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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을 보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멈췄다.
나 김대붕, 조선의 양반으로서 무려 18년 아니 19년이 넘도록 살아왔기에 감정의 동요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졌음에도.
눈앞에 아리따운 소녀가 나타나자 선비답지 못한 반응을 보여버렸다.
남의 집 귀한 딸이 인사를 하는데 아무 대답도 없이 멍을 때리는 추태를 보이다니.
제법 긴 시간 동안 멍 때리고 난 뒤에야 정신을 추스른 내가 물었다.
“...만덕, 이 소녀가 자네의 여식인가?”
김만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여식입니다.”
“그렇군.”
나에게는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한국에서도, 조선에서도 또래 여자와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거다.
또래 여자와 제일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기록이 기껏해야 10분 정도다. 그것도 알바 후배로 들어온 여자애한테 편의점 포스기 보는 법 알려주기 위해서 그랬던 거지.
따라서 또래 여자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다 보니 이런 미녀를 보면 순간 판단력이 정지된 거다.
지금도 내 19년 선비 내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지, 조금만 긴장을 풀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발이 따로 움직이는 이상한 놈이 되어버릴 것 같다.
김만덕은 내 심정이 어떤지 훤히 아는 사람처럼 씩 웃으며 자기 딸에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충군애국하는 마음만 있으면 이 애비 같은 한낱 상인도 중히 여기시는 덕이 높으신 분이다. 더불어 백성들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시며, 청렴결백하시기에 선물조차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지.”
“저도 주변에서 그렇게 들었습니다.”
“시장을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을뿐더러, 우리 상인들에게는 떳떳하게 장사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주셨으니 이 아비에게는 각별한 은인이시기도 하다. 그러니 아비의 은인이신 사또께 네가 술 한 잔 따라 올리도록 하여라.”
아비의 명을 따라 김겨울은 술 한 잔을 내게 올렸다.
별 하나 없어 칠흑 같은 밤하늘처럼 검고 깊은 눈동자, 단정하게 빗어넘긴 풍성하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 그 머리 뒤로 살짝 보이는 눈부시게 하얀 목덜미.
무엇보다도 F, 아니 적어도 G컵은 될 것 같은 가슴. 전생과 현생에 걸쳐서 여자와 인연이 없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광경이었다.
그녀는 술을 다 따른 뒤 나를 보며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인자하며 덕이 높다고 널리 알려지신 사또를 직접 뵙게 되니 과연 세간의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리 덕이 높은 사람이 아니네.”
내 말에 김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말은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를 포함한 모든 고기를 좋아하시는 세종대왕님께나 어울리는 말일뿐. 나는 그저 고을 사또 일을 잘 마무리하는 선에서, 적당히 사직하고 싶은 속물일 뿐이니까.
“우리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밥을 굶지 않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되겠는가? 우리 현에 사는 백성 중에는 지금도 움집에 사는 이가 많이 있다네. 이 또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더불어 저들에게 쌀밥을 매일 배불리 먹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보리밥 정도는 배불리 먹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제 겨우 저들 입에 밥 한 숟가락 떠넘겨준 정도밖에 해낸 것이 없지.”
조선의 선비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이렇게 반응할 거다.
‘저놈은 왜 저렇게 목표가 높아?’
그게 맞다. 나는 무심코 조선의 상식이 아니라, 21세기 현대의 상식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나까지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내가 손을 뻗어주기만 해도 당장 수백, 수천의 고을 사람들이 희망을 찾으며 기뻐해주니까. 그걸 보니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게 되었다.
“사또께서는 그리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네.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 어찌 덕이 높다 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인자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김겨울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인사를 한 뒤에 자리를 물러갔다.
김만덕은 나의 기색을 살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제 여식이 사또께 혹 실례를 범하였다면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를 칭찬하고자 한 말인데, 어찌 내가 나쁘게 여기겠는가? 그리고 나는 기쁘네. 내가 하는 일이 고을의 가난한 백성뿐만 아니라, 자네 에게도 좋은 일,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 이는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 가치관대로 살아가라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나는 100번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또들처럼 송사나 적당히 처리하면서, 양반들 편들어주는 대가로 뇌물 받아먹고, 영웅호색이니 운우지락이 마땅하다며 기생들 손대고 그러면서 일 처리를 대충하는 짓 따위를 하지 않았다.
출세하려는 욕망이 가득한 자면 나처럼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나는 그럴 맘도 없으니 이상하긴 이상하다.
그냥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름 사또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그런데 남들까지 이걸 인정해 주다니 얼마나 좋아.
"밤이 늦었으니,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예, 사또."
"우리 고을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치수를 위해 보(저수지)를 만들어서, 밭에 물을 대기로 했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고을의 선비들을 정성껏 설득하니, 저들이 자진하여 고을의 백성들을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네."
물론 그 설득 과정에서 놈들이 조작한 세금 장부를 그대로 이방원에게 올려 버리겠다는 협박을 좀 섞었지만...
그래도 나는 직접적으로 ‘장부 올리면 너희들 다 죽는 거야.’라는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마을 선비들이 멋대로 자기들이 '정학소' 당할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건 협박이 아니라 진심 어린 설득이 되는 거다. 만약에 다른 누가 ‘이건 협박이야!’라고 항의한다면... 그때는 내가 사또(진급 포기함)의 힘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동천과 서사천을 비롯한 곳에 보를 쌓을 것이네. 노역에 참여하는 백성에게는 일한 만큼 환곡을 깎아주는 것으로 일당을 갈음하려 하네. 이걸 고을 창고에 비축된 예산을 써서 하면 세금이 빠르게 소진되겠지만, 그건 고을의 양반들이 다 대주기로 하였네. 더 나아가서, 노역에 참여한 이들의 끼니도 양반들이 대줄 것일세."
몹시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가뜩이나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합법적 수단, 불법적 수단 다 가리지 않고 탈세하던 놈들의 배를 가르는 대신...
저들이 탈세할 뻔한 돈을 관아에서 회수하여 공공사업에 쓰게 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양반들도 처음에야 돈을 뜯기니 기분이 안 좋겠지만, 물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 엄지를 척하고 들 거다.
"저들이 이렇게 선심을 쓰는데, 백성들도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나? 예를 들면 송덕비 같은 걸 세워서 말이야."
송덕비라는 게, 사실 주딱, 파딱, 고닉들의 업적을 적어서 그걸 공지로 띄워놓는 거다.
거기에 종종 공지 순위를 갱신하여 일주일 뒤, 보름 뒤, 한 달 뒤에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거지.
물론, 갤러리 활동하는 고닉과 유동들이라도 공지를 다 읽는 건 아닐 뿐더러, 백성 중에는 한자로 된 송덕비를 세우면 못 읽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만... 그래도 공지에 내가 한 업적이 걸려 있으면 얼마나 좋아.
하물며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선비라면 더더욱 못 참지.
"저에게 백성들을 직접 움직여서 송덕비를 세우게 만들어라,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않겠나. 백성들이 환곡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양반들이 나서서 저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것인데... 그걸 알고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사람인가?"
부자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 종종 기부라는 걸 한다. 어린이 복지재단에도 기부하고, 장애인 복지관에도 기부하고,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에도 기부한다.
저들이 기부하는 이유는 약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금을 줄이려 하는 목적이 크다.
기부로 100만 원을 하면, 세금이 110만, 120만 원 줄어드는데 안 하는 놈이 멍청이지.
그렇게 기부된 100만 원은 가난한 이들의 한 끼 식사가 되고, 추운 겨울을 따스하게 날 수 있는 난방비가 되어준다. 의도가 선하던 악하든 저들의 돈은 누군가를 구하는 데 사용된 거다.
기부한 사람의 의도가 저렇더라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감사하는 게 맞다.
못 받았으면 진짜로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그렇네. 그리고 저들이 앞으로도 '좋은 일'을 계속해 나갈 동기를 주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은 양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게 좋겠지."
기부를 많이 받는 방법은 감사를 잘하는 거다. 내가 보육원에 기부한 부자인데, 보육원에서 부자 생일을 기억하고 아이들 손으로 감사 편지를 쓰게 한 뒤에 그걸 보내 주면...
이왕 세액 공제받기 위해 기부하는 거 다른 곳이 아닌 그 보육원에 기부하고 싶을 거다. 아니, 세액 공제가 없더라도 기부하고 싶어질 거다.
사람이라는 건 감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지갑을 열고 싶어지는 본능을 가진 존재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를 고을 전체에 흘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주게. 그리고 자네의 성실함을 믿고 부탁 하나만 더하겠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진해현의 상인들이 자네가 한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올바르게 신고하도록 도움을 주게."
"도움 말씀이 십니까?"
"자산을 누락할 경우, 내가 직접 찾아갈 거라고도 말해주게."
부자라는 놈들이 불법적인 탈세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김만덕이 이렇게까지 협력해 주는데 나 또한 그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어야겠지.
"이만 나는 가겠네."
김만덕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그 집을 떠났다.
사또가 떠나간 뒤 김만덕은 어떻게 소문을 내면 가장 좋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