 그리곤 장작을 들고 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생했으니 고기는 내가 굽도록 하지.”

외륙에 돌아다니는 검 하나를 들고 와 그가 고기를 꿰었다. 검을 꼬챙이 삼아 투구기사가 고기를 굽는 가운데, 나진은 식기를 준비했다. 조촐하게나마 마련된 잔칫상에는 나진이 채집해 온 과일과 꿀이 장식됐다.

“모양이 좀 사는구만.”

투구기사가 만족스레 웃으며 잘 구워진 고기를 식기에 올리기 시작했다. 고기의 맛은 과연, 투구기사가 자신한 대로 별미라 불릴 만했다.

“아니, 맛 괜찮은데요?”

“내가 말했잖나. 거인들이 고기 양념을 참 잘한다니까? 그놈들이 거대 트롤이 아니라 거대한 인간, 거인(巨人)으로 불릴 수 있는 데는 이놈들의 미식가 기질이 한몫했을 거다.”

고기의 양념이 참 적절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짜고, 적당히 찐하다. 날것밖에 안 먹는 트롤들에 비해 거인들의 미각은 제법 고급스러운 걸까? 나진이 먹기에도 거인들의 양념 고기는 맛이 썩 괜찮았다.

“안 드십니까?”

“난 음식을 안 먹은 지 너무 오래됐거든. 이제 와서 입에 뭘 넣으면 분명 탈 날 거다. 너 많이 먹어라.”

투구기사는 고기를 구워서 올릴 뿐, 식사를 즐기진 않았다. 나진 혼자 먹기엔 고기의 양이 제법 많았기에 남은 고기는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놨다.

“아, 이건 대충 보관해도 된다. 항아리 자체가 마도구거든. 신기하지?”

후식으로 과일을 먹으며 나진은 투구기사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 투구를. 투구기사와 동행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진은 투구기사의 맨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투구, 왜 계속 쓰고 다니십니까?”

“못생겨서.”

“예?”

“너처럼 잘생긴 놈은 투구를 안 쓰고 다니는 게 더 이득이겠지만, 나같이 얼굴에 자신이 없는 놈은 투구를 쓰는 편이 낫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해야 할까? 나름의 이점이 있지.”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투구기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애초에 말야. 기사들이 왜 투구를 쓰겠나? 상대가 소드 엑스퍼트, 그러니까 검기를 뽑아낼 줄 알게 되는 순간 투구의 이점은 사라진다. 검기에 종이 잘리듯이 잘려버리는 방어구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물론 고급 아티팩트와, 비싼 철을 사용하면 검기를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소드 시커 수준까지 올라가면 무의미해진다.

“갑옷이니, 투구니, 사실 다 의미 없는 거야. 거추장스럽고 거슬리기만 하지.”

그가 제 투구를 두들겼다.

“머리가 무겁다. 시야는 좁아진다. 하물며 투구나 갑옷에 상징 같은 거라도 새겨져 있다면 상대에게 내 소속이 어디요, 하고 알려주는 것밖에 더 되겠어? 정보를 더 주는 거니 전투에 있어 불리해지지. 게다가 그 상징이 소중하다면··· 지키려 들 테니 약점까지 생길 거고.”

투구에 달린 뿔을 매만지며 그가 말했다.

“결국에 그런 것들이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불편하고 거슬리기만 한 것들이지. 멋을 내기 위한 용도,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거. 그게 전부다.”

“그렇다면 왜 기사들은 갑옷을 입습니까?”

“말했잖나?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해 보인다고.”

그가 웃었다.

“기사라는 게 말야. 여간 쉬운 게 아니거든. 명예와 긍지를 외치며 기사가 됐거늘,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더럽지. 거지 같아. 현실을 마주할수록 내가 품은 이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돼.”

한숨을 내뱉는 것 같기도, 투덜거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럴 필요가 있나? 내가 왜 기사가 됐더라?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나? 명예, 긍지, 그게 대체 뭐라고? 그걸 지킨다고 내가 뭐 얻는 거라도 있나?”

“······.”

“그런 의문을 수도 없이 품게 된다. 의문을 품을 때마다 흔들리게 될 거고. 그래서, 오래된 기사일수록 갑옷과 투구 같은···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거겠지.”

그가 제 투구를 손등으로 텅텅 두들겼다.

“곪아버린 속을 숨기고 겉으로나마 기사인 것처럼 연기를 한다. 갑옷을 빛내고, 장식을 걸치며 구태여 낭만이니 기사도니 하는 것들을 큰 목소리로 외치지. 정작 그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됐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은 스스로를 기사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그가 쓰게 웃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기사라고 여길 수 있는 놈들은 갑옷이나 투구 같은 거 필요 없다. 그런 거 없이도 자신을 기사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나진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너 같은 놈들 말야. 명예와 긍지를 아름답다고 느끼며 이상을 품은 놈들. 그런 놈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할 필요가 없거든. 내면이 이미 기사인데, 겉으로 보이는 게 뭐가 중요할까?”

약간의 부러움. 약간의 동경.

투구기사는 쓴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내렸다.

“그 왜. 키르호프 그 양반도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잖냐? 자신이 있는 거지. 사실 그 양반이나 너나 더럽게 잘생겨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굳이.”

“응?”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라고?”

가벼운 농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투구기사의 말에 나진이 끼어들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에 나진은 장작을 집어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했습니다.”

“뭔 소리냐 그게.”

“겉으로 보이는 거에 매달린다느니, 그렇게 해야지 기사라 여길 수 있다니 뭐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그건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예, 저는 잘 모릅니다.”

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에 비해선 얼마 살지도 않았고, 경험도 적으며, 외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고 나진은 말했다.

“그런 저라도 알고 있는 건 있습니다.”

“······.”

“명예와 긍지를 어떻게 여기든 상관 없습니다. 그것에 의구심을 품어도 좋습니다. 고뇌하고, 고민하는 것쯤이야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단 거냐?”

“스스로가 무엇이고자 하는가.”

나진이 투구기사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백금색이었다. 별빛을 닮은 백금색의 눈동자가 투구기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스스로가 기사이고자 하는가.”

기사왕, 아서의 자서전에 적힌 글귀였다.

고뇌해도 좋다. 망설여도 좋다. 언제나 기사답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마지막의 순간 나는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대는 기사인가?

최소한, 기사이고자 하는가?

나진이 심장에 품은 글귀였다. 그리고, 나진에게 꿈을 꾸게 한 어느 기사가 자신의 목숨으로 증명해 낸 글귀이기도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품었던 어느 푸른 기사를 떠올리며 나진은 말했다.

“명예를 잃고 추락해도, 더러움으로 얼룩져도, 긍지를 꺾여도, 하물며 그것들에 의문을 품더라도··· 끝내는 그것을 놓지 못한다면.”

지켜서 얻는 것은 없다.

지키지 않더라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놓지 못한 채 기사이기를 꿈꾼다면, 최소한 기사이고자 노력한다면······.”

나진은 그런 이들을 뭐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그자는 이미 충분히 기사이지 않겠습니까?”

나진의 말에 투구기사는 침묵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농담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일도, 네가 세상을 덜 살아서 그렇다는 흰소리도, 그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한 채 그는 입을 다물었다.

타닥, 타다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투구기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길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와 함께 그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투구이니, 갑옷이니, 깃발이니 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예, 않더라도.”

“중요한 건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

나진은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새로운 장작이 들어가자 꺼져가던 불길은 다시 거세게 타올랐다. 불길을 바라보며 투구기사는 나진의 말을 곱씹었다.

“부정할 수가 없군. 다름 아닌 기사왕께서 남긴 말이니 말야.”

“그렇죠. 이 말을 부정할 거라면 엑스칼리버라도 뽑아와야 할 겁니다.”

“비겁한 수를 쓰는군. 기사왕의 말을 인용하면 어찌 부정하라는 거냐? 그건 기사도를 논함에 있어 반칙이다.”

“꼬우면 엑스칼리버 뽑아오시든가.”

“허! 너도 없는 주제에 입은 살았군. 난 왕년에 엑스칼리버를 ‘거의’ 뽑을 뻔했던 사람이다. 내가 손에 쥐었을 때 검이 반짝이기도 했어.”

투구기사가 나진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엑스칼리버에 손도 안 대봤을 애송이가 쓰읍!”

그 말에 나진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진의 옆에서 멀린이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건 덤이었고.

“떨어진 별에 대해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요.”

투구기사의 질문에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진 별. 추락한 별. 타락한 성좌.

멀린에게 들었으며, 역사서를 뒤적이며 그런 별들에 대한 기록은 좀 본적이 있었으니까.

“만개의 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 그 외에 아서왕의 길을 가로막았다는 타락한 성좌들의 이야기도.”

“만개의 달? 아, 만월성(萬月星)을 말하는 거냐? 듣기로는 대륙의 소드마스터들에게 토벌됐다던데. 음, 그놈도 떨어진 별이 맞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던 투구기사가 하지만, 하고 말을 끊었다.

“네가 말하는 건 역성(逆星)들이다. 섭리를 거스르고 뒤집혀선 검게 물든 타락한 별들이지. 그치들도 추락한 별이라 부르긴 하는데, 내가 말하는 추락은 좀 더 직관적인 걸 의미해.”

“직관적?”

“그래. 문자 그대로 모든 별을 잃고 추락해버린 성좌를 말하지.”

그가 위에서 아래로 손가락을 휙, 그었다.

“낙성(落星), 혹은 망성(忘星).”

떨어진 별.

혹은, 자신을 잊어버린 별.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위업이 부정당할 때 성좌들은 별을 잃는다. 별을 잃을 때마다 성좌의 정신은 망가지고, 마모가 극심해지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과정 아니냐?”

“망자들이 마모되는 과정과 똑같네요.”

“그래. 성좌라고 마모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야.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지. 성좌가 모든 별을 잃는 순간, 정말로 끔찍해지거든.”

나진의 옆에서 멀린이 신음했다.

공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좀 끔찍해져.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라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길래? 나진이 눈을 깜빡이자 투구기사가 설명했다.

“추락한 별은 더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애초부터, 성좌가 된다는 건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가 된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굉장히 독특한 외모를 가지게 된단 뜻이지.”

뭐, 보면 알 거다.

그렇게 말하며 투구기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진, 두 번째 요구다.”

승자가 패자에게 세 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그중 두 번째를 쓰겠다고 투구기사는 말했다.

“지금부터 떨어진 별을 토벌하러 갈 텐데, 내게 협력해라. 꼭 토벌해야만 하는 별이 하나 있어서 말이다.”

어느 별입니까.

그 물음에 투구기사는 답했다.

“침묵의 기사, 크륀벨.”

그가 손가락을 쫙 펼쳤다.

왼손 다섯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랐는지,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빌려 그가 숫자 6을 표현했다.

“여섯 개의 별을 가졌던 성좌. 성좌명은 뿔피리를 부는 자, 호각성(號角星).”

투구기사가 제 투구에 달린 뿔을 툭툭 건드렸다.

“이 멋진 뿔 투구의 뿔을 꺾어버린 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