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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은 나를 보더니 깊이 인사부터 올렸다.
그녀가 우리 집 일을 봐준다는 이유로 혼자 온 것이 오늘로 벌써 4번째다. 하여 이런 식으로 그녀를 맞는 것이 엄청나게 어색한 것은 아니지만...
뭐라 해야 하나, 결혼도 안 한 사이에 이렇게 나를 맞이해 주는 게 맞는 건가 싶다.
“면신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돌쇠 말을 들으니 심한 일을 겪지는 않으신 듯하여 참으로 다행입니다.”
조선의 면신례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다. 대학 시절 MT 때 온갖 똥군기를 잡으면서, 유격 조교라도 된 듯 후배들을 굴리며 난리 쳐대던 선배는 말 그대로 천사로 생각될 정도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정2품 도총관이 자기 부서로 처음 왔다고 권지(과거에 막 급제한 인턴)에게 도총관 이름을 존칭도 안 붙이고 면신례 끝나기 전까지 막 부르라고 시키지를 않나. 부임한 관청에서 일하는 관원들 모두에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대접하지 않으면 앞으로 좋지 않을 거라며 협박을 해대질 않나.
이걸 통과 못 하면 도총관(사령관급)이 군대에서 왕따당해도 합법이라며 무관들이 입을 맞춰 말할 정도니 말 다 한 거지. 하여 나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등청하였는데. 막상 안 해서 좋았다.
판서 대감들이 날 붙잡고 괴롭힌 게 문제지.
“부제학 영감께서 나를 좋게 봐주셔서 그런 끔찍한 일은 안 겪어도 되었네.”
“정말 다행입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공감한다. 면신례가 가장 심하게 이뤄지는 건 아무래도 과거에 갓 합격한 놈들이 대상이 되니... 내가 당할 면신례는 ‘사람을 진짜 죽일 정도’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재상이 아닌 다른 이들 눈높이에서 보자면 나는 ‘생태계 교란종’이다. 18살에 과거 합격하고 20살이 되기도 전에 정6품이라.
과거 입격 등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의 관리들은 40세가 되어야 ‘종6품’의 반열에 오른다는 걸 감안하면... 질투심에라도 나를 죽고 싶을 만큼 세게 굴렸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6조 판서들에게 GPT처럼 부려 먹힌 게 100만 배 더 나은 것도 같다. 오늘에 한해서는 말이다.
“대신에 6조 판서 대감들께서 6조의 온갖 난제를 나에게 다 가져오시더군. 황 대감(황희)께서는 전국에 있는 모든 고을에 장시를 설치해야 하는데 좋은 방안이 없겠냐고 물어보셨고, 허 대감(허조)은 과거 합격자가 한양에만 몰리는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지 하문하셨고.”
나는 연애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 한국에서는 모태 솔로였고, 조선에 와서도 지금까지 연애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
전생과 지금 조선의 시간을 합쳐 대략 40년 좀 넘는 기간 동안 또래 여자와 말도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는 쑥맥! 그가 바로 나다.
하여 처음에는 김겨울에게 말 거는 것 하나도 힘이 들었으나. 미녀는 남자를 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건지.
김겨울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고 적절하게 반응까지 해주니...
다른 여자와는 여전히 말을 섞기가 어려울 테지만, 김겨울에게는 어느새 속사정까지 자연스레 털어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유난히 상냥한 미소녀에게 공략당해 버리는 남자들의 사정이 이런 것일까?
솔직히 타지인 한양에서 이렇게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말동무 미녀가 가까이 있어서 좋기는 한데...
'김겨울 본인의 마음은 어떤지가 계속 신경 쓰인단 말이지...'
"이전에 아버님께서는 주머니 속에 송곳을 넣으면, 결국에는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말씀하시며.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출중한 이는 저절로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리께서는 진해현의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신 바 있으니, 여러 대감들께서도 나리를 인정하고 중요한 일을 거리낌 없이 물으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말 모범적인 답변이다. 내가 당장 사직 상소를 내고 자유인이 되고 싶은 작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큰 위로를 얻었을 것 같다.
아니, 말하는 사람이 미녀인 데다가 해주는 말 자체가 너무 이뻐서 하루빨리 사직하고 싶은 나이지만 왠지... 한 5년 정도는 관직 생활을 더 해서 조선을 발전시키는 것도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래서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한도가 줄기도 늘기도 하니 말이다.
"상인 집안의 일개 아녀자에 불과한 소녀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주제넘은 줄은 압니다만, 소녀가 알기로는 조정의 관리라면 누구나 면신례를 혹독하게 치른다 하였습니다."
"그렇지..."
품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혹행위의 수위는 내려간다. 그러니 정6품인 나에게 집현전 선배들이 똥물에 들어가 낚시하는 시늉을 해라 뭐 이런 정도는 시키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폭탄주를 만들어서 2되(3.6L) 정도 마시게 한 뒤에,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라 이런 정도는 시켰겠지.
그게 아니면 '막대한 돈'을 들여서 관원 전체를 대접하게 하고, 조금 심한 야자타임(말 놓기)을 하는 선에서 끝났으려나.
아니면, 벌써 정6품인 게 괘씸하다면서 젊고 버릇없는 신입에게 참교육을 시전한다는 명목으로 정신 나간 가혹행위가 펼쳐졌을 수도 있다.
"집현전 부제학 영감께서 면신례 없이 수찬 나리를 집현전의 일원으로 인정하신 걸 보면, 조정에서 나리께 거는 기대가 몹시 큰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몰려드는 정무를 감당하시는 것이 각별하게 고달프고 힘들 것이지만, 나중에는 진해 현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수많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니. 부디 힘내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네. 내일도 열심히 일할 힘을 벌써 다 얻은 것 같아."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겨울은 나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내 심장 건강에 안 좋을 것 같다.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염려되지만 그래도 남자가 각오를 다졌으면 할 말은 꼭 해야지.
"...... 만덕의 명 때문에 억지로 오는 거라면 굳이 힘들게 오지 않아도 좋네."
나의 말에 김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말 그대로네. 만덕이 시키지 않았으면,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남자의 집에 겨울이 네가 이렇게 드나들 리 없으니 하는 말이야."
조선시대 평민들의 연애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애매하다. 대부분의 갑돌이랑 갑순이는 부모가 정해준 상대를 만나서 결혼하는 게 당연한데...
간혹 서로 눈이 맞아서 결혼하는 경우도 10쌍 중 1쌍은 되었기 때문이다. 잘 사는 상인, 제법 큰 중소기업 사장쯤 되는 김만덕네 사정은 일반 백성들과는 또 다를 것이지만.
그래도 양반댁에서 흔히 말하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거나, 여자는 '외간 남자'와 대화조차 길게 하면 안 된다는 규칙 이런 것까지는 적용되지 않아도...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걸 몹시 조심스럽게 여겼겠지.'
그리고 만약에 우리 집에 드나들며 집안일을 도와주는 규수가 '양반댁'이었다면, 나는 당장 혼례부터 치러야 했을 거다.
그렇지만 김겨울은 상인 집안이기에 애매하여 누구도 뭐라 안 하는 거겠지.
그러니 김만덕이 나를 '집안의 은인'이라 여기긴 하지만 겨울이에게 좀 멀리하라 지시를 내린다면,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한없이 멀어져갈 거다. 그러면 나는 정말 마음도 아프고 쓸쓸해질 거 같은데...
사랑이라는 게 어디 내 맘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 조선에서 19년을 살았건만 이 부분만큼은 잘 모르겠다. 모든 게 내가 모태 솔로라서 자신감이 없기에 그런 거겠지.
"...... 나리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나리 댁에 오는 것이 싫지 않습니다."
"...그런가?"
"소녀가 태어나 남자와 이렇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이는 아버지와 나리 외에는 없습니다. 소녀에게도 벗이라 할 수 있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진해현에 있을 때는 단오에 그네를 같이 타기도 하고, 사월 초파일에는 탑돌이를 하기도 했지요. 시일을 맞춰 산에 올라 놀기도 했었습니다."
단오에 그네 타기, 사월 초파일 탑돌이는 여자의 바깥 활동이 심하게 제약받던 조선 양반댁 규수들이라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였다고 한다.
또한 정략결혼이니 뭐니 하는 걸 신경 안 써도 되는 서민들 사이에서는 그날에 이렇고 저런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났었다지.
"저와 친하게 지내던 벗 중 혜숙이, 명진이는 벌써 다른 고을로 시집을 갔답니다. 시집을 가기 전 만나 헤어짐을 슬퍼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조선시대 혼례는 남자도, 여자도 얼굴을 아예 모른 채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뭐, 편법으로 우연히(사실 일부러) 잠시 대화 나눌 기회를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얼굴도 모르고, 집안 사정에 따라 15살 처녀가 50살 남편에게 시집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진해에 있을 때 주고받은 편지에서 혜숙이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남편이 자기 몸을 살펴주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여 서러움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김겨울의 얼굴에 안타까운 감정이 가득 보였다.
"명진이는 사이좋았던 서방님이 과거에 떨어진 후부터 항상 화를 내는 사람으로 변하더니, 낙방한 원인 또한 마누라를 잘못 얻은 탓이라고 말하여 너무 괴롭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리께서는 제 벗들의 서방님들과 다르게 제가 하는 이야기를 언제나 잘 들어주시고, 제가 집안일을 작게 돕는 것도 늘 고맙다 해주십니다. 하여 소녀는 나리 댁에 오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조선 후기쯤 가면 ‘남편이 첩을 두는 걸 본처가 질투해서는 안 된다.’ 하고 '칠거지악'이라는 철저한 남성 위주 규율로 여인을 묶어버렸다. 그러면서 본 부인이 회임했을 때는 첩을 두라 권하는 것을 올바른 부덕이라 가르쳤고.
사람의 마음, 감정이란 예나 지금이나 같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리고 오는 길에..."
나는 옷소매에 넣어온 노리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줬다.
"겨울이 네가 없었더라면 나의 한양살이는 매우 힘들었을 거야. 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너에게 어울릴 만한 노리개 하나를 사 봤어."
이는 조선 감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이런 노리개는 보통 종을 시켜서 아무거나 골라 오라 시켜야 하는 건데...
정6품 관리라는 놈이 직접 고르고 사서 가지고 오다니... 말이 안 되기는 하다.
그러나 김겨울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받아줬다.
"수찬 나리."
내 입으로 하기가 어려워서 입술이 잘 떨어지진 않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기에 하기로 했다.
"싫지 않다면 앞으로도 자주 와주게. 나는 겨울이 네가 오는 것으로 큰 위로를 받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나리... 밤이 늦었으니, 소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 말을 급히 한 김겨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좀 빨갛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이던데, 촛불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건가?
어쨌든 내일도 열심히 해보자.
**
김대붕의 집을 나온 김겨울의 얼굴은 그야말로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기 가슴이 마구 뛰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왜 이럴까...?"
김대붕이 살았던 시대의 여자가 지금의 김겨울을 만난다면 그녀에게 친절히 알려줬을 거다. 너는 사랑에 빠진 거라고.
그러나 김겨울에게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수찬 나리가 싫은 건 아닌데..."
얼굴도 꽤 잘생겼을뿐더러, 모두에게 늘 다정한 사람이다. 노비들 생일까지 모두 기억해서 생일에는 가족들과 쉬라며 쌀과 술을 넉넉히 내려주고.
사흘 전에는 자기 집 노비 돌쇠가 아프다 하니 용한 의원을 불러 약까지 달여 먹이게 한 뒤, 푹 쉬게 해줬다.
결혼이라는 게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해야 하는 거라면... 저렇게 상냥한 수찬 나리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도 모질게 굴 사람이 아니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만약 자신이 그의 여자가 된다면 그가 나를 얼마나 아껴줄까가 상상되었다.
"조선 천지에 나 같은 여인을 그렇게 다정히 대해줄 분이 또 누가 있을까?"
아버지가 김대붕의 집에 자신을 자주 보내는 시점에서 김대붕이 언제든 자신을 원할 경우... 그는 자신의 옷고름을 풀어도 된다는 거다.
암묵적으로 이미 허락된 거다.
김대붕도 그걸 알지만, 김겨울의 의지를 존중하여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고 말이다.
김겨울은 그렇게 되어도 거부할 수 없다.
가장이 결정한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신 데도, 나를 배려해서 참고 신경 써주시다니 참으로 다정한 분이시지. 우리 수찬 나리께서는 말이야."
그의 선의, 마음 씀씀이가 김겨울에게는 몹시 고맙게 느껴졌다. 거기에 자기가 작은 일을 해주어도 늘 고맙다고 말하고...
오늘은 자신을 위해 시전에서 직접 노리개를 골라 오기까지 한 그의 진심.
"나리는 모르시겠지? 나리께서 나를 신경 써주실수록, 나는 점점 나리께 빠져든다는 걸 말이야..."
김겨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양에 새로 마련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의 두근거림을 가라앉히질 못해 잠자리 든 뒤로 오래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