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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엘 라지안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두 개의 별을 얻었다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외륙으로 향한다 들었는데, 그 전에 저와 악마 사냥 한탕 어떠신지?」
세 줄로 요약한 내용이 아니라 저게 편지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부 여백이었다. 과거 유명한 수학자가 ‘나는 이를 증명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겠다’ 라는 말을 남겼었는데, 그 수학자도 유엘의 편지를 본다면 그 자리에서 논문 한 편을 써 내렸을 게 분명했다.
그만한 여백이 있었다.
큰 종이에 적힌 거라곤 세 줄의 문장 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뒷면을 돌려보면 지도가 하나 그려져 있긴 했다. 지도에는 여러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추신이 적혀 있었다.
「번거로우니 길게 적지 않겠습니다.」
「근처 교회에 이 편지를 보여주면 안내해 줄 것입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적힌 대로 했다.
유엘의 편지를 들고 나진은 모험가 도시에 하나 있는 교회로 향했는데, 교회의 수녀는 나진이 들고 온 편지를 보자마자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잠,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수녀는 어디론가 향했고 머지않아 그녀와 함께 달려온 목사가 편지를 확인했다. 그 노인 역시 수녀와 마찬가지로 눈을 부릅뜨더니 어딘가로 연락을 걸었다. 정확하게 같은 장면이 몇 번 반복됐다.
그 뒤로는 글쎄······ 나진은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성직자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진 앞에는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사제들의 옷에는 핏빛 자수가 새겨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단심문관들이었다.
“당신이 나진입니까?”
몇 가지 질문. 그리고 편지를 확인한 사제들이 곧장 나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치 상급자를 대하는듯한 태도였다.
“모시겠습니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몰고 온 마차에 나진은 올랐다.
태워다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진이 마차에 타자 이단심문관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 나진 님?”
“예?”
어느샌가 호칭은 나진 ‘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편지는 언제, 어떻게 받으셨는지······.”
“오늘 아침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나진이 그리 답하자 이단심문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유엘이 보낸 편지는 성혈 교단을 거쳐 나진에게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직통으로 나진의 우편함에 꽂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성혈 교단 입장에선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보통 교단의 처형인쯤 되는 거물이 움직일 땐 교단을 중간에 끼고 움직이게 된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넣을 때도 마찬가지고. 이는 처형인은 대사제와 함께 교단을 대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은 몸짓, 사소한 말 한마디가 교단 전체를 대변하는 의견이 될 수도 있어서라던가? 그래서 교단의 처형인이나, 성육신, 등대지기 같은 이들은 언동에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유엘 라지안은 조심하지 않았다.
더불어 남들이 뭐라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그걸 왜 신경 써야 합니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지켜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라는 태도를 고수했고, 이번에 나진에게 던진 제안도 교단과는 일절 상의 없이 이루어진 그녀의 독단이었다.
하지만 독단이면 또 어떠하랴.
교단의 처형인께서 그리하시겠다는데.
그 누가 그녀의 말에 이견을 제기하겠는가?
결과적으로 성혈 교단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나진의 편의를 봐주는 것 뿐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이 나진에게 깎듯이 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가는 길 편히 모시겠습니다.”
“예?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처형인 님의 손님이시지 않습니까? 당연한, 정말 당연한 일입니다.”
눈앞의 소년은 교단의 처형인에게 직접 초대를 받은 교단의 귀빈이었으니까. 유엘에게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편지였다. 물론 나진이 그를 알 턱이 없었다.
‘악마 사냥이라. 흥미롭네요.’
-그러게? 무슨 악마일지 궁금하네.
졸지에 악마 사냥에 따라가게 된 이단심문관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나진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좋은 기회다.’
그야 유엘의 제안을 좋은 기회라 여겼으니까.
외륙의 깊은 곳으로 떠나기 전에 굳어 있는 몸을 풀 기회. 그리고, 별을 얻으며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확인하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진은 멀린과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었기에.
‘성혈 교단은 왜 악마를 사냥합니까?’
-걔네 주신이 악마를 싫어해서.
‘악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
-음, 단순히 싫어하기보단 뭐라 해야 할까. 혐오? 증오? 경멸? 아무튼 세상에서 악마라는 종(種)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싶어 하는 여자야.
멀린이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금이야 뭐 ‘가시덩굴의 순교자’ 같은 얌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내 시대 때는 걔 ‘악마가 보이거든 게거품을 무는 자’ 정도로 불렸어. 다른 이름으론 ‘악마의 피와 살로 목욕하는 자’, ‘악마 살해자’, ‘악즉참’ 정도였을까.
다소 과격한 이명들이었다.
나진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멀린이 말했다.
-나와 아서가 악마가 인류에게 해로워서 토벌하고 다닌 거라면, 걘 그냥 악마가 싫어서 악마를 죽이고 다녔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고.
‘이유?’
-응. 걔 원래 라펠리였나? 대충 그런 이름의 작은 나라의 공주님이었는데, 악마 때문에 걔네 나라가 쫄딱 망했어. 국민 태반이 악마 계약자로 변했고, 남은 이들도 악마 추종자가 됐거든.
그러고 보니 역사서에서 본 것 같긴 했다.
라펠리, 일천년 쯤 전 악마에 의해 멸망한 국가. 악마의 위험성과 악마를 소환하려는 흑마법사들을 잡아 족쳐야 할 이유를 말할 때 꼭 소개되는 예시였다.
‘싫어할 만하네요.’
-그치? 근데 재밌는 건 이 다음이야.
‘다음이요?’
-그래. 그 다음에 걔가 어떻게 했게?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멀린은 히죽였다.
-죄다 죽였어.
순간 ‘예?’ 하고 육성으로 터져 나올 뻔한 목소리를 나진은 간신히 참아냈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멀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3만 명 정도였던가? 그 3만명의 악마 계약자를 전부를 죽였어. 그것도 혼자서 말야. 악마와 계약해 국외로 도망친 애들까지 전부 잡아다 죽였지. 10년에 걸쳐서 단 한 마리도 빠트리지 않고.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그 피로 물든 역사가 끝났을 무렵, 그 여자는 성좌가 돼 있었다고 멀린은 말했다. 비록 악마의 손에 떨어졌지만 역사서에서 라펠리를 악마 추종국으로 기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악마의 피로 씻어냈으니까. 수많은 악마와, 악마 추종자들의 시체 위에서 별이 태어났으니까. 라펠리는 성지가 됐지.
별이 태어난 장소인 성지(星地)이자.
성혈 교단의 성지(聖地)인 셈이었다.
-아서랑 마왕 때려잡을 때였나? 한참 싸우다가 옆을 봤더니, 웬 처음 보는 애가 마왕 배때기를 쑤시고 있더라고. 넌 누구니? 하고 물었더니 ‘악마. 죽인다.’ 하고 답하더라. 그래서 ‘응, 동료구나.’ 하고 같이 싸웠지.
나중에 알고 보니 걔가 걔더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멀린이 어이없단 듯이 말했다.
-여러모로 정신 나간 아이야. 학살자고. 악마를 죽이는 거 말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아이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성혈 교단의 주신이 됐습니까?’
-그 아이가 내세운 교리가 단순하니까. 너 앞에 앉아있는 애한테 물어봐. 천 년 전하고 크게 안 바뀌었을걸?
나진은 제 앞에 앉아있는 이단심문관에게 질문했다.
“성혈 교단의 교리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악마를 죽여라. 악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워라. 이 세상에서 악마란 종의 뿌리를 뽑아라. 네가 어떤 신분이던, 무슨 짓을 저질렀든 주신께선 신경 쓰지 아니하신다. 그분께서 네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가 제 심장을 쿵, 하고 주먹으로 쳤다.
“네 심장이 뛰는 한 악마를 쳐 죽여라.”
이상입니다, 하고 이단심문관이 말을 마쳤다.
그 눈동자에서 은은한 광기가 느껴졌다.
-저것 봐. 사실 걘 종교를 만들 생각도 없었을걸? 그냥 악마를 죽이고 싶었고, 혼자선 다 죽일 수 없으니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만들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종교가 만들어진 거지.
악마에 대한 증오.
그것만큼이나 단순하고 강렬한 신앙이 없으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멀린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악마에게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겠지. 성혈 교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주신이 아직까지도 그 아이인 건 말야.
가시덩굴의 순교자.
그것이 잘 알려진 성좌 명이었지만,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이들은 지금의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고 멀린은 말했다.
-천 년 동안 타오르는 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타오를 불.
이 세상에서 악마란 종족을 모조리 태워버리기 전까진 사그라지지 않을 증오의 불길. 그렇게 설명하는 멀린의 표정은 어딘가 초연해 보였다.
-뭐, 남 이야기는 아니네.
그녀가 웃었다.
-나도 나락의 마녀, 그년 멱을 따버리기 전까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며칠간 이동한 마차가 멈춘 곳은 외륙 경계선에 걸쳐있는 어느 도시였다.
발더노스, 잊힌 국가의 도시.
본래는 외륙 경계선에 근접한 도시였지만 300여년 전, 경계선이 확장되며 발더노스는 도시의 7할 정도가 외륙에 삼켜졌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모든 주민이 증발하듯 소멸했고.
물론 주민들만 증발했을 뿐, 건물은 멀쩡히 남아있었지만··· 외륙에 절반 이상이 삼켜진 도시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발더노스는 유령도시가 됐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란 더없이 좋은 주거지쯤으로 해석되는 법이다. 하물며 외륙과 인접해 있으니 불러오기도 훨씬 수월하다던가? 여러 조건이 맞물려 발더노스는 흑마법사들에겐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했다.
그 사실을 성혈 교단에서 모를 리 없다.
성혈 교단은 주기적으로 발더노스의 동향을 살폈다. 그 와중에 흑마법사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악마 소환의 흔적마저 발견됐으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큰 문제에는 당연히 큰 무력이 나서는 법이다.
교단의 비대칭전력, 유엘 라지안.
그녀가 발더노스로 향한 게 얼마 전의 이야기.
여기까지가 이번 작전의 뒷배경이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예, 그럼 작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이곳에 파견된 인원은 처형인님뿐입니다. 이번 소탕 작전은 처형인님 단독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변동이 생겼군요.”
작전지에 도착한 이단심문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지도에 그려진 기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엘 님께선 이곳과 반대편, 외륙의 안쪽에 있는 발더노스의 후문에서 돌입하실 겁니다. 그리고 나진 님께선 저 앞의 정문으로 돌입하게 되시겠죠.”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았다.
유엘은 후문에서 정문 쪽으로. 나진은 정문에서 후문 쪽으로 나아가며 눈에 보이는 흑마법사들을 소탕하면 된다고. 그리 작전을 진행하다 보면 외륙의 경계선쯤에서 유엘과 만나게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설명이야 간단하지만.’
나진이 고개를 들었다.
외륙과 대륙을 가르는 경계선, 불투명한 막으로 나누어진 도시를 나진은 바라봤다. 막의 너머는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도시의 크기만 해도 제법 됐다.
말만큼 쉽지는 않겠군.
그리 생각하며 나진이 몸을 풀었다.
“돌입 준비를 마치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그때 유엘 님께 신호를 보내겠······.”
“됐습니다. 준비.”
“예?”
주섬주섬 성수니, 신성이 발린 은제 무기 따위를 준비하던 이단심문관이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은 가볍게 몸을 풀며 답할 뿐 어떠한 준비도 한 것 같지 않았다.
“저, 나진 님? 외람되오나 발더노스는 외륙에 잠식된 도시입니다. 외륙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으며, 외륙에선 육체의 마모가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충분한 준비를 하시지 않으면······.”
“그건 우리 이야기고. 저분은 필요 없을 거다.”
이단심문관 하나가 부하의 말을 끊었다.
그가 눈짓으로 나진을 가리켰다. 나진은 그 눈빛에 호응하듯 제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로 떠오른 두 개의 별이 빛났다.
“아.”
이단심문관이 짧게 탄식했다.
이윽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진에게 숙인 것은 아니었다. 저 하늘 위에서 이곳을 보고 있을 제 주신에게 그는 기도를 올렸다.
반짝.
그의 기도에 답하듯, 저 하늘 위에 걸려있는 여덟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가 빛났다. 가시덩굴의 순교자가 기도에 답했다.
“나진 님?”
“예?”
“귀를 막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여있던 이단심문관들은 모두 몸을 숙인채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진은 그렇게 했다.
얼마 안 가 나진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조금 전 이단심문관은 제 신에게 기도를 올려 작전의 개시를 알렸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시 신을 통해 그녀의 대전사인 유엘에게 전해졌다.
작전 개시.
신호를 받은 유엘 라지안이 움직였다.
저 멀리, 외륙과 대륙을 가르는 경계선의 너머, 거대한 도시를 가로지른 정반대의 입구. 나진과 유엘 사이에는 도시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지만.
나진은 알 수 있었다. 유엘이 움직였단 사실을.
딱히 나진의 감각이 예리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 움직임이 너무 거대한 까닭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비명을 닮은 소리. 그 소리는 외륙의 경계선을 뛰어넘고, 도시마저 가로질러선 수천미터의 거리를 무시하곤 나진의 고막을 울렸다.
소리가 먼저였고 현상은 그다음이었다.
외륙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막이 요동쳤다. 흔들리는 경계선의 너머, 흐릿한 막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시가 해체되고 있었다.
한 명의 인간과, 한 자루의 검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