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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과 만날 일이 있다면 우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라는 말이 있다. 혀가 즐겁고 배가 차면 사람의 정신은 말랑해지기 마련이니까.
한동안 요리를 칭찬하며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배가 어느정도 찼는지 식기 속도를 조금 늦춰 캐서린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대화의 주제가 요리에서 대화로 옮겨가자 카렘은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처음의 날카로웠던 분위기는 장난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카렘은 여전히 적응되지는 않았다.
높으신 분과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피로가 쌓였다.
그것만큼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똑같았다.
손님들의 관심에서 슬쩍 멀어진 카렘은 잠깐의 여유를 즐기며 조금 전에 손님들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윈터센드.
전사신 투타티스가 신으로 승천한 날을 축하하는 삼신교의 기념일.
아이스랜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축제와 행사를 벌인다고 들었다.
그 이상으로 자세한 건 몰랐다.
대화의 주제가 옮겨갔으니까.
하지만 카렘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 관심사가 집중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카렘은 되도록 관심이 자신에게 옮겨지지 않았으면 했다.
시선이 집중될 때마다 위장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니까.
이전처럼 눈이 뒤집힌 건 아니지만, 요리들이 마음에 드는지 고드윈과 빅토르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식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요네즈.
과연 손님들이 극찬하던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카렘은 여러 차례 마요네즈 리필하러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카렘은 팔이 저릿저릿하다 못해 슬슬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손님들은 도통 만족할 줄을 몰랐다.
"후, 정말 알리시아가 왜 그리 극찬했는지 알 것도 같은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그 마요네즈라는 소스를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로군. 카렘."
이어진 고드윈의 말에 카렘은 경악하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추운 지방일수록 기름진 음식을 본능적으로 원한다고 하더니 보관하고 있던 대부분의 달걀과 기름을 먹어치울 줄이야.
하지만 손님은 요구했고 주인은 허락했으니 카렘은 묵묵히 따랐다.
카렘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마요네즈를 커다란 그릇 가득 만들어 뚜껑을 닫아 내오며 주의사항을 말했다.
"물이 얼지 않는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밀봉해서 보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안 상합니다."
"응?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네?"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모조리 먹어치울 것 같거든."
마요라냐.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것 같은 그 모습에 카렘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카렘은 캐서린과 메리를 따라 손님을 배웅했다.
고드윈과 빅토르가 눈의 장벽 너머로 사라지자 카렘은 그제야 참았던 깊은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내뱉었다.
"후우우. 긴장하느라 죽는 줄 알았네요."
"알리시아 공녀님에 공작님까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야 높으신 분이라고요?"
물론 카렘의 긴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중세에 귀족이나 기사, 하다못해 유력자의 눈에 잘못 들었다가 신세가 망가지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학연, 지연, 혈연의 덕을 본다면 계급의 경계를 흐리거나 반등할 수도 있기에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카렘의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캐서린이 말을 걸었다.
"뭘 걱정도 많구나. 넌 내 전속 요리사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준귀족이 된거나 다름없다. 좀 더 당당하게 돌아다녀라."
"예? 준귀족이요? 제가 언제부터요?"
"그야 윈터홈에 입성했을 때부터지."
그렇게 말해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전생은 공식적으로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았고, 마을을 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높은 사람이라고는 촌장과 사제, 가끔 찾아오는 세금 징수관이 전부였으니까.
카렘은 뭔가 귀족이 됐다고 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지, 짐작가는 것은 하나 있었다.
"그러고보니."
"뭐냐."
"전에 드라이우드 마을의 사람들이 맨날 저한테 존댓말을 하고 나리라고 불렀었죠."
카렘은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촌장과 그 아들, 마을 사람들이 쩔쩔매던 이유를.
그런 카렘을 보고 캐서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넌 이미 훌륭한 귀족이다. 아니, 준귀족이라고 해야할까. 이제 다른 귀족 가문의 양녀나 삼녀, 사녀랑 결혼하고 공만 좀 세우면 하급 귀족이 될 수도 있겠구나. 관심있나?"
"음."
딱히?
아니 진짜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관심 없었다.
아니 정말로 관심이 아니라, 너무 막연하고 처음 받는 대우라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뭐,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죠 뭐. 지금의 저는 이렇게 요리나 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는게 딱입니다."
"흐, 평화라. 이미 조용히 지내기는 글렀지 않느냐."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림도 없다는 말에 카렘의 두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자 메리가 조목조목 짚었다.
"시작은 알리시아 공녀님이로군요. 공녀님의 말을 들은 펠윈터 공작님이 관심을 보였고, 이젠 후계자이신 고드윈 공자님이 직접 찾아왔는데."
"아."
"조용히 산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카렘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현실로 치자면 재벌 가문의 막내딸이 그렇게 부르짖는 바람에 회장이 관심을 보이고, 차기 회장이 직접 찾아온 상황이나 마찬가지.
평소에 관심이 없던 이도 관심을 기울일 사안이었다.
그런 카렘의 생각에 못을 박듯이 캐서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축하한다. 넌 오늘부로 공작가의 그 누구보다도 관심을 받는 유명인이 됐다."
"젠장, 혼자 밥도 못 먹는 여마법사를 밥먹이는 내 평화로운 일상이!"
"어허. 쓰흡. 단어.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어감이 이상하잖나."
그리고 메리가 발끈했다.
"또, 또, 또! 계약자의 식사를 보조하는 건 카렘 후배. 당신이 아니라 접니다!"
"아니 여기서 갑자기!?"
"흥, 그런 식으로 저의 경계심을 없애려 하다니. 이러니까 제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겁니까?!"
"그렇게 말해도 저는 결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겁니다! 혼자 밥도 못먹는 계약자의 뒷바라지는 제 일입니다! 계약자의 뒷바라지는 오로지 저의 업무입니다!"
“애초에 아타니타스님한테 밥을 먹이고 싶다고 한 적도 없다니까요?”
“지금 식사 시중을 얕보는 겁니까!!!”
처음에 좋게좋게 말하던 카렘도 도무지 대화가 맞물리지 않자 머리에 피가 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관심도 없는 일에 자꾸 시비가 걸리는데 보살도 아니고서야 이걸 계속 참아?
맞물리지 않는 대화로 10살짜리 꼬마 요리사와 나이 추정불명인 브라우니가 싸우기 시작하자 난데없이 언어 유탄을 두다다다 얻어맞은 캐서린은 결국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난 네놈들의 고용주다 이 망할 종자들아!!!"
중세란 기본적으로 따로 놀기로 유명한 시대였다.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
하물며 에우로파 대륙은 거기에 더해서 다양한 위협이 존재했다.
그래도 느슨한 봉건 계약을 통해 구축된 에우로파 대륙의 국가마다 공식적으로 선포된 국교가 있기는 했다.
‘공식적으로’.
다만 지방에서는 국교와 다른 종교가 우세인 경우는 흔했다.
하물며 지방의 역사가 국가보다 더 오래되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오폰 왕국의 아이스랜드가 이러한 상황에 해당했다.
아이스랜드는 세 명의 신을 모시는 삼신교.
겨울의 여신 스카디, 전사신 투타티스, 이름없는 여행자를 숭배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자 카렘은 대충 짐작이 갔다.
"윈터센드는 삼신교의 명절 같은 거로군요?"
"보다는 기념일에 가깝지. 스카디의 대전사 투타티스가 전사신으로 승천한 순간을 기리는 날이니까."
단순히 추석이니 설날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승천이라는 어마무시한 단어가 카렘의 귓가를 자극했다.
다만 곰곰히 생각하자 그리 낮선 단어는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유명한 그리스신화조차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가 대표적인 경우.
실존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불교의 신 위타천으로 와전된 건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기도 하고.
"실력 하나로 신의 자리에 오른 투타티스를 기리고 축하하기 위해 각 도시, 마을의 다양한 실력자들이 온 힘을 쏟은 제물을 바치며 축제를 벌이는 기념일이라고 볼 수 있지."
신을 기리기 위한 명절.
이것도 카렘에게는 나름 익숙했다.
무교라서 빨간 날로만 자축하던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개천절,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라던가
"그런데 추천인은 뭔가요? 제물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그것도 다 이유가 있다."
"뭔데요?"
"투타티스는 까다롭거든."
까다롭다니. 이건 또 신선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손가락으로 카렘을 가리켰다.
"부정을 저지른 제물, 실력 미달 등 바친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징벌을 내린다."
"...고작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징벌이요?"
"너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제물은 그 신의 위엄을 보이고 직접적으로 힘과 간접적으로 신앙을 늘리는 가장 중요한 물건인데 거기에 수준 미달이나 부정이 탄 물건을 바친다면 신의 면전에 대놓고 스튜가 담긴 그릇을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물며 그 신을 위한 기념일에 그런 짓을 하면 그건 뭐 제발 벌을 내려 달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하긴, 올림푸스 12신 중 2/3가 사소한 이유로도 저주를 흩뿌렸던 것에 비한다면 이쪽 경우는 오히려 신의 본업에 나름 충실한 걸지도.
그렇게 카렘의 마음속에 피어오를지도 몰랐던 신앙의 새싹은 캐서린의 다음 말과 함께 사라졌다.
"물론 투타티스가 그냥 성질이 더럽고 입맛이 까다롭기도 한데."
"어, 좀 많이 무엄한 단어 선정 아닌가요?"
“무얼, 삼신교 경전에도 적혀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거 신도들이 자기 신한테 너무 가차 없는 것 아닙니까?”
"오히려 삼신교의 사제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성질이 더럽고 입맛이 까다로운게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행동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도 음식이 맛없다고 돈을 안 내거나 사기를 당했다고 사기꾼에게 냅다 무기를 휘두르지는 말라고 하더구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지적해야 할 만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카렘의 얼굴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찌그러졌다.
신이나 신자들이나 와일드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신에게 제가 제물을 바쳐도 된다고요?"
"투타티스는 실력을 제일 중시하니까 그렇지.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꼬마. 열심히 준비해라."
"어, 오히려 그렇게 말하시니까 더 부담되는데요."
"오, 바로 그거다. 수준 미달일 때 가끔이지만 추천인들도 같이 벌을 받는 경우가 있거든."
부담이 100배.
카렘은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