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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어머. 그러니?”
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달그락.
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감……인가요.”
“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푸흡!”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예?”
“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흐.”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이건 뭐, 말 다 했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그래도 되겠니?”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이거라면……!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 그렇다면야…….”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쿠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아아아아아!
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브렌트 교관?!”
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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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