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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검기를 보면 상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나진도 일정 부분 그 이야기에 공감했다. 최소 소드 시커급에 이른 상대라는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소드 시커의 검기에는 심상이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심상(心象)이란 곧 마음에 새긴 풍경.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하거나 인상 깊은 장면이 심상에 자리 잡기 마련이다.
나진에게 있어선 그것이 별이었고, 클라우스 아텐의 경우 푸른 날개 기병들과 질주하던 초원이었으며,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에겐 가시나무였다.
그렇다면 눈앞의 저 남자의 심상은 무엇인가?
알기 쉬웠다. 저 남자의 검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타오르는 불이야말로 그의 검기이자 곧 심상이었다. 남자의 등 뒤에서 타오르는 성화(星火)를 본뜬 듯한 검기. 화염처럼 일렁이는 검기에선 열기마저 느껴졌다.
심상을 담은 검기는 심상의 특성마저 공유하곤 한다. 불길을 떠올리며 피워올린 검기는, 당연하게도 불길과 같은 열기를 가지게 된다. 별을 닮은 나진의 검기가 악마들에게 퍽 효과가 좋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화악!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밀려드는 열기에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던 나진은 잠시 멈칫했다. 뜨거웠다, 뜨겁긴 한데······.
‘버틸만한데?’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분명 뜨겁긴 하고, 벽돌을 녹여버릴 만큼 강렬한 열기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나진은 그 열기에 저항할 수 있었다. 몸에 닿는다면야 위협적이긴 하겠지만 검이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 열기 정도는 견딜 만했다.
-그게 네 별이 가진 이야기니까.
멀린이 나진에게 속삭였다.
-명멸의 마녀의 불길을 상대로 저항했으며, 브레스를 내뿜는 용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지. 심지어 불길에 온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기어코 용의 심장을 박살 냈잖아?
나진의 별이 가진 이야기이자, 나진이 이뤄낸 위업.
-이 정도 불길이야 뭐, 견딜 만하지 않겠어?
그 말대로였다. 나진은 물러서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코앞에서 화염이 출렁였지만 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러서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힘겨루기라면 이쪽도 밀리지 않는다.
카가가가가각!
검기와 검기가 맞부딪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가운데, 위화감을 느낀 나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눈앞의 사내를 찍어 누르듯이 압박하던 나진이 돌연 검에서 힘을 뺐다. 자세를 바꾸며 뒤로 물러섰다.
스칵! 맞댈 곳이 사라진 상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나진은 옆으로 빗겨선 채 칼끝을 내렸다. 그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나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모욕감, 그리고 불쾌감이다.
“뭐 하자는 겁니까?”
나진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망자가 아니면서 왜 망자인 척을 합니까.”
나진이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오른쪽 눈은 초점이 없지만 왼쪽 눈동자는 멀쩡했다. 그러나 그는 멀쩡한 눈이 아닌, 흐릿한 눈동자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음에도 본능에 몸을 맡기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저 남자, 검례를 취할 때는 이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는 본능에 몸을 맡기는 망자였다. 인간일 수 있음에도 그는 망자로서 나진을 상대하려 한 것이다.
그 사실이 나진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꼭 도망치는 것 같지 않은가?
나진이 검을 내린 가운데 사내는 말없이 나진을 바라봤다. 그리곤, 그는 아예 한쪽 눈을 감아버렸다. 흐릿한 눈동자가 아닌 선명한 눈동자를 감아버린 채 그는 짐승처럼 나진에게 달려들었다.
허, 하고 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자아를 잃어버린 망자와 싸우겠다고 이런 수고로운 방법을 선택한 게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이런 정면 돌파를 선택한 건 투구기사와 나진이 상대에게 보이는 존중이자 예의였다.
당신을 망자가 아닌 동등한 적수라고 생각하고 싸움을 걸겠다. 그런 뜻을 내포한 선언.
숫제 미련스럽기까지 한 고집. 그러나, 그렇기에 낭만이 있는 선택이다. 그걸 상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진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꾸욱.
나진이 검을 고쳐 쥐었다.
여태까지 쥐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 검을 낮게 끌며 나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이걸 보고도 당신이 계속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
성화 수호자, 슐레인 바이겔만.
성화 수호 기사단의 기사단장.
세간은 슐레인을 청렴하고, 긍지 높으며 명예를 아는 기사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슐레인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리 긍지 높은 기사가 아니었다. 자신은 단지 주어진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성화를 수호한다.
불이 계속해서 타오르도록.
그것이 그의 의무였다. 긍지와 명예를 노래할 만큼 기사도에 심취하진 않았지만, 의무를 저버릴 만큼 기사도가 없지도 않았다. 슐레인은 그런 인간이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인 어디에나 있을법한 인간.
‘성화를 왜 수호해야 합니까?’
언젠가 슐레인은 제 선배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돌한 후배의 질문에 슐레인의 선배는 불쾌감을 느끼긴커녕, 웃음과 함께 답했다.
‘나도 모른다, 그거 왜 지키는지.’
은퇴한 선배는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 불 200년 전부터 계속 타오르고 있다고 들었지? 그거 거짓말이다. 사실 한 100년쯤 전에도 한번 꺼졌고, 내가 단장일 때도 한번 꺼졌어.’
‘예? 그게 무슨······.’
‘그거 딱히 신성한 불 아니야. 별이 깃들어 있지도 않고. 그냥 단순한 불이지.’
‘그럼 이걸 왜 지킵니까?’
‘그 불을 사람들이 성화라고 여기니까.’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이곳의 사람들은 그걸 성화라 여겨왔어. 눈보라가 몰아쳐도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위안을 얻었지. 설령 그게 아무것도 아닌 불이라 하더라도··· 이곳 사람들에게 그건 성화(星火)인 거다.’
그리고, 하고 그는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우리 기사단의 긍지이기도 하고.’
술에 취한 선배는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성화가 타오르는 한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영원토록 타오르는 불길처럼 우리의 긍지 역시 영원할지니. 성화의 수호자들이여, 일어서라!’
술에 취해 떠드는 격언은 무게가 없었다. 고결함이나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게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말. 그러나, 어째서일까. 그 말은 슐레인의 가슴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슐레인이 생각하기에 그건 저주였다.
영원토록 자신을 옭아매는 저주.
그걸 슐레인이 깨달은 건 그가 단장으로 취임한 지 십 년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아······.’
그날 성화 수호 기사단이 지키던 땅은 멸망했다.
멸망의 사유는 단순했다. 출렁인 외륙의 경계선이 그들의 땅을 집어삼켰다. 외륙에 갇혀버린 영지민은 괴물이 되거나,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마모를 견딜 수 있었던 기사들을 제외한 이들은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다.
‘······.’
살아남은 기사들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기사에게 명예와 긍지가 깃들 리 만무했다. 그들은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명예도, 긍지도, 의무도 지키지 못한 이를 과연 기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 기사들은 마모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하나둘 망자가 되려는 가운데 슐레인은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단장이었기에.
슐레인의 눈동자는 성화대를 향했다.
거세게 타올라야 할 성화는 꺼져있었다.
꺼진 성화를 보며 슐레인은 선택했다.
불을 피우기를.
불이 꺼진 성화대에 슐레인은 제 검기로 불을 붙였다. 성화는 다시 타올랐다. 타오르는 성화를 두른 검을 슐레인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주저앉은 기사들이 볼 수 있도록 검을 들어 올린 채 그는 외쳤다.
‘불은 타오르고 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외쳤다.
‘성화가 타오르는 한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이 성화의 불길인지, 성화를 본뜬 자신의 검기인지 슐레인은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영원토록 타오르는 불길처럼 우리의 긍지 역시 영원할지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성화의 수호자들이여, 일어서라.’
중요한 건, 그 불을 보는 이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였으므로.
‘나아가자.’
성화를 이끌고 슐레인은 외륙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를 기사들이 따랐다. 어차피 돌아갈 곳은 없었다. 지키지 못했다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투쟁함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리라. 그들은 기사이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10년이, 50년이, 100년이.
그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슐레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망자로 변해버린 제 동료들이 있다. 동료들은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망자가 됐다. 이상을 노래하며 살아가기엔 10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더 이상 그들에겐 명예도 긍지도 남지 않았다.
망자가 된 그들을 채찍질하는 건 의무와 책임.
그들은 그저 슐레인이 피워올리는 성화에 이끌리듯 걷고 있을 뿐이다.
설령 망자(忘者)가 되어 자아를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들은 성화의 불길만큼은 잊지 못했다. 성화가 타오르는 동안은 그들은 슐레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성화가 타오르는 동안은 그들은 기사였다.
‘······.’
그러나 이젠 슐레인의 자아조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슐레인이 가지고 있던 별 역시 전부 마모된 까닭에.
그럼에도 슐레인은 불을 피웠다.
자신마저 망자가 되어버린다면. 그리하여 성화를 꺼트려 버리고 만다면. 제 동료들은, 성화 수호 기사단은 망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 사실만큼은 슐레인은 용납할 수 없었다.
슐레인은 불을 피웠다.
제 명예와 긍지를 저버린 채 그는 인간을 사냥했다. 비겁한 수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슐레인은 불을 피웠다.
심장을 먹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무고한 이들을 죽인 슐레인은 명예와 긍지를 잃었다. 그러나 그에겐 명예와 긍지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의무. 불을 지켜야 할 의무만이 남아 슐레인을 좀먹었다.
————은 불을 피웠다.
이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심장을 파먹어 연명한다 한들, 그건 일시적인 수단일 뿐 마모를 피할 수 없었다. 슐레인의 정신은 흐릿했다. 그쯤 해서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망자가 되고 싶다고.
죄다 놓아버리고 싶다고.
그러나 의무가 저주처럼 그의 몸을 옭아맸다. 결국 그는 계속해서 사냥을 거듭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망자처럼 움직일 때가 더 많아졌다. 자아가 아닌 본능에 몸을 맡겼다. 망자가 되어버린 제 절반에 자아를 맡겨버릴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하면 고뇌하지 않아도 됐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오랜 세월 고행길을 걸어온 인간은 편한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다.
그는 계속해서 불을 피웠다.
그리하여 20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본다.
강한 상대다. 저자의 심장에 담긴 별빛 역시 강렬했다. 강렬하고 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은 아름다웠다. 감히 자신과 같은 망자가 빼앗아도 될만한 별이 아니었다.
하지만 슐레인은 불을 피워야 했다.
사실, 이젠 이 불을 왜 피워야 하는지도, 왜 지켜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가 그의 몸을 채찍질할 뿐이었다.
‘아아.’
슐레인은 신음했다.
저 소년의 별이 너무나도 눈부셨기에. 저 별이 자신에게 이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묻는 것 같았기에. 그것이 괴로워서 그는 눈을 감았다. 제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고 불씨가 튀어 오른다. 몸이 흔들림에도 그는 감았던 눈을 뜨지 않았다. 으레, 수많은 인간이 그렇듯 슐레인은 눈을 감고 시선을 돌려 자신의 추악함을 외면한다.
카가가가각!
그러나, 소년은 그가 그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소년이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를 본 순간.
슐레인은 감았던 한쪽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이쪽을 보시는군요.”
소년이 미소 지었다.
어느새 소년과 슐레인의 자리는 바뀌어 있었다. 성화를 등지고 선 소년은 성화를 향해 검을 가져다 댔다. 성화의 불길이 소년의 칼끝에서 타올랐다.
그리곤, 소년이 검례를 올렸다.
그건 성화 수호 기사단의 검례였다.
슐레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단순히 검례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소년의 자세, 보법, 검을 쥔 파지법, 심지어 호흡마저 성화 수호 기사들의 것과 동일했다. 그건 모방이 아니라 재현이었다.
쐐엑!
소년이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불길은 소년의 검을 떠났다. 그야 소년의 검기는 불이 아니었으니까. 성화는 그 칼끝을 떠났지만, 슐레인의 눈동자에는 소년의 검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자루의 검으로 소년은 성화 기사단의 검술을 재현해 냈다. 올바른 자세로, 정직하게, 그야말로 기사답게 정면으로 돌파해 온다. 오래전 슐레인이 잃어버린 것들을 빛내며 소년은 검을 휘둘렀다.
더는 성화 수호 기사단이 제 검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저 소년은 기꺼이 자신의 검에 담아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찬란하다. 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눈이 멀더라도 보고 싶어지는 빛이었다. 별빛을 머금은 성화 기사단의 검이라니. 이 얼마나 그리운 광경이란 말인가.
소년에게서 슐레인은 과거의 영광을 보았다.
성화 기사단이 빛났던 과거를. 모두가 긍지 높았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과거를 추억할 적에 그는 망자가 아닌 인간이었다.
“하.”
결국 슐레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소년의 검을 받아냈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고쳐 쥐었다. 조금 전과 달리 소년은 곧장 슐레인을 추격해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소년은 슐레인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나진.”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슐레인은 알고 있다. 그도 한때는 기사였으므로. 슐레인은 오랜 세월 잊고 있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슐레인.”
슐레인 바이겔만.
슐레인의 자세가 바뀌었다. 본능이 아닌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휘둘러지는 검은 날카롭다. 매섭게 파고드는 칼날은 들판을 타고 번지는 불길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발을 디디고 설 곳이 좁아져 있었으니.
카아아아앙!
검이 맞부딪쳤다. 불씨가 튀어 오르고 나진의 검기와 슐레인의 검기가 상쇄되며, 쇠와 쇠가 맞부딪쳤다. 공격이 오갈 때마다 슐레인의 갑옷에는 금이 갔다.
촤아아악, 뒤로 쭉 미끄러지며 슐레인은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붙잡고 뜯어버렸다.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 던지며 그는 나진을 마주했다.
전투의 열기는 충분히 달아올랐다.
검은 충분히 나눴다.
대화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의도를 읽었다는 듯 저마다의 자세를 취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공격.
그 공격을 준비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검기가 만들어내는 섬광이 번뜩였다. 고성의 꼭대기에서 두 개의 별이 빛났다.
“허어.”
그 빛은 아래에서 창을 휘두르던 투구기사의 눈에도 들어왔다. 망자들을 떨쳐내며 투구기사는 고개를 들어 고성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빛을 흩뿌리는 별을 바라보며 그는 쓰게 웃었다.
“거참 요란스럽게도 빛나는구만.”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별빛.
별빛의 아래서 투구기사는 중얼거렸다.
“그거 되게 성가실 거요.”
상대해 봐서 알고 있다.
저 소년이 피워내는 검기는, 저 소년이 흩뿌리는 별빛은 상대로 하여금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잊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 놓아버리고 만 것들을 눈앞에 들이밀며 강제로 눈을 뜨게끔 만든다.
도망치지 마라. 외면하지 마라. 정면에서 당당하게 덤벼라. 당신이 한때나마 기사였다면, 최소한 그 긍지를 보여라.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만들 것이다.
저 빌어먹을 애송이는 상대를 강제로 기사로 만들어버린다. 이미 놓아버렸던 이들에게 다시금 꿈을 꾸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명예와 긍지를 외칠 기회를 건넨다. 저 애송이는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알고 있을까.
‘독주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독주(毒酒).’
망자(忘者)들에게 있어선 지독한 독주.
그러나, 동시에 끝내주는 술이기도 했다.
비록 취한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할지언정 그 술맛이 끝내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슐레인이 있는 곳을 향해 투구기사는 창을 살짝 까딱였다. 마치 술잔을 들어 올려 건배하듯이.
“한잔하시오, 슐레인.”
그것이 독약이라 한들.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