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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유교에 미친 꼰대도 공감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조선은 백성, 정확히 말하자면 ‘농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라는 거다.

농민이 식량을 생산하지 않으면 왕도 선비도 상인도 그 누구도 굶어 죽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시기는 과장을 하나도 안 보태어 ‘농업 생산성 향상’은 경제성장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수확량을 10% 올린다면, 이는 나라 전체 경제 성장률을 10% 끌어올리는 것과 같다고 봐도 된다는 거다.

그러니 조선의 올바르고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 내가 새로운 농사법과 농기구를 도입하려 나서는 게 당연하겠지?

“어, 김 수찬 나리, 아니 수찬이 아니신가?”

장영실이 벼슬아치 된 것이 고작 두 달 전 일이다.

그래서 양반 관리를 보면 ‘나리’라고 부르는 버릇을 깔끔하게 버리진 못한 것 같다.

그래도 관리 되었다고 망치는 내던지고, 붓만 잡으면서 초심을 잃은 모습을 안 보여주니 그런 그가 참 좋다.

사람이라는 건 초심, 다르게 표현해 본질을 잃어버리면 그냥 썩어버리기가 십상인데...

장영실은 죽을 때까지 장인으로 남았다.

그런 분이니 나는 그에게 조선을 널리 이롭게 할 기회를 주고 싶다.

아, 잠시만 그런데 장영실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냐?

내가 무슨 판서도 아니고, 고작 집현전 정6품 수찬에 불과한데...

“처음 뵙겠습니다, 별좌 나리. 소관은 집현전 수찬을 맡고 있는 김대붕이라 합니다. 호로는 죽헌을 씁니다.”

“죽헌, 아니 김 수찬...”

장영실은 아직도 옛 습관을 못 버린 까닭인지 ‘김 수찬’이라 부르는 게 몹시 불편한가 보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게 일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소관이 진해 현감으로 있을 때부터 느낀 것인데, 농사야말로 실로 천하지대본(천하의 근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신하 된 자는 좋은 농법과 농기구를 개발하고 널리 알려서 농민들이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도 학문을 익히는 게...”

“조선 팔도에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해 전하를 보필하면 백성들에게 식량과 부를 고르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 그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나눌 수 있는 재물의 양을 늘리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건 ‘좋은 기계(도구)’와 ‘좋은 농법’에 달렸지요.”

공자, 맹자는 유교의 도리가 백성을 구원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백성을 구원한 건 기술 발전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정확히 말해 프리츠 하버가 공중질소 고정법이라는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내는 기적’을 펼치고 난 다음, 이 세상에서는 ‘굶어 죽는 일’이 점차 드물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현대 사회에서는 기근과 전쟁 중의 아프리카 같은 지역에 가지 않는 이상 굶어 죽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후진국 빈민가라 해도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은 드물어졌을 정도.

후대의 역사를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장영실 같은 기술자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건 내 진심이다.

“전하께서는 별좌 나리께서 다른 관리들이 잘할 수 없는 영역,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을 늘리는 기술을 높이 평가하셔서 벼슬을 내리신 것 아니겠습니까.”

장영실은 나의 말을 듣더니 매우 감격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서 눈시울을 붉혔다.

“...... 지금도 몇몇 관원들은 내가 노비 출신이라고 낮게 보면서 멸시하는 일이 있는데, 나를 이리 높게 평가해 주는 젊은 관리가 있다니. 정말 고맙네. 내가 비록 다른 관원들에 비해 무식하다고는 하나, 나는 저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지...”

평생 기술개발만 하며 살아온 아재다 보니, 과거 출신으로 말발만 쎈 관리들과는 다르게 몹시 순박하시네.

좋다. 이제 이 사람의 신임과 호의를 얻었으니, 일거리를 마음껏 던져도 되겠지?

이전의 당신같이 가난한 백성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농기구를 만들어 달라 하면...

그는 아주 열심히 만들어 줄 거다.

그러면 호조, 공조에 농기구 보급을 위한 일 폭탄이 터질 거고, 저들은 내가 이미 준비해 놓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안달복달을 하게 될 터.

방책은 이미 마련된 상태니, 나는 느긋하게 답변해 주기만 하면 된다.

“잠시 시간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이거 김 수찬을 돕는 것이 전하의 성은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만 같군.”

“같이 성은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충군애국하는 겁니다, 별좌 나리.”

“충군애국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지. 암, 그렇고말고. 내 나이 드신 어머니를 면천시켜 주시고, 노년에 호강하실 수 있게 해주신 전하의 성은을 갚을 길이 있다면 내 어떤 힘든 일이라도 두 팔 걷고 나설 걸세.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장영실을 꼬시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농기구 개발로 들어가는 거다.

"우선 이것부터 봐주십시오."

"이건 수차(물레방아)가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수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서 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밟아서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입니다."

"논에 물을 대거나, 밭을 따라서 난 수로에 물을 대기가 편해지겠군."

"농사라는 게 물을 얼마나 잘 대주느냐에 따라 흉년과 풍년이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 수찬 자네 말대로 농사의 성공과 실패는 물 대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태상왕(이방원)께서는 이앙법(모내기)을 금지 시키신 것이고 말이야."

조선 초기에는 이앙법을 쓰다가 걸리면 곤장을 때렸다.

백성들이 부자 되는 게 싫은 양반들이 심술을 부린 것은 아니고, 저수지가 너무 부족하기에 조금만 비가 덜 와도 농사를 망치기가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을 대는 게 편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앙법을 금지할 이유가 없어지니, 백성들은 이앙법을 써서 더 많은 소출을 얻어 소득을 높일 수 있게 될 터.

한 마디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다.

양반도, 상인도, 백성도 말이다.

"그리고 이건 제가 용미라고 이름 붙여본 기구입니다. 안에 나선 모양의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이 기구가 돌아가면서 물을 끌어올려, 물길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용미라는 건 물의 흐름을 동력 대신 쓰는 양수기(물을 끌어올리는 펌프)다.

이걸 물이 많이 흐르는 사대강 중류나 하류 같은 곳에 여러 개 놔두고 수로를 파면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로의 길이를 확 늘일 수가 있다.

그 얘기는 황무지 개간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이며 수많은 백성에게 자기 '땅'을 얻을 기회를 주게 된다는 거다.

"참으로 대단한 도구로군. 이 두 개의 도구만 있어도 농사짓는 것이 몹시 편해지겠어."

"제가 생각한 도구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오, 더 있나?"

"예, 제가 진해 현감으로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생각한 도구들이 잔뜩 있습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방금 장영실과 내 옆을 높으신 관리 한 분이 지나간 것 같다.

그 관리가 나를 보고서 ‘상의원에 일에 미친 마구니가 왔구나!’

이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이겠지?

나는 그저 백성이 행복해지고, 관리들은 정시 퇴청하기를 바라기에...

그저 조선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조선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걸 누가 마구니라 부른단 말인가?

상의원을 생각해 보니, 이곳은 옷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한데.

그냥 확 재봉틀이랑 방적기, 방직기 시안이라도 풀어버릴까?

그러면 상의원정(상의원 책임자)이 너무 기뻐 죽으려 할 것 같은데.

그것들이 다 만들어지면 의복 생산량을 최소 지금보다 10배는 늘릴 수 있을 거고 말이다.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내가 그려놓은 도구 시안을 보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장영실을 보니 다시 행복해졌다.

"이것들은 능히 조선을 이롭게 할 수 있겠어."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로를 만들 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 흙을 나르는 것 아닙니까? 그때 이 거중기라는 기계를 이용한다면..."

나는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 그림을 대충 그렸다.

도르레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지는 것을 간략히 그린 것뿐인데도...

나는 개떡같이 그려놓았지만, 장영실은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그렇군, 이것은 이 동그라미 모양의 물체에 밧줄이 지나가면서 무게를 줄여주기에 들기 쉽도록 바꾼다 이 말이지? 두레박처럼 말이야."

"역시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별거 아니네. 이 정도는 해야지."

장영실은 별거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몹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있고, 어깨는 자연스럽게 으쓱 올라갔으니 말이다.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좋을 때가 있으니... 그냥 모르는 척하자.

"그리고 쟁기를 비롯한 농기구는 지금처럼 굳이 복잡한 구조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복잡하더라도 튼튼하고, 정교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민간의 장인들 솜씨가 다 장 별좌님이나 상의원 장인들 같으면야 그래도 되겠지요. 그렇지만 소관이 진해 현감으로 있을 때 공장(장인을 부르는 다른 명칭)들 솜씨를 보니, 그리 정교하지가 못했습니다. 더불어 이 농기구들은 부역으로 불려 온 장인들이 1차로 만들어 전국에 퍼뜨리게 될 것인데, 솜씨가 모자란 저들이 억지로 만드는 농기구의 품질이 어떻겠습니까?"

옛날에 어떤 대체역사 갤러리 유저가 올린 자료에 따르면 기술, 땅의 비옥도, 날씨 등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해도.

소작농이 농사짓는 밭과 자영농이 농사짓는 밭의 수확량이 30% 정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하물며, 억지로 끌려와서 부역하는 놈들이 정교한 농기구를 애써서 만들까?

차라리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놈을 위해 하늘이 불쌍히 여기어 미소녀를 그의 방에 떨어뜨려준다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전자는 0%고, 후자는 0.000000001%는 될 테니까.

"나야 관노비로 있을 때부터 뭘 만드는 게 좋아서, 열심히 배우고 익혔지만... 다른 노비들은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일거리만 많아질 뿐이니 손해라고 생각하더군. 그런 이들이 복잡하고 정교한 물건을 열심히 만들 리가 없지."

"그러니 만들기 쉽고, 막 써도 되는 걸로 만들어야 합니다."

"알았네. 참고하도록 하지."

그렇게 나는 장영실과 계속 '업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을 때, 우리 앞에는 파란색 관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영감님이 나타나셔서 호통을 쳤다.

"퇴청할 시간이니, 어서 집으로 가서 쉬게나."

"송구합니다, 나리."

나 때문에 다른 관리들을 야근시키면 안 되지.

그래, 이 정도만 그에게 던져주면 된다.

쿵하면 짝하고 알아먹는 일머리 뛰어난 장영실이 내가 제안한 농기구들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면... 가까운 시일 내 조선의 농업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할 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이 나한테 넘어올 테고, 내 머릿속에는 이미 해결책이 준비되었으니... 당분간은 편히 일할 수 있겠지.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공손히 인사를 드린 뒤 나는 상의원 청사를 떠났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 이게 다 김 수찬이 고안한 농기구라고?! 아이고, 우리 상의원의 정시 퇴청은 물 건너갔구나."

장영실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면 된 거다.

정확히 이레(일주일) 뒤, 정시 퇴청이라는 달콤함 속에 살아가던 호조와 공조에 일 폭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