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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 보면 이방원이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있다.

‘흉년이 들었어도 세금을 평년과 똑같이 걷도록 하라.’고 말이다.

저 말만 들어봤을 때는 이방원이라는 사람이 백성들을 쥐어짜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안 좋은 버릇 때문인데.

세금은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서 이 시기 조정에서는 관리들 점심도 안 줬을 뿐 더러, 사또들은 중앙에 납부하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흉년이 아닌데도 흉년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진해현이라고 안 그럴까? 그럴 리 없지.

이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인조 그 양반이 전세를 풍년, 흉년 상관없이 하하년, 즉 흉년으로 간주하고 토지 한 결에 쌀 4두만 걷는다는 영정법을 만들 리가 없으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사또?”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제가 본 고을 세금 장부는 작년의 벼농사가 분명히 평년작(흉년도 아니고 풍년도 아님) 이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세금 장부를 보면 비가 충분히 오지 않아, 토지 1결에 200두 정도밖에 못 거두었다고 흉년이라 적혀있더군요.”

세종 시대에는 논에서 농사를 짓는 논농사가 보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비료를 주는 시비법이 발달하였기에 더 이상 쌀농사를 짓는 데 휴경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회 혼란도 안정되었기에 수확량은 제법 많이 늘어났고.

그 결과, 농사를 지으면 1결에 쌀 300두, 쌀 20섬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흉년이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현재 조선에서는 수확한 쌀의 1할(10%)을 전세(토지세)로 걷으니, 원래대로 라면 1결에 30두의 세금을 내야만 하는데... 우리 고을은 흉년이라는 이유로 200두를 수확하였다 하고 20두를... 아니오, 전임 사또와는 흉년을 이유로 17두만 걷는 것으로 합의하셨더군요.”

“...... 사또. 사또 이건 관행입니다.”

조선은 세금을 적게 걷는 것이 무조건 좋다고 신봉하는 나라다. 그러니 조정이 돈이 없어서 쩔쩔 매개 만든 머저리가 영의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류정현 그 작자는 조말생처럼 법에만 안 걸렸을 뿐이지, 고리대금으로 사람 여럿 때려잡은 놈이다.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놈들이 재정 확보에 미친 이방원 앞에서 세금을 속였다는 것이다.

“저는 말입니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하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관직에 집착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전하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진력했을 뿐이지요.”

사실 나는 세종에게 황희 정승처럼 굴려지기보다는 하루빨리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내가 맘대로 사직을 청했다가는 세종대왕님께서 황희나 허조, 아니면 조정 재상들 가운데 누구든 나에게 붙여서 정신 개조를 시도할 것 같아 못하고 있는 거지.

황희가 나보고 입만 산 놈이라면서 직접 교육해 주겠다고 말했었는데.

내가 그럴싸한 명분도 없이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는 것을 가만둘 리가 없다.

그러니 죽어라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부조리 한 개만 치워도 수많은 백성이 편해진다. 저들이 기뻐하는 미소도 아름답다.

“저는 이 고을에 부임한 이후 단 한 번도 부정한 이익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사헌부에서 저를 역모로 엮을 의도만 가진 게 아니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 결백함은 밝혀질 것입니다.”

아전, 상인, 사또인 나도 사실 적당히 챙길 것은 챙겼다.

다른 사또들이 챙긴 것에 비하면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한양에 기와집 한 채 살 정도의 재물은 쌓아 논 상태다.

이 정도도 안 받으면, 상인이나 아전들이 나를 청렴결백 귀신이 들린 악귀로 볼 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챙긴 수입은 조선의 법으로는 절대로 심판할 수가 없고, 기소조차 안 되는 ‘합법적 수입’이다.

즉, 사헌부에서 내가 전임 수령을 엿 먹이는 게 괘씸해서 괘씸죄로 고소한다 해도 파직당하는 것으로 끝일 뿐이지. 더 이상의 징계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놈들은 어떻게 될까?

“진해 현감으로서 제가 알아낸 이 불충한 사실을 전하께 장계로 정리해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몹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 사람들은 세금 걷는 일에 목숨 건 이방원 앞에서 감히 임금을 속이며 세금을 횡령한 작자들이다. 따라서 정학소처럼 끔찍한 꼴을 당할 확률이 몹시 높다.

이건 조선에서 천자문 정도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유추할 수 있는 상식이다, 상식.

나에게 관행이라고 이야기하던 선비가 무릎을 꿇었다.

그가 꿇자 다른 선비들도 똑같이 따라서 했다.

“사또,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또 말씀을 잘 따르겠습니다.”

“넉넉한 저희가 조금만 더 부담하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가 있는데. 이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부끄러울 뿐이 옵니다.”

이들이 세금을 더 부담하게 만들어 놓으면 고을 백성들 살림살이는 확실히 나아질 거다.

무거운 공납이지만 저들이 좀 많이 부담해주면...

잔잔호, 그러니까 땅 한 마지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난한 이들이 지는 공납 부담을 그만큼 덜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옳게 된 세금 정책이지.

당장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가난한 이에게는 조금 덜 걷고, 부자들에게는 그만큼 더 걷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저들과 싸우게 된다면 한순간이야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만...

내가 진해현의 파딱이라면, 저 녀석들은 갤러리에서 이름 좀 날리는 고닉들이다.

즉, 저놈들이 분탕을 쳐대면 고을 전체가 개판이 될 터.

그것 말고도 내가 시행한 ‘가진 놈이 조금 더 내기’ 정책이라는 게 사또가 바뀌게 되면 바로 폐지가 되어버려 백성들의 삶이 다시 힘들어지게 될 터이니...

채찍으로 기강을 잔뜩 잡았으면 당근도 줘야 하는 법.

“덕망 높으신 우리 진해현의 선비님들께서 저에게 힘을 보태주신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도 여러분들께서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주시는 것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겁니다.”

“현의 백성들이 저희가 이리 위해준 것을 알고 고마워한다고요? 그렇다면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반들이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표정은 아주 썩어 있다.

내가 저들의 기부를 백성들이 알아줄 거라고 했지만 그게 자신들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냐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 뭐 내가 저놈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줄 생각 따위 없고 세금을 줄여줄 생각도 없고. 뭐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조선의 선비라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걸 줄 생각이다.

선비라는 작자들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던지는 족속들이니까.

“여러분들이 공납을 많이 부담하시는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진 백성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 푼, 두 푼 아낀 것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지 않겠습니까?”

송덕비라는 말에 고을 선비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까지 표정이 다 썩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말이다.

명예에 목숨을 거는 선비들에게 가문 대대로 자랑할 만한 업적을 써서 송덕비를 세워 준다니... 저들이 저리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막말로 선비들이 죽을 위기까지 무릅쓰고 과거를 보러 가는 건 단순히 '벼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나처럼 양반으로서 명예를 챙기려고 가는 목적이 더 클 정도로 선비들에게는 명예가 중한데.

고을 선비들이 훌륭하고 대단하여 송덕비를 받는다? 저놈들 가문 대대로 자랑할 거리가 되기에 저 녀석들에게는 남는 장사가 돼버린다.

"송덕비 말씀이십니까?"

"송덕비는 원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우는 것이니... 확신까지는 못 하겠지만, 한낱 까마귀도 자기를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는 법인데. 글자와 사서삼경을 모를 뿐이지, 여기 계신 선비님들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배운 현의 백성들이 그 정도 감사도 표하지 않을 배은망덕한 자들로 보이십니까?"

사실 모든 송덕비라는 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건 아닐 거다.

어떤 사또가 백성들에게 잘해주고, 양반들 비위도 잘 맞춰 주면... 다른 사또들도 보고 잘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양반과 백성들이 합의하여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내가 양반들에게 세금 좀 더 내라고 시켰으니 대신, 관노비를 쓰든 누구를 쓰든 송덕비를 세우자는 여론을 선동할 생각이다.

송덕비 세우는 데는 돈이 꽤 많이 들기는 하지만, 고을 백성들이 한 푼, 두 푼 모으면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닐 뿐 더러... 쟤들이 대신 내주는 1년 치 공납 세금이 송덕비 값의 몇 배는 될 것이기에.

저들이 명예 챙기려는 목적이 훤히 보이는 선의를 베푼 것이라 해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양반놈들이 보람을 느끼고 이 짓을 계속해 줄 것이다.

지금은 공납 좀 많이 내라고 할 뿐이지만, 다음에는 고을을 위한 공공사업에 돈이랑 노비 노동력 좀 투자하라고 할 거다.

저수지만드는 데 고을을 위해서 희생해라 같은 걸 시킬 거다.

"...... 흠흠."

"조정에도 아주 아름다운 사례로 제가 장계를 올릴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저희가 조금 더 세금을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잘못된 토지세까지 바로잡고 싶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다.

이 정도만 해도 백성들을 괴롭히는 세금을 많이 정리한 셈이다.

더러운 걸 다 치우지는 못했어도 꽤 사람 살만해진 거지.

"자, 그러면 오늘은 여러분들의 헌신과 결단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제가 여러분들을 대접하고자 합니다. 조촐하지만 많이 드시고 이 자리를 즐겨주십시오."

이게 바로 양반과 사또가 협력하는 고을의 바람직한 사례 아니겠어?

사또는 양반들에게 ‘자진납세’를 받아서 고을 백성들에게 필요한 공공사업에 극빈층 구제까지 하고, 양반들은 칭찬받는 거 말이다.

돈 뜯기는 것이 당연히 아니꼽게 보이겠지.

그런데 저놈들이 뭐 어쩌겠어.

더불어 송덕비를 세우는 건 어쨌든 박제 당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저놈은 아주 훌륭한 놈이니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사재를 털어서 백성들을 도울 겁니다.

심지어 이걸 자기 후손, 친척들까지 자랑스러워하니 그만둘 수도 없고 말이다.

수령이 바뀌어도 저들은 규모의 차이는 달라질지언정, 백성을 위해 자산을 헌납할 수밖에 없지.

물론 명예도 얻어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