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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는 게 결정했다고 바로 휙 갈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다리차, 5톤 트럭이 있는 세상에서도 이사를 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트럭도, 사다리차도 없는 이 조선에서 그 먼 곳까지 이사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조선은 좋게 말하면 예와 법도의 나라이고, 나쁘게 말하면 꼰대스러운 각종 허례허식이 가득한 나라이다 보니.
떠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아주 산더미이다.
"류정현을 제외한 삼정승, 육조 판서 대감, 집현전 부제학 영감까지 왜 이렇게 찾아뵈어야 할 사람이 많은 거야. 그리고 이분들은 내가 찾아뵈었을 때 사직서 내지 말고 조정에 계속 남아있으라고 한결같이 안달복달을 하시니..."
특히 황희는 내가 집에 찾아갔을 때 당장 출근하라며 난리였다.
아직도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방원법이라는 조선의 천년대계가 될 대개혁을 추진하자 해놓고, 여기서 발을 빼다니 그동안의 수고가 아깝지도 않나? 지금이라도 당장 호조로 자진해서 돌아오게. 그러면 태상왕 전하, 주상 전하께서는 자네의 능력을 아끼셔서 승차(승진)를 시키실 것이고 더 중요한 임무까지 맡기실 테니까 말일세. 가지 말게. 자네가 없으면 호조 관원들 다 죽네, 가지 말게나!'
내가 관직에 나선 건 고향에 짱 박혀서 책만 읽고 있어도 무시받지 않는 입지를 손에 넣고 싶은 거였지, 정년이 지났는데도 세종대왕님에게 은퇴를 허락받지 못하는 종신 영의정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러니 나는 황희의 절절한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사 준비하면서 류정현 탄핵할 상소만 딱 쏘고 낙향해버리면 행복 시작 불행 끝인데, 내가 미쳤다고 호조로 다시 들어가서 누렁소 노릇을 자처하겠는가.
"돌쇠야."
"예, 나리."
"이사 준비는 잘 되어가느냐?"
"짐은 거의 쌌습니다. 가구는 지게로 지고 가고, 서책 같은 건 노새 등에 실을 생각입니다."
"그래. 그리고 양구까지는 나룻배를 탈 수 있으니, 우선은 노량진으로 가서 나룻배를 타는 것으로 하자."
우리가 흔히 조선하면 떠올리는 것이 산이 많아서 수레를 굴릴 수 없으니, 수운(배)으로만 물자를 수송해서 내륙에서는 수송이 힘들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그렇지만도 않다. 수레가 안 다니는 산길은 걸어가고, 강이 닿는 곳은 어떻게든 배를 타고 가는 게 조선의 전통이니까.
"내가 양구로 돌아가면 돌쇠 네가 곧장 혼례를 치를 수 있게 자리를 봐 주마."
"아이고, 당치 않습니다요."
"네가 김 권농댁 희순이를 좋아하는 거 내 모를 줄 알았더냐. 내가 김 권농(면장) 어르신께 말을 잘해줄 테니,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하거라."
"감사합니다, 나리. 그리고 지금 바깥에 만덕 어르신께서 와 계십니다."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어서 사랑방으로 데려오너라."
곧장 나도 도포를 갖춰 입고서 사랑방 안에서 김만덕을 맞았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예, 나리."
사실 세종대왕님이 우리 집에 의금부 관원들을 보내서 억지로 나를 체포하려 하는 상황이 아니면,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에야 누구도 우리 집에 들어올 수는 없을 거다.
"나리 댁에 와 이삿짐 싸놓은 것을 보니, 나리께서 진짜 이사를 가신다는 게 실감됩니다."
"......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딸을 데리고 가서 자네에겐 미안하네."
"겨울이 그 아이도 나리가 좋다고 하는데, 아비로서 어찌 막겠습니까.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아이를 소중히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네. 겨울이가 회임이라도 하게 되면 내가 곽탕(미역국)이라도 끓일 것이야."
우리가 흔히 유교 사회에서는 남자가 요리하는 게 해서는 절대 안 될 일로 여겨지고, 그래서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데...
그건 조선 후기, 세도정치 이후부터 돈 주고 양반 자리를 산 돈만 많은 졸부들이 만들어 낸 허례허식일 뿐이다. 실제로는 취미 삼아 요리를 해도 무방하다.
선조 시대 노수신은 자기 어머니 드실 요리를 직접 요리한 것이 미담이 되어 남아있고, 연암 박지원도 고추장을 직접 담가서 자기 사위에게 보냈을 정도니까.
물론 이 또한 몹시 특이한 취미에 들어가기는 한다.
"그건 그렇고, 영상 대감의 고리대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았나?"
"예, 소인이 알아보니 정말... 여태까지 큰 탈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류정현, 이 인간은 권력에 착 달라붙는 게 특기인 자다.
세종이 화폐를 시행할 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힘없는 백성들만 집중적으로 조짐으로서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어명'에 따를 수 있었다.
덕분에 양반들 사이에서는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아서, 고리대로 탄핵받는 걸 무마시킬 수 있었으며.
세종은 그의 고리대가 '국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조선 초기 기준으로는 그가 케인즈 급의 경제전문가였던지라 끝까지 봐주었었다.
그런데 놈의 지금 입지는 원래 역사와 몹시 다르다.
내가 진해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비용을 무작정 줄이는 것보다는 세금을 조금 많이 걷더라도,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면 백성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는 걸 증명해 버렸다.
더 나아가서, 저 인간은 이방원이 아예 자기 이름을 박아버린 방원법에도 태클을 넣은지라 입지가 많이 흔들리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지금 살아남아 있는 것은 '영의정'이니까 함부로 치우기도 뭐하고, 또 그가 왕권에 도전한 건 아니기 때문인데.
여기에 내가 손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영의정이라도 죽일 수 있다.
누가 보면 내가 조정의 권신이라서 영의정을 죽이는 게 가능하다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건 놈이 죽을 만한 짓을 해서 죽는 거다.
"장리와 갑리는 물론이고, 고리대를 잘 걷은 자를 역승(역참의 책임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들었습니다."
"역승이라, 역승 말이지."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조선에서 벼슬에 오르려면 과거를 쳐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 초기에는 과거 시험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써서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사만거관이라고 해서 특정 직책의 경우 근무 일수를 채우면 과거에 붙은 벼슬아치들처럼 품계가 있는 정식 관원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게 녹사(상급 아전), 서리, 경아전(중앙 관청의 아전), 갑사, 역승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역승은 중앙과 멀리 떨어진 역참을 감독하는 직책이라 중요도가 좀 떨어졌다.
막말로 영의정같이 높으신 분이 마음을 먹으면 낙하산으로 사람을 꽂을 수가 있었다는 거다.
"당상관이 자기 지인을 역승으로 넣는 것 자체가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리대 걷는 일을 열심히 한 작자를 역승으로 임명해 벼슬을 얻을 기회를 주다니 이것이 말이나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고리대금 걷은 게 대체 뭔 공이 된다고 그거 잘했다는 이유로 벼슬을 줘?
그런 식으로 벼슬을 줘야 한다면 전국 각지에 있는 칼 좀 쓴다는 흉악범들을 모아서 갑사 자리를 내어주고, 임기 마치면 무관으로 발령 내어 사군 육진 개척을 시켜야겠네. 미친 소리도 작작 해야지, 진짜.
"그리고 영의정 대감은 재산이 몹시 많고, 전국 곳곳에 창고가 있어 조선 팔도 여러 고을에서 고리대를 놓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역승으로 임명된 이들은 영상 대감의 노비들을 부려서 고리대 원금과 이자를 받고, 갚지 못하는 이들은 두드려 패서 자매(스스로 노비가 되기를 자처함)를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게 진짜라고? 서달 사건은 단순히 은폐라고 하지만, 영의정이라는 작자가 백성들을 상대로 이런 짓까지 하다니.
"말도 안 되는 괴소문은 아니고?"
"그래서 역리(아전), 역졸(병사)들을 부리지 않고, 종들을 부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게 하지 않으면 한양에서만 7만 섬 가까운 쌀을 어떻게 모으겠습니까?"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말이 아주 안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시대에 역모가 일어났을 때 사병 역할을 했던 건 노비니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김종서 뚝배기를 제일 먼저 깬 임어울은이라는 놈은 2등 공신이 되었고 말이다.
"역승으로 임명되어 이런 일을 잘하면 거관하여 변방의 무관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답니다."
"역승이 근무 기간을 다 채웠을 때 무관으로 임명해 주는 일이 흔하기는 하지. 그렇지만 고리대 잘 걷는다고 무관으로 임명해 주는 건... 이거 보는 관점에 따라서 사병을 굴리고 있다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조정에서 안 들렸지?"
나의 말에 김만덕이 피식 웃었다.
"고리대금을 걷는 것이 합법이기도 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영상 대감이기에 함부로 탄핵하려고 나선 사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총애가 이제 슬슬 사라졌으니..."
탄핵을 해도 된다. 막말로 대동법, 아니 방원법은 이제 이방원이 시동만 걸면 바로 돌아갈 거다.
그렇지만 류정현 그놈이 영의정으로 있으면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동을 걸어댈 테니...
조선을 위해서라도 놈은 죽이고 가야만 한다.
그래,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하는 거다.
"...... 고리대금으로 피해 입은 백성들의 이야기도 좀 모아오게."
이방원과 세종대왕님의 백성 사랑은 진짜다.
그러니 지금까지 조사한 사실에 백성들이 고통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얹으면 100% 통한다.
어차피 사직하고 낙향하는 거 마지막 업적으로 '영의정 슬레이어' 하나 달고 가도 되겠지.
거기다 영의정 썰어버린 놈이 복직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니 낙향을 더욱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얼마나 좋은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