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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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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자르칸의 목이 베였다.

자신을 지탱해 줄 목을 잃은 머리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에 추락했다. 조금 전 자르칸의 주문으로 인해 녹아내린 땅은 흐물흐물했고, 자르칸의 머리는 저항 없이 ‘철퍽’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혔다.

그것이 자르칸의 최후였다. 100년을 넘게 살아온 흑마법사의 최후는 초라했다. 세상에 초라하지 않은 죽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자르칸의 최후는 다른 인간들의 죽음보다 조금 더 초라했다.

파스슥.

머리를 잃은 자르칸의 육신이 바스러졌다.

인간은 죽어서 육신을 남긴다. 그러나 악마와 거래한 이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 영혼과 육신은 일찍이 거래의 대가로 바쳐졌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죽음. 그것은 신념을 버리고 쉬운 길을 선택한 대가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론 네가 옛날에 베었던 악마기사가 운이 좋은 편일 수도 있겠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은 말했다.

-그놈은 시체라도 남겼으니까.

엑스칼리버로 죽였던 베른하이겐.

엑스칼리버는 베른하이겐과 계약했던 악마 그 자체를 베어버렸다. 계약이 무효가 됐으므로 베른하이겐은 인간으로 죽을 수 있었다. 나진과 만난 게 그의 불행이었다면, 나진과 만났기에 인간으로 죽을 수 있던 게 그의 행운이었다. 멀린은 그렇게 말했다.

‘그거 행운 맞아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나진이 짧게 검을 털었다.

어찌 됐든 나진은 승리했다. 엑스칼리버를 꺼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다. 제 성장을 체감하며 나진이 괜스레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의 시야 끄트머리에서 빛이 짧게 점멸했다. 난전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니, 저걸 살아남았다고 봐야 할까? 과다출혈로 죽어가던 흑마법사 하나가 나진에게 지팡이 끝을 겨누고 있었다.

나진이 곧장 대응하려던 순간이다.

싹둑.

흑마법사의 몸이 갈라졌다. 한줄기의 선이 흑마법사와, 그가 숨어있던 건물의 잔해를 양단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땅이 일(一)자로 파였다. 소리는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음속을 뛰어넘어 쏘아진 검기. 저 고성의 꼭대기에서 수백미터를 가로질러 쏘아진 검기였다. 움직이려다가 멈춘 어정쩡한 자세로 나진은 눈을 깜빡였다. 두 눈으로 보고도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 광경이었다.

‘근래 자주 느끼는 건데 말입니다.

-응.

‘소드마스터랑, 소드 시커 차이의 격차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초월자가 괜히 초월자겠어? 소드 시커에서 소드마스터까지 오르는 과정을 괜히 세 가지로 나눠둔 게 아냐. 사실상 단계가 세 개 정도 사이에 껴있는 거거든.

발아(發芽), 개화(開花), 만개(滿開).

소드 시커가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세 가지의 과정.

-그 왜, 로젤린 아스칼로? 너랑 친한 용병단장 하나 있잖아. 걔도 소드 시커인데 같은 소드 시커 상대로 3대 1로 회 떠버렸잖아? 차이점이라곤 발아를 거쳤다는 것 하나뿐인데.

‘그랬었죠?

-그런 거야. 단계를 하나 오를 때마다 같은 경지라고 보기가 힘들어지는 거지.

그 뒤로도 멀린은.

‘마법사도 똑같은데, 아 마법사의 서클 하니까 말인데? 이 마법사의 서클이란 게 사실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거든. 그 개념을 정립한 게 어느 천재 마법사인데, 그게 누구냐면 바로 지금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나진은 언제나처럼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고 있자니 저 멀리서 ‘탁’ 하고 소리가 들렸다.

성채의 꼭대기에서 도약한 유엘이 나진의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 착지는 자르칸이 보여줬던 요란스러운 착륙과는 달리 우아했다. 새하얀 머리칼이 조금 흔들렸을 뿐, 그 옷깃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수고하셨습니다.”

그녀가 나진을 바라봤다.

인형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나, 그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손뼉을 쳤다.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훌륭한 전투였습니다. 제 주신께서도 당신에게 엄지를 내밀고 있군요. 특히, 시원하게 머리를 쪼개버리는 장면이 좋으셨다고 길고 상세한 묘사를 하고 계시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 이야기도 전하도록 하지요. 예? 예, 예······.”

유엘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짧게 말했다.

“시끄럽습니다. 닥치십시오.”

“예?”

“아, 당신이 아닙니다. 제 귀에 속삭이는 제 주신께 말한 것입니다.”

벌레를 쫓듯 제 귀를 탁탁, 손바닥으로 때리는 유엘을 보며 나진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 나진의 귀에도 멀린이 몇 번째일지 모를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사시사철 옆에 붙어 쫑알거리는 성좌와 함께하는 사람은, 성좌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방법을 터득하기 마련이다.

여기 유엘과 나진이 그 예시였다. 두 사람은 제 귀에 들리는 별의 목소리를 가볍게 씹어주며 서로를 보며 대화를 나눴다.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런 식의 전투를 즐기시나 봅니다. 지형지물을 활용한 전투. 변수를 창출하는 전투 방식, 저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진 그런 전투를 즐겼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유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소드 시커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걸로 압니다. 그런데 벌써 그만한 성취라니? 조금 더 당신의 전투를 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예?”

“아직, 전력을 내지 않지 않았습니까? 무언갈 숨기고 있는 듯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소드마스터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유엘이 나진을 힐끗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예.”

“저와 결투 한판 어떠신지?”

“···대련이 아니라 결투를 말하시는 거 맞죠?”

“예. 저는 제 자제력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검성처럼 힘을 잘 조절하며 대련할 자신은 없군요. 검기를 제한하긴 하겠다만, 그래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 확신하진 못하겠습니다.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건 대련이 아니니 결투를 해야겠지요?”

그리 말하며 유엘이 나진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이지 투명한 시선이었다. 기대감이 뚝뚝 묻어나오는 것 하며, 그 시선 너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들여다보인단 점에서 그랬다.

‘네 밑바닥을 보고 싶은데 결투 한판?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한판?

나진의 귀에는 유엘의 말이 대충 그런 식으로 해석됐고, 나진은 자살희망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떠신지?”

“사양하겠습니다.”

“아쉽군요.”

유엘이 탄식했다.

진심으로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일찍히 흑마법사를 곰팡이에 빗대어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진이 보기에는 그것참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야 흑마법사들을 소탕하는 작전이 곰팡이를 치우는 작업과 비슷했으니까. 단순히 벽지(도시)를 불법으로 점거한 곰팡이(흑마법사)를 다 닦아낸다고 청소는 끝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벽지를 뜯어내고 판자를 들어낸다. 습기를 먹은 목재는 교체한다. 혹은, 환기를 시켜 집안의 습기를 날린다.

흑마법사를 소탕한 뒤 펼치는 작업도 똑같다. 그들이 남긴 연구자료를 모조리 불태운다. 그들의 공방을 파괴하고 연구시설을 무너트린다. 그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같은 위치에 새로운 흑마법사들이 ‘여기가 그 연구자료를 날로 먹을 수 있는 명당인가요?’라고 외치며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찍히 제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7서클의 흑마법사 ‘케팔론’이 남긴 공방이 그의 후배들을 위해 요긴히 쓰였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외륙으로 떠난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진은 유엘과 걷고 있었다.

유엘은 걸으며 적당히 검을 휘둘렀는데, 그녀가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흑마법사의 연구시설로 추측되는 건물이 ‘쩌억’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예, 별들의 전장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쪼개진 건물은 무너져 내리며 잘게 해체됐다. 유엘이 검을 휘두른 자리에는 고운 먼지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의하십시오.”

외륙은 위험한 곳이니 주의해라.

그런 식의 누구나 할법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초월의 경지에 올랐고, 외륙을 떠돈 적이 있으며, 지금도 틈이 나면 외륙에 걸음 하는 어느 소드마스터는 말했다.

“외륙. 세상의 바깥. 그곳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당신은 의심받게 될 겁니다.”

“의심이라뇨?”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입니다. 당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고 표현해도 되겠군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진이 눈을 깜빡이자 유엘이 덧붙였다.

“당신은 앞으로 늙지 않을 겁니다. 그 사실은 알고 있으십니까?”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면 노화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예,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무인이나 마법사는 늙지 않습니다. 노화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완전한 불사는 아니나, 최소한 늙어 죽는 일은 없는 한없이 불사에 가까운 존재로 탈바꿈합니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은 이를 부정합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는 명백한 오류에 해당합니다. 태어나고, 죽고, 자연에 환원되고,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섭리입니다.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저나 당신이나 ‘잘못된’ 존재인 겁니다.”

오류(誤謬). 잘못되고 그릇된 것.

그릇되어서,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그러니 배척합니다. 밀어냅니다. 세상의 바깥으로.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외륙입니다.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죽었어야 할 이들이 살아있는 곳’ 이 되겠지요.”

저승에 한없이 가까운 곳.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외륙은 세상이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하는 장소라고.”

“하지 못했던 일이라면······.”

“죽지 않는 이들의 죽음.”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멈춰서서, 나진을 빤히 바라봤다.

“초월자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 아십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초월자는 평범한 수단으로 죽지 않습니다. 대륙에서라면 몰라도,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외륙에서는 한없이 불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죽음’에 해당합니다.”

물리적이지 않은 죽음은?

유엘이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제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 제 이야기를 부정하는 순간. 그리하여 자신(自身)을 자신(自信)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초월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가 가벼이 검을 휘둘렀다.

건물이 쪼개졌다. 해체되고 바스러졌다.

“외륙에서 자신을 부정한 존재는 육신이 마모되고 뒤틀립니다. 인간이 아닌 짐승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곤 끝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망각이지요. 그때 비로소 초월자는 죽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별들이 환하게 타오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아닐 겁니다. 누군가 자신의 별을 바라보고, 별에 담긴 위업을 곱씹을 때마다 성좌들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낍니다. 자신을 갉아먹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니, 하고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자신을 봐 달라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별들이 내뿜는 빛은 그리 애원하는 것에 가깝겠지요.”

나진은 문득 멀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진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멀린이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성좌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위대한 존재들이 아니야. 네 생각만큼 숭고한 존재들이 아니며, 어쩌면 너희보다 더 추악한 존재들이기도 해.」

「외륙에, 캄란에 발이 묶인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은 여정의 다음을 갈망하는 이들이지.」

그 말의 뜻이 이거였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진의 시선을 느낀 멀린이 입을 열었다.

-저 애가 말한 게 전부는 아니야. 저게 외륙의 전부가 아니고, 별이 빛나는 데도 다른 이유는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멀린이 쓰게 웃었다.

-대부분의 별은 그래. 영웅이었지만 영웅이 아니게 된 별들이 한가득하니까.

‘나쁘지 않네요.

-뭐?

나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짜들 사이에서 진짜는 더 아름답게 빛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나진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던 멀린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또 만족스러워서.

우뚝.

멀린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유엘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곤 나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이 놀랍군요. 대부분의 이들은 100년쯤 살았을 때 외륙으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늦어도 120살쯤 됐을 땐 외륙으로 향하죠. 그때부턴 대륙에 서 있으면 몸이 마모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진은 아직 18세에 불과하다.

외륙으로 떠나기엔 이른 나이.

그 이야기를 듣던 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20살부터 마모가 시작된다면, 유엘 님은 어떻게 아직 대륙에 계신 겁니까?”

나진이 기억하기로 유엘의 나이는 최소 150살이었다. 역사적인 기록만으로도 150년이며, 기록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면 200년쯤 됐을 거란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120살부터 마모가 시작된다면 유엘은 어떻게 아직도 대륙에서 활동하는가?

“아, 저는 예외입니다.”

그 질문에 유엘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저는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라 참고가 되진 않겠습니다만, 저는 단순하게 세상을 삽니다. 단순하게 살아가니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자신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지와 망각은 축복이라는 격언을 실천하며 살고 있지요.”

유엘이 나진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전 당장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세상의 구원, 검술의 신묘한 묘리, 비원, 소원, 원대한 목표 같은 게 딱히 없습니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아마 그 때문에 마모가 찾아오질 않는 것 같더군요.”

그 대답을 옆에서 듣고 있던 멀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답이 없다는 것처럼.

-나도 정확한 방법은 몰라. 쟨 우리들의 입장에서 봐도 별종이니까.

성좌들의 입장에서 봐도 별종 중의 별종.

대륙에서는 살인귀에 학살자 취급에, 외륙에선 별종 취급이라. 나진은 무심코 웃고 말았다.

“아무쪼록.”

어느덧 발더노스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도시의 정리는 끝났다. 소탕전은 종료됐다. 정문의 앞에 멈춰서서, 한 발짝 앞선 길에서 나진을 바라보며 유엘은 말했다.

“외륙에선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흔들고, 의심하며, 망가트리려 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니면, 하고 그녀가 웃었다.

“저처럼 단순해지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아쉽군요. 동족을 만들 기회였는데.”

그리 말하는 유엘은 딱히 아쉬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

마차를 타고 떠나려던 나진에게 유엘이 ‘아’ 하고 짧게 외쳤다. 나진이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유엘이 입을 열었다.

“이걸 까먹을 뻔했군요.”

유엘이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10개의 별로 이루어진 거대한 별자리가 하나 있었다. 하나의 색이 아닌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마치 폭죽과도 같은 별.

그 별을 가리키며 유엘이 말했다.

“외륙에선 환락제를 조심하십시오.”

환락제(歡樂帝).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유엘이 제 옷깃을 풀었다. 노출이 거의 없는 교단 정복의 어깨 자락이 흘러내리고, 유엘의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그곳엔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유엘이 말했다.

“외륙에서 가장 위험한 이를 뽑으라면, 단연코 그자가 뽑힐 겁니다. 이 흉터 역시 그자가 남긴 겁니다. 그러니 그자와 만난다면 도망치십시오.”

유엘이 덧붙였다.

“광대가 되기 싫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