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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에 내가 부임한 지 어느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직 진행되고 있는 일이 산더미 같긴 하지만, 중간중간 내가 벌인 일의 성과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사또께서 동천, 서산천에 보(저수지)를 쌓고, 수로를 내라 하신 덕분에 전답의 면적이 작년에 비해 3푼(3%)이나 늘어났습니다."
"정말로 전답이 3푼이나 늘었단 말이냐?"
3%라 하면 사실 얼마 되지 않는 적은 숫자로 들릴 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 진해현을 통틀어서 전답이 3% 늘었다는 것은, 경작할 수 있는 밭의 면적이 75결이나 늘어난 것이다.
75결이면 쌀 2,250섬을 더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세금으로 걷을 수 있는 쌀 또한 225섬이 증가한 셈이다. 우리 진해현 전세가 대충 말해 5천 섬 조금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장인 것이다.
"예, 사또. 그리고 보를 만들면서 수로를 새로 냈기에 개간할 수 있는 황무지가 넓어졌습니다. 백성 중 몇몇은 양반댁이나 부잣집에서 소를 빌려 자기 땅을 만들겠다며 직접 개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년쯤이면 성과가 드러날 테니, 전답은 더욱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걷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겠군."
조선에서 중산층, 아니 잘 사는 사람의 기준은 밭을 1결 이상 가지는 거다.
토지를 1결 이상 가진 사람이면 어디 가서 나 부자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흉년이 들 때라도 가족들 배곯게 할 일은 없을뿐더러. 평상시에도 가족 모두에게 쌀밥을 먹일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꼭 1결이 아니더라도 한 마지기, 두 마지기라도 자기 땅이 생기면 살림살이가 확 필 터. 정말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리고 고을의 인구도 많이 늘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현에 2,400호(가구)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2,700호로 크게 늘었습니다."
"1할 5푼(15%) 가까이 늘었군. 진해현 근처에 살았던 유랑민들이나 날품팔이들이 아예 정착을 해서 그런 거겠지?"
"이웃한 동래현과 같은 곳에서 빈민들이 많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저들은 대부분 상단에 취업해서 곶감을 재배하는 과전(과수원)에서 일하거나, 멸치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사또께서 임금을 넉넉히 주라고 하신 덕분에 저들도 진해현이 살만하다는 것을 알기에 점점 사람이 몰리는 것 같습니다."
"재물은 물과 같은 것이네. 퍼내면 퍼낼수록 더 나오는 법이지. 상인들이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창고 안에 있는 쌀을 풀어서 백성들을 고용해 일자리를 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지."
박제가가 한 말인데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쌀이라는 놈이 양반들 창고에 쌓여만 있으면 썩어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농업용 수로를 파고, 저수지도 만들며, 시장을 만들고, 소비도 하게 되어서 어떻게든 모두에게 배분이 된다.
"그리고 이건 고을의 양반들이 사또께 올리는 서한입니다."
이방이 들고 온 서한 한 무더기가 내 책상에 쌓였다.
상소랑 달리 이것들은 다 읽고 굳이 답을 할 필요는 없는 거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면 고을 사또 노릇을 해 먹기 힘들어지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펼쳤다.
[진해현 유생 김남조가 삼가 아룁니다. 사또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시어,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니 온 고을 백성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소인이 지천명이 될 때까지 살아오면서 백성들이 이리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첫 문단을 읽고 나서 충격에 빠졌다.
양반들은 나 때문에 내야 할 세금이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기에 부담 좀 줄여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날 칭찬하는 소리를 하다니.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상소문을 계속 읽었다.
[사또께서는 가진 자들이 조금만 더 베푼다면 모든 이들이 큰 덕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덕이 모자라고, 미욱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고을의 웃어른 노릇하는 저희가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씀이 처음에는 싫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이전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참으로 후회됩니다.]
옛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즉, 양반들이 단체로 번개를 맞아서 하늘에 의해 최면 조교 당하는 게 아닌 이상 천성이 갑자기 바뀔 일은 없다는 거다.
대체 저놈들이 뭘 잘못 먹어서 이전의 행실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거지?
[사또께서 동천과 서사천에 물길을 내고, 보를 쌓으라 명하신 덕에 고을의 모든 전답에 물을 주는 것이 이전에 비해 한결 편해졌습니다. 덕분에 올해의 농사는 풍년이 들었고, 소인은 사또께서 세금을 늘리셨음에도 이전보다 1할(10%)나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시장이 생긴 덕분에 이전처럼 종들에게 새끼줄 꼬게 하고, 짚신 삼게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시간이 남는 종들을 시켜서 황무지를 개간케 하여, 토지를 더 넓힐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서 드디어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이 갑자기 머리에 총을 맞아서 착해진 게 아니라니 말이다. 처음에 세금 뜯어갈 때는 뜯기는 것이 매우 억울했는데...
막상 내고 나니까 자신들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기에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거잖아.
돈이 되니까 정신 차렸다는 거면 인정이지.
[더불어 사또께서 소인들을 교화하셔서 웃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이니, 백성들이 소인들의 나눔에 감사하며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이는 가문 대대로 전해질 큰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오래 이렇게 어진 정치를 펼쳐 주십시오.]
다른 상소도 적힌 문체나 인용되는 고사가 다르기는 했지만, 내용은 전부 다 비슷했다.
그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교육이나 양심보다 역시 돈이지.
세종대왕님 시절에는 촌구석에서 철로 된 갑옷이나 입고 다니고, 귀족들이라도 집이 넓기만 했을 뿐 조선 백성들보다 어찌 보면 열악한 곳에서 살던 유럽 놈들이 끝내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유는 딱 하나다.
조선은 사치,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을 죄악시했고, 유럽 녀석들은 그걸 전적으로 긍정했다.
내가 저들을 교화했다고 말하는 게 웃긴 것이, 저놈들이 정신을 차린 것도 사실 돈맛 보고 정신 차린 거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니, 갑자기 현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만 퇴청하겠네. 자네들도 급한 일이 없다면 퇴청해도 좋아."
"정말이십니까, 사또?"
"내가 무슨 정시 퇴청도 못하게 하는 귀신처럼 보이나?"
"그건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보장하는 사람이다. 급할 때 말고 말이다.
물론, 조선시대 행정이라는 게 21세기처럼 빡세게 일하는 게 아니다. 9시 출근해서 6시까지 오직 일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출근한 다음에 공문서 손 볼 거 오전에 다 손 보고, 오후에는 급한 일이 없으면 설렁설렁하는 게 기본이지만...
나는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생각하여 아전들을 굴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도 좋네."
그 말을 하고 나는 노비 돌쇠만을 데리고 장터로 향했다.
저들이 사는 모습이 어떠한지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
오늘은 5일 장, 상인이 아닌 백성들도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장터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돌쇠야, 원래 장터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냐?"
"예, 사또."
"사또라고 부르지 말고, 여기서는 도령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내가 사또라는 걸 알면 시장 분위기가 갑자기 죽어버릴 거다.
사단장이 뜬 것처럼 분위기가 콱하고 죽어버리거나 얼어버리지는 않겠지만, 평화롭던 대대에 '연대장'이 나타난 것처럼 엄격, 근엄, 진지해져 버릴 수가 있으니까.
"예, 도령님. 진해현 장터는 동래현은 물론이고, 주변 여러 현에서 상인들과 백성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조금 과장 보태면 사람 좀 많은 대형마트를 보는 느낌이다.
할인 코너처럼 싼값에 뭐 파니까 얼른 사라고 선전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면, 진짜 마트처럼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조금 시장하니, 개떡이나 하나 먹어야겠구나. 너도 먹을 거냐?"
"두 개 먹어도 됩니까?"
"세 개도 좋다. 네가 든든히 먹어야 내가 안전하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야기해라. 엿도 좋고, 국밥도 좋고, 뭐든 실컷 먹게 해주마."
이렇게 말하고서 좌판에 개떡을 파는 아줌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 개떡 4개만 주게."
"개떡 4개면... 쌀 반 홉은 주셔야 합니다...."
그 말을 하던 개떡을 파는 아줌마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사또께 어떻게 개떡값을 받겠습니까?"
"아닐세, 받게."
"안 됩니다. 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도 주인 은혜를 알고 도둑이 오면 물어뜯는데. 사람 된 도리로 얼마 되지도 않는 개떡값을 사또께 받다니요."
사또라는 말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일제히 쏠렸다.
"사또께서 오셨다고?"
"아이고, 사또 감사합니다. 사또께서 저희 마을에 오신 덕분에 저희 집 애들이 배를 안 곯고 삽니다."
...... 나는 시선을 돌려 돌쇠놈을 바라봤다.
"종놈 팔자도 모시는 주인에 따라 달라진다고, 저도 고을 장터에서 먹을 것을 좀 살라치면. 늘 덤으로 개떡 한 개라도 더 받고 그랬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그만큼 사또를 좋아하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돌쇠 녀석까지 말을 거들자, 시장 백성들이 하나둘 나를 중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또, 쇤네가 끓인 국밥이 맛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또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게 해주십시오."
"이 여편네가 끓인 국밥 한 그릇 드시고 제가 정성껏 말린 곶감도 하나 드셔주십시오."
나는 성격이 모질지를 못하다. 저런 거 주겠다고 하면 ‘관아에 갖다 내도록.’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거절을 못 하겠다.
저 눈빛 봐라, 내가 아전들에게 말해서 시장에 오겠다고 먼저 알린 것도 아닌데... 알아서 맛있는 거 드셔보시라고 진심 어린 권유를 하고 있잖아.
"오늘만이네. 그리고 음식값은 다 낼 것..."
"아이고, 사또."
"...... 잘 먹겠네."
이날 나는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정이 깊은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닭 두 마리, 쌀 2홉(밥공기로 치면 4공기)에 국밥, 곶감, 북어 2마리, 엿, 개떡 4개, 앞바다에서 채취한 전복 등등...
배가 터지도록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정에서는 나에게 거관(다른 벼슬 자리로 이동)하라는 명을 내려왔다.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고작 이 정도만 해놓고 다른 곳으로 가라 하는 조정이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