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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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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투구기사의 함성에 모종의 도발 효과라도 붙어 있던 걸까? 그가 함성을 내지른 직후, 망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나진에게 창칼을 휘두르는 망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까보단 크게 줄었다.

-도발은 아니고 별빛을 증폭시킨 것 같네.

‘예?

-그 왜, 망자들은 별빛에 이끌리거든? 언데드가 산 자한테 이끌리는 것처럼 말야. 그래서 별빛을 증폭시키면 망자들한테 도발을 걸 수 있어.

나진의 귀에 멀린이 속삭였다.

저번에 별빛을 조절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는지, 멀린은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 뒤에 ‘내가 별빛을 숨겨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에···? 하고 은근슬쩍 변명하며 나진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고.

‘저번에 그거 신경 안 쓰니까 걱정 마요.

자꾸만 힐끗거리는 시선이 신경 쓰여서 나진이 한마디 했다.

-그래···? 정말이지?

‘예. 정말.

멀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진 가운데, 나진은 망자들의 창칼을 받아내며 자리를 이탈했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자 나진을 노리던 얼마 안 되던 망자들마저 투구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기에 더해, 성벽과 망루에서 저격을 하려던 망자들마저 짐승처럼 변해 투구기사를 향해 뛰어내렸다. 그렇게 모여든 망자는 자그마치 20명은 돼 보였다.

대략 20명쯤 되는 망자들. 그중 14명은 소드 시커급이었다. 그들의 무기에 휘감긴 오러가 특수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저만한 숫자에 둘러싸인다면 나진도 몸 성히 빠져나올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투구기사는 달랐던 걸까? 그는 망자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밀리긴커녕, 망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기다란 장창을 휘둘러 망자들을 밀쳐내고, 발로 걷어차며 망자들 사이에서 날뛰고 있었다.

키가 족히 이 미터 오십은 돼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삼 미터짜리 장창을 휘두르는 모습은 꼭 거인이 날뛰는 모습 같기도 했다.

저리 여유로운 걸 보면 저 양반, 진짜 초월자였긴 했나 본데.

“뭘 구경하고 있나! 빨리 가라, 나도 힘들다!”

여유롭진 않은 모양이었다.

투구기사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나진은 고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목적지는 최상층, 성화(星火)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이 요새의 주인이 있을 테니까.

벽을 타고 장애물을 건너뛰어 곧장 성채의 꼭대기로 향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지, 정문에 랜스차징을 갈기진 않았을 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진은 투구기사의 말마따나 낭만을 따라볼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진 역시 낭만파였다. 정면 돌파, 이 얼마나 심장을 울리는 단어란 말인가. 효율보단 낭만을. 이성보단 감성을. 나진의 검기가 번뜩였다.

-환장하겠다, 정말.

‘이래서 마법사는.

-뭐?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마법사가 뭘 알겠는가. 멀린이 ‘너 그거 마법사 혐오야! 하고 울부짖는 가운데 나진은 검을 휘둘렀다. 마법사가 투덜댈 때 검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검사였으니.

아툴루 요새는 바깥에 인력을 집중시킨 모양이었다. 고성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았으나, 성안에 주둔 중인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최상층이 가까워지는 지금, 고성을 돌파하는 나진이 만난 망자는 딱 세 명밖에 없었으니까.

텅텅 비어있는 성채.

사람이 살아간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요새.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다시 위층으로 향하며 나진은 문득 멀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나진의 행동을 지켜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멀린의 모습이 나진은 조금 낯설었다.

외륙에 온 뒤 멀린은 나진의 선택에 참견하는 일이 줄었다. 평소에는 이럴 때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아. 라느니 ‘이건 어때? 라느니, ‘그건 미련한 방법인데.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 같은 말을 했을 텐데. 요즘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투구기사와 싸울 때도 그랬다. 목숨을 건 결투, 위험한 일이었으며 나진의 직감이 틀렸다면 나진의 여정은 그곳에서 끝날 뻔했다. 하지만 멀린은 나진의 선택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진이 무모한 결정을 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대륙에서와 달리, 그저 ‘감당할 수 있겠어? 하고 질문을 던졌을 뿐.

-그야 이젠 네가 어린애가 아니니까.

나진의 독백을 듣던 멀린이 말했다.

-네 별도, 그리고 내 별도 같은 곳에 박혀있어. 설령 별의 숫자나 높이가 차이 난다고 한들, 같은 하늘에 박혀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요?

-널 마냥 어린아이처럼 볼 때는 지났단 소리야.

어린아이와 보호자가 아닌.

선배와 후배쯤의 관계.

같은 공간에, 같은 전장에 서게 됐으니 너를 조금은 다르게 봐야 하지 않겠냐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그러니 네 선택을 존중해야지. 그게 정말 답이 없고, 죽음으로 뛰어드는 잘못된 길만 아니라면 말야. 투구기사랑 싸울 때도 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잖아?

‘직감이긴 했죠.

기사이기를 바라고 있는 상대.

명예와 긍지를 술로 표현하면서도, 그것에 취하고 싶어 하는 상대. 아예 계산이 없이 덤빈 건 아니었다.

-그거면 됐어. 네가 나름의 근거로 판단하고, 선택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할 거야.

왜냐면, 그래야만 하니까.

멀린은 그렇게 말했다.

-초월자가 되기 위해선 시련이 필요해. 육체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성장 역시 필요하지.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거야.

고민, 고뇌, 갈등, 그 끝에 내놓는 답.

그 답은 다른 누군가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내놓은 답만이 의미를 가질 테니. 이를 위해서라도 멀린은 나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 선택에 대한 대가야 뭐··· 같이 치르면 되는 거니까.

‘같이?

-당연한걸 뭘 새삼스럽게 물어봐?

멀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진을 째려봤다.

-내가 널 객사하게 내버려둘 것 같아? 여기가 내가 개입하기 어려운 대륙도 아니고, 정말 네가 죽을 것 같으면 난 개입할 거야. 그 후폭풍이야 뭐, 잘 감당해 봐야 할 테지만.

나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멀린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가 말하는 ‘후폭풍’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진의 입장에서야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멀린이 말하는 개입이란 지금 나진의 곁에 있는 그녀의 정신체가 아닌 진체(眞體), 저 외륙의 끝에 있는 별이 움직인단 뜻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캄란의 억제가 흔들린단 뜻이기도 했다.

외륙의 망자들이 결코 넘어올 수 없는 경계선이 대륙과 외륙 사이에 존재하듯,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선 역시 외륙의 끝에 존재했다.

아서가 제 목숨과 맞바꿔 만들어 둔 경계선.

그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게 원탁의 성좌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성좌인 멀린이 제 별을 움직이는 순간, 경계선은 흔들린다.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이 경계선을 넘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균형은 무너진다. 외륙과 캄란이 뒤섞이는 건 단지 외륙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될 테니까.

“어깨가 무겁네요.”

나진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멀린은 ‘네가 죽을 위기가 와도 한 번은 구해줄 테니 걱정 마. 라는 의도로 말한 것일 테지만 나진에겐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죽는 순간이 오거든, 멀린은 개입하고 세상의 균형은 박살 난다.

그 순간 멸망으로 향하는 초읽기가 시작될 것이다. 멀린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진은 자신의 목숨에 걸린 무게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세상의 균형이나 경계선이 저보다 더 중요한 거 아니에요? 좀 부담스러운데.

나진은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지만.

-너보다 중요하다고? 그딴 게? 왜?

멀린은 장난으로 받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한없이 투명한 눈동자가 나진을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 물음에 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계단을 오르던 나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멀린을 바라봤다.

잠깐의 침묵.

나진과 멀린의 시선이 교차했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깜빡이던 멀린이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처럼. 그녀가 황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

-아, 중요하지. 중요하긴 한데. 뭐. 음, 그냥 그렇다는 거야.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멀린이 실없이 웃었다.

나진은 그녀를 따라 웃지 못했다.

······나진과 멀린의 정신은 이어져 있다.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두 사람은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진의 경지가 오르며 심상이 확장된 결과, 둘은 서로의 독백이나 감정마저 일정 공유하는 상태가 됐다.

그 결과 원하든 원치 않든 통제되지 않은 강렬한 감정이나 독백이 상대방에게 흘러 들어갈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조금 전이 그랬다. 멀린이 ‘그게 중요하다고? 왜? 하고 말하는 순간 나진의 귀에 그녀의 속마음이 울렸으니까.

균형이니 평화니 안정이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어.

독백과 함께 질척하게 늘어지는 감정이 나진의 심장에 녹아들었다. 그건 여태껏 멀린이 나진의 앞에서는 보이지 않은 감정이었다.

증오. 후회. 회한. 분노. 원망. 슬픔.

압축된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평소라면 그녀가 통제하고, 스스로 삭힐 감정이지만 이 주제에 한해서는 멀린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역린과도 같은 부분이었기에.

-응,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진에게 제 독백과 감정이 흘러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진은 그녀의 웃음을 단지 웃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멀린.

-응? 왜?

나진이 멀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멀린의 푸른 눈동자에 나진의 노을빛 눈동자가 담겼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진에겐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나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뭐가?

‘다 내려놓고 당신이 개입할 일, 일어나지 않게 만들 거라고요.

-아니 뭐. 당연한걸? 근데 왜?

‘그냥 그렇단 겁니다.

잠깐 스쳐 지나갔던 감정은 금세 가라앉았다. 평소에 늘 보던 조금 얼빵하고 허당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멀린이 나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야, 앞! 앞 봐! 앞!

그녀가 나진의 어깨를 챱챱 때려대며 앞을 가리켰다. 앞에서 망자 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나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검을 고쳐 쥐었다.

-야, 전투 중에 날 보면 어떡해! 위험했잖아!

망자를 쓰러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멀린이 칭얼거렸다. 당신 때문에 그렇잖습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

계단을 오른 나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탁 트인 풍경이었다. 고성의 최상층에는 천장이 없었다. 천장이 없어 환기가 잘될 법도 한데, 최상층에 도착한 순간 나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시체 썩은 내가 진동을 했으니.

성의 옥상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다. 그들 중 몇은 아래서 봤던 기사들과 똑같은 갑옷, 성화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다른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갑옷을 입지 않은 이도 있었고,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이도 있었으며, 생전에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시체들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시체들의 공통점이라곤 그들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뚫렸단 점뿐이었다. 심장을 빼앗겨 죽은 시체들. 그 시체들이 내뿜는 악취로 진동하는 고성의 꼭대기에는 성화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성화(星火), 별의 불.

별은 백금색이거늘 성화는 백금색이 아니었다. 평범한 불길과 별다를 것 없는 붉은 색의 불이었다. 단지 불길 사이로 금색 입자가 ‘타닥’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고 있을 뿐.

저게 성화 기사단이 지키고 있다는 성화인가.

성화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저 하늘 높이까지 치솟았다. 나진은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성화대의 옆, 거기에 시체처럼 앉아있는 사내가 있었으니까. 그 사내는 나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이 이 요새의 주인입니까.”

나진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을 뿐.

그렇게 드러난 사내의 몰골은 처참했다. 검게 그을린 갑옷은 군데군데 박살 나 몸을 다 가리지도 못했다. 갑옷의 틈으로 드러난 살갗은 숯처럼 검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몸의 절반이 불에 잡아먹힌 모양새.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잡아먹힌 것은 절반뿐이다.

화상이 남은 것도, 마모된 것도 반절뿐. 그렇다면 남은 절반은 무엇인가? 완전히 마모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망자와는 달리 사내의 눈동자에서는 지성이 느껴졌다. 절반은 인간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진의 질문에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듣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대답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뽑아 든 검을 성화에 가져다 댔다.

성화의 불길이 검에 옮겨붙었다. 검날을 장작 삼아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그게 성화의 불길인지, 아니면 저자의 검기가 가진 형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타오르는 검으로 그가 검례(劍禮)를 올렸다.

나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 검 끝이 하늘을 향하게 했다. 이반에게 배운 검례였다.

검례가 오갔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자신에 대한 소개, 이름, 그 모든 걸 검으로 올린 인사가 대신했으니. 나진이 자세를 잡았다. 남자 역시 자세를 잡았다. 성화를 닮은 검기와 별자리를 닮은 검기가 고성의 꼭대기에서 저마다의 빛을 냈다.

그리곤, 탁.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