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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검을 뽑지 않았다.
사슬이 감긴 대검은 그의 허리춤에 묶여있을 뿐, 칼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대검을 뽑는 대신 들고 있던 창으로 나진을 겨누었다. 나진은 제게 겨누어진 창날을 바라봤다.
독특한 형태의 창이었다. 십자 모양의 별을 위로 길게 늘여둔 듯한 모양이었는데, 일반적인 형태의 창은 아니었다. 찌르기와 베기 모두가 가능한 형태의 창. 나진의 눈동자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탁, 타닥······.
튀어 오른 불씨가 사그라든다. 모닥불에서 새 불씨가 튀어 오르고, 다시 사그라든 순간.
쿵.
나진이 땅을 내려찍었다. 나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혈류와 마나를 가속했다. 검 위로 꽃처럼 피어오른 별자리는 가시덩굴이 되어 나진의 검을 휘감았다. 롱소드의 검날에 검기가 압착됐다.
넓게 퍼뜨린 검기는 마법을 베거나, 막거나, 원거리 무기를 요격할 때나 용이하다. 이렇게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치는 백병전에선 검기를 압축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존재라면 더더욱.
‘검기의 밀도를 올려야 하니까.’
한계까지 압축된 검기. 칼날에선 백색과 금색의 섬광이 연신 번뜩였다. 모닥불이 만들어내는 빛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 섬광. 그 섬광에 투구기사의 몸이 살짝 움직인 순간, 나진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틱.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 남짓.
불씨가 한번 튀어 오르고 사그라들 무렵 나진은 투구기사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진은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그럴만한 상대였으니까.
공기를 가르며 파고드는 칼날.
나진이 느끼기에는 완벽한 일격이었으나.
카아아아아앙!
투구기사가 보기엔 아니었다. 요란스러운 나진의 동작에 비해 투구기사의 동작은 가벼웠다. 가벼웠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창날 위로 피어오르는 회색의 오러가 나진의 검을 완전히 받아냈다.
그리곤, 빙글.
그가 창대를 돌렸다. 십자 모양의 창날에 낀 나진의 검이 창대를 따라 회전했다. 비어버린 몸통. 투구기사가 빈틈을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나진은 양손으로 쥐었던 검을 한손으로 바꿔 쥠과 동시에, 손을 뻗어 투구기사의 발차기를 받아냈다.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각반에 밟힌 손가락이 비명을 질렀지만 견딜 만은 했다.
발차기에 떠밀리는 반동을 이용해 나진이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창날 사이에 끼었던 검이 ‘카가가가각!’ 창날을 긁어내며 빠져나왔다. 검을 빼는 동작, 물러서는 동작,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웠기에, 그 사이에 동작 하나를 더 집어넣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회피에서 이어지는 공격.
원심력이 실린 칼날이 곧장 투구기사를 향해 짓쳐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역시 반격했다. 카앙, 소리를 내며 검기와 오러가 맞부딪쳤다. 반발력에 떠밀린 건 나진이었다. 뒤로 밀려난 나진이 고개를 들었다.
투구기사와 나진의 시선이 교차했다.
한순간에 이루어진 공방. 고작 몇 번의 맞부딪침. 그러나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기엔 충분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투구기사가 창을 두손으로 쥔 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가겠다.”
“얼마든지.”
결투, 개시.
투구기사가 공세로 전환한 순간 나진이 느낀 것은 놀라움이다. 동시에 당황스러움이기도 했다. 나진보다 두 배는 큰 체격이 만들어내는 괴력도 괴력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쿵, 투구기사가 땅을 밟으며 창을 내질렀다.
글로 쓰면 한 문장으로 묘사되는 행동이었지만, 그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에 무슨 과정이 존재하는지 나진의 눈동자는 읽을 수 있었다.
쿠웅, 하는 울림과 함께 땅에 파고드는 발의 깊이. 팔과 어깨를 움직이는 정도. 창날의 기울기와 팔을 뻗는 각도, 그리고 절묘한 힘의 분배. 그 모든 동작이 톱니처럼 맞물렸다. 어느 것 하나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다. 각각의 동작이 완벽하니, 그것들이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일격 역시 완벽하다.
쐐에에에에엑!
뻗어오는 창날 앞에 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일격을 받아낸 순간 떠밀렸다. 그리고, 상대는 일격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작과 동작이 이어진다. 일격 일격이 모여 흐름을 만들어냈다.
캉, 카앙!
검기와 오러가 맞부딪치며 불씨가 튀었다. 나진의 눈앞에도 번갯불이 튀었다. 물리적인 현상이 만들어낸 번쩍임이 아닌, 곤두선 감각이 보내는 위험신호로서의 번갯불이었다.
‘미친.’
나진은 신음했으며 동시에 감탄했다.
빠르게 굴러가는 나진의 눈동자로도 투구기사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어려웠으며, 그 동작을 읽어내는 건 더 어려웠다. 나진의 동체시력과 ‘보는’ 재능을 떠올리면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동작은 한번 보면 간파한다.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해주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으며, 그 동작을 어떤 식으로 행해야 할지 곧장 이해한다. 그것이 나진의 재능이었으며 여태껏 내세운 장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에겐 통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두 번, 세 번은 더 보아야 간신히 이해가 갔다. 이해는 가지만 따라 할 수는 없다. 가히 완벽에 가까운 육체의 통제력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힘의 분배는 아직 나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초월자. 초인.’
소위 마스터(Master)라 불리는, 하나의 무기에 통달한 이들. 그들의 기술을 나진은 아직 따라 할 수 없다. 눈앞의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가 지금은 초월자가 아니라 한들 과거에는 초월자였음이 분명했다.
별과 오러, 검기 따위는 마모된다 한들.
그들이 쌓아 올린 기술이 마모되는 일은 없다.
투구기사의 기술은 완벽했다. 쉴 새 없이 나진을 몰아붙였다. 나진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투구기사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곤, 이어지는 흐름을 끊어내며 반격하기 시작했다. 당하고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
카아아아아아앙!
검기와 오러가 맞부딪치며 반발했다. 나진이 반격을 시작하자 투구기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반격하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대응해 보라는 듯.
나진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쐐에에에엑! 공기를 가르며 뻗어오는 창을 칼을 비스듬히 세워 받아냈다. 창과 검이 닿자마자, 찌르기에서 베기로 전환해 창대를 휘두르는 투구기사의 움직임에 맞춰 검을 비틀었다. 창날이 그리는 궤적을 비틀어냈다.
후웅! 나진의 머리 위로 창대가 지나갔다. 이미 한번 휘둘러진 창날, 그 사거리와 위력이 큰 만큼 일격이 빗나갔을 때 만들어지는 빈틈은 크다. 커야 하지만.
쩌억!
땅을 내려찍으며 투구기사의 창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깨진 갑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곤 그가 팔을 아래로 휘둘렀다. 반원을 그리던 창날의 궤적이 뒤바뀐다. 궤적이 꺾이며 망치처럼 아래로 내려 찍혔다.
공격이 빗나가면 다른 무기보다 큰 빈틈이 생긴다. 그건 창이란 무기가 가진 단점이다. 그 단점을 초월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모를 리가 없으며, 그 단점을 극복할 기술을 마련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쿵! 급히 검을 들어 올려 창을 받아낸 순간 나진의 무릎이 삐걱거렸다. 찍어 누르는 무게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견뎌낸다. 견뎌내고 반격한다.
캉, 카앙!
1초에도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서로가 서로의 동작을 읽으며 다음 수를 생각했다. 그 예측이 맞을 때도, 빗나갈 때도 있다. 그때마다 빈틈을 채우는 것은 임기응변과 순간적인 판단이다.
촤아아아아아악!
공격을 받아낸 나진이 뒤로 쭉 미끄러졌다. 그러나 곧장 자세를 잡고, 다시 투구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건 평소에 나진이 애용하는 전법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숨지 않는다. 지형을 이용하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거리를 벌리지도 않는다. 변수를 노리지 않는다. 오직 정정당당히 정면에서 상대를 마주한다.
이반의 사냥개로 살아가던 전투법이 아닌.
이반의 종자이자 기사로서의 전투법.
열세에 몰리고 있음에도, 상대보다 자신이 약한 게 분명함에도 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직 정면에서 정직하게 투구기사를 상대했다. 그 사실을 투구기사라고 모르지 않는다. 투구에 가려진 얼굴은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 그는 나진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기대감. 흥분.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
목숨이 걸린 싸움이다. 핏물이 튀어 오르고 뼈가 부러지며 살을 찢는 야만적이기까지 한 전투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 어떠한가?
이건 결투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행한 결투.
정정당당히, 명예롭게, 긍지롭게 서로를 마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결투를 야만스럽다고 말하겠는가? 두 사람이 진지하게 결투에 임하는 동안 이것은 신성한 결투였다.
카아아아아아앙!
변수 없는 싸움은 없다. 승패는 사소한 부분에서 갈린다. 전력을 다해 맞부딪친 끝에, 상대를 굴복시키는 싸움이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수많은 무인과 기사들은 그런 싸움을 바란다.
그렇기에 결투가 있는 것이다.
쿵, 쿠웅.
돌무더기가 무너지며 시야가 가려진다. 그 흙먼지가 걷힐 때까지 나진과 투구기사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무기를 휘둘러 흙먼지를 걷어냈을 뿐이다. 걷히는 흙먼지 너머로 서로의 행동을 확인한 두 사람은 웃음 섞인 숨을 뱉어냈다.
그리곤, 다시 창과 칼이 오간다.
미련하다. 유치하기까지 한 싸움이다.
그리하라고 정해둔 규칙 역시 없다. 암묵적인 규칙, 당장 어겨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그런 규칙. 목숨이 걸린 전투였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규칙을 준수했다.
누군가 보면 멍청하다고 비웃을 것이며,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할 만한 싸움이었지만······ 본래 기사도란 그런 것이다. 명예와 긍지, 그리고 낭만은 유치함과는 한 끗 차이다.
이건 결투다.
남들의 시선이 무엇이 중요한가. 눈앞에서 창을, 검을 맞부딪치는 상대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캉!
두 사람은 서로의 검기를 본다.
카, 가가가가각!
나진의 검기는 새하얗게 빛나는 선과, 선과 선을 잇는 금색이 반짝이는 검기. 별자리를 닮은 검기다. 세월에 마모되지 않은 검기는 찬란히 빛났다.
쿠웅!
그에 비해 투구기사의 오러는 회색이다. 잿빛이었다. 세월에 찌든, 수많은 것들을 경험한 나머지 빛이 바랜 오러는 낡고 녹슨 갑옷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진의 검과 맞부딪칠 적 그의 오러는 처연히 빛났다.
마치, 아직 나는 빛날 수 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이걸 받아내?’
‘아직입니다. 고작 이걸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술을 펼쳤다. 투구기사는 나진이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기술을 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는지 보겠다는 듯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졌다. 그 줄타기가 이어지고 이어졌을 어느 무렵, 투구기사가 호흡했다.
공기가 역변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세를 보였다. 나진은 직감했다. 큰 기술이 올 것이다. 나진은 눈을 부릅뜨고 투구기사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그가 땅을 내려찍었다. 두 손으로 창을 쥔 채 제 옆구리에 창을 끼웠다. 자세를 낮추고 창대를 쥔 손을 비틀었다. 그의 갑옷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으며, 근육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한계까지 힘을 압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압축된 힘이 해방됐다.
투구기사가 창을 내질렀다. 그 동작을 나진은 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빨랐기에. 마치 물기를 쥐어짜 내듯 전신을 비틀며 앞으로 뻗은 창날. 압축된 힘이 창날의 끝에서 터져 나왔다.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인 찌르기.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술.
그러나, 마스터 급의 무인이 선보이는 기본(基本)은 조금도 단순하지 않다. 그가 쌓아온 무(武)의 정수가 창끝에 실려있으니.
쐐에에에에에에엑!
창날에 공기가 휘감겼다. 창에 묶인 깃 장식들이 회오리치듯 휘감겼다. 창날은 회전하지 않았지만 휘감긴 공기가 회전을 만들어냈다. 나진은 그 일격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검신을 세워 받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
창끝에서 터져 나오는 폭풍과 나진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나진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나진의 시야가 급변했다. 주변에 가득한 바위들이 빠르게 나진의 시야에서 이탈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투구기사가 멀어졌다.
그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나진이 뒤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콰아아아앙!
한참을 날아간 나진이 큼지막한 바위에 처박혔다. 바위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가운데 나진은 커흑, 하고 막힌 숨을 토해냈다. 등이 시큰했다. 어깨와 팔, 그리고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부러진 게 분명했다.
으득.
이를 악문 채 나진이 돌무더기를 치우고 일어섰다.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응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투구기사가 나진을 향해 창을 뻗어오고 있었다.
나진은 검을 세웠다. 부러진 팔로 쥔 검은 흔들렸다. 흔들리지 않게 나진은 검면에 제 팔을 갖다 대 보강했다. 이렇게 막아내더라도 팔 하나가 더 부러질 뿐이겠지만, 몸에 바람구멍이 뚫리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다음은.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나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 고민은 무의미했다.
다음 공격이 오지 않았으니. 투구기사의 창은 나진의 검 앞에 멈춰 있었다. 나진이 눈을 깜빡이며 투구기사를 바라보자 그가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가 이겼군.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가 나진에게 턱짓했다. 패배를 시인하라는 신호였다. 투구기사가 뭘 말하고 있는지 깨달은 나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결투가 생과 사를 가르지는 않는다.
전력을 다한 결과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면 결투는 거기서 끝이 난다. 굳이 삶과 죽음으로 가르지 않더라도 승패가 갈렸으니.
나진이 투구기사의 사냥을 결투로 바꿔버렸듯, 투구기사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투를 명예로운 승부로 바꿔버린 것이다.
“예, 제가 졌습니다.”
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내렸다. 투구기사 역시 창을 내린 뒤 나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붙잡고 나진은 일어섰다.
결투의 끝에 남은 것은 사냥감과 사냥꾼이 아니다.
죽은 자와 산 자도 아니었다.
단지 승자와 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