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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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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저점매수(2)

“에녹!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니?!”

“제벨라 누님……?”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오러 수련만 좀 하고 개백수마냥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살짝 스커트를 들어 올린 제벨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스텝을 밟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평소에는 집무실이 됐건, 본인 방이 됐건 항상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제벨라가 별일 없는데도 외출한 것도 놀랐지만.

언제나 품위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미소 정도만 짓던 제벨라 아닌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통통 튀어오는 모습에는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가요 제벨라 누님.”

“후후. 에녹도 참. 전부 네 덕분이란다.”

“네?”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의 뒤를 반보 뒤에서 따라오던 아론 집사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과감한 결단으로 자하브의 재정난을 해결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허?”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여전히 헤실거리는 제벨라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에녹 네가 받기로 한 친구비? 라는 게 있잖니. 정말 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우애의 증거를 보내왔단다.”

“아.”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지금이 친구비를 받기로 발표한 직후라면 모를까, 슬슬 아무것도 안 하는 내게 실망해서 한소리 나올 쯤일텐데?

“설마 아직도 친구비를 보내오는 곳이 있는 겁니까?”

“있다마다! 약간 규모가 부족한 이들은 줄까지 서가며 서신과 금화 주머니를 보내올 정도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어머?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니?”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제벨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그거야 에녹 네가 자하브의 황금기를 다시 가져다줄 사람이기 때문이잖니.”

“……제가요?”

“그래.”

“……황금기를요?”

“그렇단다.”

“……왜요?”

“왜기는. 요즘 나도는 소문을 한번도 못 들어 봤니?”

어깨를 으쓱인 제벨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 심상치 않은 수식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선조회귀, 금빛 태양, 흑마법 학살자, 고귀한 짐승, 그리고…….”

“거, 거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누님.”

하나하나가 낯부끄러운 중2병 감성의 별명에 손발이 절로 뒤틀렸다.

물론, 제벨라가 나를 의도적으로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원래 이런 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중2병스러운 타이틀? 이건 그냥 순수한 칭송의 증거일 뿐이다.

즉, 정말로 세간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엄청나게 올려 치고 있다는 소리.

“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 저 요즘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으응?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 아니니. 이제 막 소문에 불이 붙을 시기란다.”

“……!”

그렇다. 마법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특권층에게 허락된 편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서신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처음에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들의 집안에만 퍼졌던 정보가.

슬슬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평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

그 결과 일차적으로 친구비를 보내왔던 이들이 잠잠해질 무렵, 소문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친구비를 보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게 뭔……? 잠깐, 그래도 처음 친구비를 보낸 곳은 불만이 많겠죠? 제가 아무런 대응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요.”

“그럴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자하브와 연을 텄다는 것을 사교계에 자랑하고 있단다.”

“……혹시 사교계에서 제 소문이 퍼지고 있다던가?”

“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중앙 사교회에서는 에녹 네가 참 뜨거운 감자라는구나. 협력 관계를 맺은 코넬리아 황녀님께서 직접 서신에 담은 내용이니 확실하단다.”

“…….”

이제 알았다. 그냥 제국이 내 적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거였구나.

아니, 억빠인가?

머릿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것도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귓가에 제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이렇게 잘 되고 있지만……한가지 고민이 있어 이렇게 에녹 널 찾아왔단다.”

“네? 고민이요?”

“그래. 에녹. 내 동생아. 네가 이 누이를 믿고 대소사를 맡겨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하기에 너무 큰 일 같아서 말이야.”

그리 말하며 제벨라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서신 하나를 꺼냈다.

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종이가 아니라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일 터.

다만, 제벨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내 직감도 잠잠한 걸 보아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닌 모양.

“이 누이가 읽어줄게. 잠시만 기다리렴?”

“아뇨.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읽을 줄 알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문맹은 탈출했다는 생각에 약간 으스대며 제벨라에게서 서신을 뺏어 들듯 가져왔다.

“어머나…….”

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제벨라.

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그 시선을 피하고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대충 요약하면 친구비를 많이 줄 테니, 자기들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를 치워달라는 내용.

“아니, 저 일단 대공 아닌가요. 용병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단 끝까지 읽어보렴. 그럼 이해하게 될 거란다.”

“예, 뭐.”

본론을 지나 형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구체적인 금액 부분을 읽었다.

“……100만 골드요?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가요 제벨라 누님.”

칼립소가 일종의 수용소긴 하지만, 브로커를 통해 외부와의 은밀한 교류 정도는 있었다.

당연히 반쯤 고립된 곳이라도 금화는 제대로 화폐로서 성립했다는 소리인데…….

온갖 범죄가 판치는 암흑가의 물가에 익숙해진 내게도 100만 골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금액이다.

일단 내가 한창 암살자 길드에게 쫓기고 있던 당시, 내 목에 걸린 의뢰금이 10만 골드였던 건 기억하지만.

내 질문에 제벨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러네……100만 골드라면 자하브 성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단다.”

“???”

자하브 성은 주기적으로 터지는 던전 역류를 막아 세우기 위해,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성이다.

자재 그 자체도 비싸고, 쌓아 올린 성벽에 인챈트 하는 마법은 더 비싼. 장담컨데 같은 무게의 금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수준이다.

……순금으로 된 동전을 몇십만, 몇백만 단위로 거래할 만큼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금이 흔하다지만, 이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인 건 사실이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겨우 친구비로 줄 수 있는 곳이……이그나투스?”

이그나투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자하브에 들어온 뒤, 최소한의 제국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게 아니더라도 칼립소에서도 이름이 들릴 만큼 유명한 곳이기 때문.

그도 그럴 것이…….

“서부의 대공이 직접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요?”

“그런 것 같구나.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도 허언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 에녹 너를 찾고 있었단다.

이그나투스 대공.

지금은 멸문한 칼립소 대공이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달고 있는 자하브 대공의 자리처럼 제국의 4대 대공 중 하나이자, 서부를 다스리는 자.

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며, 비극의 신에게서 살아남은 최후의 드래곤.

말이 대공 가문이지, 살아있는 다른 드래곤이 없기에 이그나투스 본인의 대에서 끝나는 일대작위나 다름없지만…….

애초에 이그나투스는 제국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 그리고 별일 없다면 앞으로도 천년은 우습게 살아갈 장생종이다.

당연히 쌓아놓은 재산은 차고도 넘친다.

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경제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황제가 매번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참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런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는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일 터.

……그중 딱 1만 골드만 슬쩍해도 평생 놀고먹을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자하브 대공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대비한 비자금.

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이젠 같은 대공이잖아요? 인사도 한번 해둬야겠고요.”

“에녹 네 뜻이 그렇다면, 조만간 찾아가는 것으로 답장을 넣어두마. 그 사이에 이그나투스 대공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자세한 사정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설마 대리인이 여기 와있나요? 벌써요?”

남부와 서부의 거리, 그리고 소문의 확산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 빠른 시기다.

설마 아직 대답도 못 받았는데, 대리인부터 보낼 줄이야……마탑주이자 드래곤이니까 텔레포트라도 쓴 건가.

내 질문에 제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런 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이그나투스 대공의 322번째 제자가 아카데미의 졸업반이었지 뭐니. 심지어 유리아의 룸메이트기도 하단다.”

“……제자가 많네요?”

“아무래도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겠니.”

하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322명의 제자밖에 안 들였다면, 오히려 적게 들이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죠.”

“잘 생각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 누이에게 말해주렴.”

그리 말하는 제벨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유리아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자하브 성에 있는 방이 아니라, 바깥에 마련해 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숙소의 방 말이다.

룸메이트라고 하니, 같이 있겠지.


자하브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 기숙사를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솔직히 좀 두근거리더라.

……그 뒤에 찾는 것이 여동생의 방이라는 게 영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유리아의 방문을 여는 순간.

끼이익.

“있잖아 메이킨. 드래곤은 도마뱀처럼 총배설강이야?”

“……절대. 절대 스승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리고 제자인 내 앞에서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비 거는 셈이거든?!”

“에이. 메이킨 너도 우리 오라방 길이가 몇 센티인지 궁금해했으면서.”

“키 이야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갈색 머리의 소심해보이는 인상의 소녀, 메이킨과 눈이 마주쳤다. 총배설강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이그나투스의 제자이리라.

“크흠. 일단 내 키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따로 재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

“네가 메이킨이지? 이그나투스 대공의 서신을 받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

“…….”

“으음……아무래도 걸즈 토크 중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았으려나?”

내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끼.”

“응?”

“끼야아아악!!”

메이킨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작게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폭풍. 그리고 메이킨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옷가지와, 그사이에 숨어 몸을 둥글게 만 햄스터만이 남아있었다.

“오.”

변신 마법도 쓸 줄 아나 보네.

참고로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속옷은 회색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며 햄스터가 줄줄 흘리는 눈물에 젖어 살짝 색이 진해진 회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