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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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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은 조선의 정책연구 기구이자 학문 연구 기관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싹수가 있어 보이는 놈은 여기로 싹 다 납치해 와서 온갖 정책연구를 시키고, 학문까지 추가로 닦게 하니 '대학원생' 양성 기관이라고 봐도 된다.

"김 수찬 나리께서는 오늘도 여유가 가득해 보이십니다."

"최 박사(최만리), 좀 도와드릴까요?"

최만리는 나보다 관직이 낮다. 그는 정7품이고, 나는 정6품이니까.

그러나 나이는 최만리가 나보다 6살이 많으니... 같은 양반 관리라 대놓고 하대하기도 그렇고, 존칭을 쓰기도 애매하여 이런 구도가 연출된다.

"수찬 나리께서는 지금 병조판서 대감께서 맡기신 일도 그렇고 농기구 고안하고 만드는 일까지 해야 해서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집현전의 일원으로서 최 박사를 짧게 도울 여유 정도는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사직상소 내고 은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진급 욕심이 전혀 없다 해도 관직 생활 난이도를 쓸데없이 올릴 생각은 없다.

율곡 이이처럼 면신례도 안 했는데, 붙임성까지 나쁘면 내 주변에는 적밖에 안 남게 된다. 그러면 사직하고 낙향해서 살려 할 때, 이유 없이 나를 고발하는 놈이 생길 수도 있으니...

집현전 관리들과는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게 필수다.

그리고 최만리 저 사람은 훈민정음을 반대하고 나섰기에 유교 꼰대라 불리는 거지. 그가 훈민정음을 반대했던 이유를 보면 현대인이 봐도 납득할 레벨이었다.

진짜 유교 꼰대이며, 민중은 개돼지라고 발언했던 자는 저기 구석에서 나를 수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정창손이다. 정창손과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할 아주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수찬 나리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저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할 뿐입니다."

내가 집현전 GPT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서 집현전 전체에 걸리는 업무 부담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덕분에 집현전 관리들도 상시 야근이 아닌, 이레(7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 야근을 하고 다른 때는 정시 퇴청을 한다.

그래서 면신례를 안 했음에도 다른 관원들까지 나를 집현전 일원으로 슬슬 인정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나 혼자 너무 여유롭게 일하면, 괘씸죄에 걸려서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가 나한테 각종 일을 던져댈 테니... 적당한 밸런스를 찾아가야 하겠지.

"고된 집현전 관리 생활도 김 수찬 나리와 함께하니 좀 살 것 같습니다. 다음 휴일에는 소관이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하고 있을 때, 얼굴이 심하게 구겨진 정인지가 집현전 안으로 들어왔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단순히 '야근'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대형 사고가 터진 거지?

일단 집현전은 '정책연구 기관'이지, 전쟁을 담당하거나 그런 기관은 아니기에 어디에 자연재해가 터졌으니 그거 수습할 궁리를 당장 해내라 그런 것은 아닐 텐데.

"태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께서 화폐 제도를 시행한다 하셨네. 지난번에는 종이로 만든 돈을 써서 잘 안된 것이니, 이번에는 동전을 쓰겠다고 하셨어."

들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멍해진다. 화폐라고? 지금 동전이라고 한 건가?

갑자기 목덜미가 당기고 뻣뻣해지며, 눈앞이 어지러워진다.

저거야말로 태종 이방원이나 세종대왕님이 무지했던 탓에 벌였던 최악의 경제정책이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종이돈'이 아니라 구리 모양 동전을 쓰겠다고 하셨다는데... 그래도 저게 잘 될 리가 없다. 구리로 동전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는 좋은데.

그 외의 모든 발상이 싹 다 글러 먹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저 동전 화폐 정책이 성공할 확률은 수능 국어를 모두 1번으로 찍어서 1등급이 나올 확률보다 낮다.

"경연을 위해 사서삼경이나 다른 서책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다른 정책 연구하는 것도 모두 멈추게. 이제부터 집현전은 동전을 도입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옳고, 어떤 점에서 그른지를 검토하는 걸세. 그리고 어찌 시행할 것인지도..."

정인지의 시선이 나에게 와 꽂혔다.

내가 진짜 양심을 팔아버린 나쁜 놈이라면, 출세를 위해 '이방원' 눈치를 보면서 잘못된 화폐 정책을 못 본 척할 거다.

내가 그런 인간이었다면 아주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인간이 못 된다.

"부제학 영감, 이건 진짜 안 됩니다."

"자네는 아직 태상왕 전하께서 정책을 어찌 시행할 것인지 들은 바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어찌 확신할 수가 있나?"

미래를 알고 있어서, 저 정책 내용이 예상이 가기에 그런 거다 이렇게 답하는 건 당연히 안 될 일. 그러니 다른 방향으로 틀어야지.

"영감께 여쭙겠습니다. 호조를 비롯한 조선의 모든 창고를 동전만으로 채운다면 국고가 풍성해지겠습니까?"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창고 절반은 동전으로 채우고, 나머지 절반을 쌀로 채우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로 재산을 축적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1만 원짜리 만 장이 있으면 1억 원어치의 물건을 실제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 기업, 일개 시민들까지 그 당연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솜을 넣어서 만든 잘 찢어지지 않는 종이 쪼가리를 돈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그런데 관료, 그것도 집현전 부제학이나 되는 인간이 '동전'을 못 믿는다면 백성들은 동전을 화폐로 간주하고 사용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꼰대 정창손이 정인지를 대신해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곳간에는 각종 특산물과 쌀이 있어야지. 동전은 그저 거래를 편하게 하기 위해 쓰는 물건이 아닌가. 백성들은 쌀을 내고 동전을 받아 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쓰일 뿐이야."

듣기만 해도 어지러운 개소리다. 정부도 가치를 신뢰하지 못해 세금으로 동전을 내지 못하게 하면서 그런 동전으로 대체 무슨 화폐 정책을 한다는 거야?.

이딴 정책은 100%, 1,000% 망한다.

"나라에서도 동전을 써서 쌀을 못 산다 하는데, 백성들이 과연 동전 화폐를 믿고 쓸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정인지가 고개를 저었다.

"태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의 의지가 강력하네. 그리고 반드시 실패한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김 수찬 자네는 나이가 어리고, 관직에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전에 호저화(집마다 세금 대신 걷는 저화)를 쓰던 시절에는 나름 화폐로서 기능을 했었네."

"그건 나라에서 저화를 세금을 걷을 때도 쓸 수 있는 유용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백성들은 종이로 된 돈이 나라에서도 쓰는 것임을 알고, 저화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소관이 그 시절에 관직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백성들은 저화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관이 말한 것처럼..."

태상왕 이방원, 그는 철퇴의 남자다. 자기 신념과 소신을 위해서라면 그게 틀린 길이든, 맞는 길이든 무작정 돌격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의 신념 덕분에 진해 현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방원이 정학소를 죽이고, 그의 가족을 모두 공노비로 만들어서 나를 밀어줬기 때문이다.

아군일 때는 이 사람보다 든든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적으로 돌리면 이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이 없다.

회피 불가, 즉사기, 도트 데미지, 범위 공격이 동시에 들어오는 셈이다.

저걸 처맞은 정학소도 그렇고 여흥 민씨 가문도 그렇고 모두 멀쩡하지 못했다.

"조정 관원들도 세금으로 저화를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인지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보게, 김 수찬."

"예, 영감."

"자네도 알겠지만, 영의정 대감께서는 자네를 향해 이를 갈고 계시네. 왜 그런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순자, 묵자를 비롯한 이들이 상공업을 억제하고, 절용(무조건적 비용 절약)을 하자고 한 유교적 정치 관념을 내가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건 없지만,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부정한 내가 좋게 보일 리 없지.

"예, 영감. 잘 알고 있습니다."

"김 수찬, 자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태상왕 전하께서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시니까. 그러니 곰곰이 잘 생각하게나."

그리 말하더니 정인지는 나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보냈다.

"자네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정무를 못 볼 것 같구먼. 병가를 내게. 그리고 심신을 바로잡은 뒤에 오게나. 막말로 여기 있는 집현전 관원 중에 자네 덕 안 본 사람 아무도 없으니, 며칠 푹 쉬고 오도록."

"감사합니다, 영감."

"사람이 너무 뻣뻣하면 부러지는 법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바로 퇴청하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퇴청이라니.

그럼에도 전혀 기쁘지 않다.

**

발걸음이 저절로 운종가(종로 시전)로 향했다. 그냥 운종가의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싶어졌나 보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김만덕의 가게에 도착했다.

김만덕은 거기서 넉살도 좋게 장사하고 있었다.

"진해 현에서 올라온 맛있는 곶감 사가시게. 병조 정랑 나리의 사모님께서 회임하셨다는데, 맛나게 단 걸 찾으신다면 진해 곶감이 으뜸이지."

"...... 정랑 나리께서 단 걸 사오라 하기는 하셨지만, 가격이 좀 비싸서."

"진해 곶감은 전하께도 진상되는 최상품이네. 그러나 내 특별히 생각하여 곶감 한 되에 쌀 넉 되만 받지. 원래는 5되는 줘야 하는데 말이야. 더 이상은 못 깎아주네."

"...... 좋습니다."

병조 정랑댁 노비에게도 이놈, 저놈 하지 않고 넉살 좋게 대하는 그를 보니 그는 틀림없이 큰 상인이 될 재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려고 하는 때, 김만덕 그가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고, 나리! 오늘은 퇴청이 빠르십니다."

"시전에서 장사는 할 만한가?"

"나리의 후광 덕분에 시전에서 저한테 텃세 부리는 놈이 없어서 장사가 제법 잘 됩니다. 진해 곶감과 멸치가 잘 팔리니, 이제 슬슬 오동나무로 만든 그릇까지 팔아볼 생각입니다."

"다행이군."

김만덕이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하였다.

"그런데 얼굴에 근심이 좀 있으신 것이, 혹여 어디 아프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네. 단지 고민이 좀 있을 뿐이지."

고민이라, 나랏일이니 직접적으로 그에게 털어놓기는 뭐하다.

그래도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친구 이야기로 둔갑시켜 물어보는 것처럼... 남 이야기처럼 돌려서 물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만덕, 자네는 말이야. 상인으로서 이익이 더 중하다 생각하나, 신의가 더 중하다 생각하나?"

"신의가 더 중합니다."

"왜 그런가, 돈이 있어야 신의도 지킬 수 있을 텐데. 가족도 지킬 수 있는 거고 말이야."

김만덕은 나를 보고서 씩 웃었다.

"신의를 버리고 눈앞의 이익을 얻으면, 그 순간은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인이 꽤 오랜 기간 장사치 노릇을 해보니, 신의를 버린 이들은 주변의 상인과 손님에게 미움을 받게 되더군요. 그래서 당장 눈앞의 돈을 쫓기 위해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남은 상인 인생을 몽땅 팔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음모론으로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도 자기 가문이 망하더라도 신성로마제국 선제후의 돈은 지키겠다면서 신의를 지켜낸 덕분에 확 뜨기 시작했다지.

그들이 자기네 돈만 챙기겠다고 나섰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금처럼 음모론의 대명사 소리는 못 들었을 거다.

"그래서 저는 신의를 지킬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나아가, 소인은 미천한 상인이지만 신의를 버리면 사람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자기 전에,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정오에 점심을 먹고 나서, 저녁이 되어도 말입니다."

"그런가."

"예, 그러니 저는 상인으로서 신의를 더 중시하겠습니다."

......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결심하였다.

그래, 내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실패할 화폐 정책에 반대하고 나서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그렇게 나의 남은 삶을 후회하는 시간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집으로 갔다.

설령 철퇴에 맞아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