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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분명히 방금까지, 히스토리에가 초코빵을 움냠냠 먹으며 빵가루를 지식 주머니 위에 떨어트리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빵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활기가 넘치는 제국 수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건.
짙은 회색 조로 필터링을 덧칠한 듯한, 삭막한 풍경.
초록색이 완전히 거세된 들풀들,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 그리고 무너져 폐허가 된 건축물 비스름한 것들.
뭐지.
칼라 조금만 덧대면 누카 콜라가 나올 것 같은 배경은.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지만 레이더들에게 시달리는 이곳 정착민들만큼 끔찍하진 않겠죠’를 속삭이면서 맵에 핑을 찍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풍경이었고,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생각보다 나는 심리적으로 평온했다.
아마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 주는 스킬, 헥토르의 용기 덕분이겠지.
옛말에도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렁이 각질을 잘 챙겨놓는 건데.
당장 어떻게 처분할 방법도 없었고, 또 선물로 받은 걸 아무렇게나 보관하긴 좀 그래서 지퍼백에 넣어서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게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다음번부터는 그냥 들고 다녀야지.
아예 목걸이로 만들어서 끼고 다녀야겠다.
다음번…… 있겠지?
스스로 확신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사위를 꺼내 굴렸다.
다행히 오늘은 쓴 적이 없었으니.
적당히 내 미래를 엿볼 수 있으리라.
내 결단은 ‘살아서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
주사위의 눈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군.”
5 정도면 대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길이라고는 얘기해 볼 수 있으리라.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
.
.
처음으로 이 낯선 공간에 진입한 곳을 기점으로 해서,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듯 걸어 다니며 이 환경을 파악한 결과.
온통 똑같은 잿빛 풍경만이 이어졌고.
역시 생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여기는 높은 확률로 마경.
공간이동 당하기 전에, 근처에 균열이 있었으니 확실할 것이다.
균열에 닿은 것도 아닌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호로록 빨려 들어올 줄이야.
그래서 주변에 굴러다니는 잿빛 나뭇가지 중에서 튼튼하고 실한 놈으로 하나 주워다가 단단히 쥐고 있었다.
비록 스킬 합성에 소모해 버린 나머지, 헤라클레스의 봉술은 내 손을 떠나가고야 말았지만.
그때 실전에서, 그 이후로도 운동 삼아 휘두르면서 어떤 궤적이 가장 이상적인 궤적인지는 충분히 체득해 두었다.
굳이 스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 만약 내가 이 상태로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면, 개크보를 정복하는 천재 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자이언츠는 거른다.
거기는 오타니가 가도 안 될 팀이니까.
부웅──
부웅──
몸에 살짝 긴장감을 끼얹기 위해 홈런 스윙을 돌려주면서, 점차 먼 거리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
“윽.”
딱 봐도 몹시 인간에게 적대적일 것 같은 곰처럼 생긴 검은 형체가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곰을 상대하는 비법 레시피.
첫 번째. 위협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아주 천천히 뒤로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
“아, 씨.”
실패.
나를 ㄱ/ㅣ/ㅁ/ㅇ/ㅠ/ㄹ로 쪼개버리겠다는 일념만으로 똘똘 무장한 듯, 곰은 우렁차게 포효를 지르며 내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좆됐다.
도망칠 수 있는 각도 없었고.
나 대신 곰을 잡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흐아아아!”
침착하게, 돌진하는 곰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노려서.
방망이를 힘껏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 순간.
내 몸에 전에 없었던 활력이, 강인함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곰 따윈 몽둥이가 아니라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
아무런 손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으려고 달려들던 곰의 머리가 형체 없이 뭉개졌다.
머리 잃은 곰의 형체가 곰문곰문곰문 데굴데굴 구르……진 않았고.
그냥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르르 녹아내림과 동시에.
“윽.”
몸에 넘쳐흘렀던 활력이 스르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런 현상을, 나는 이미 겪어본 적 있었다.
이전 양아치 친구들을 상대로 처음 헤라클레스의 봉술을 응용해 보았을 때와 정확히 같은 감각.
[……너는 누구를 상대로도, 단둘이 대적하였을 때는 자신이 지닌바 최대한의 잠재력을 초월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숭배합니다, 헥토르시여…….”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하루 3빡을 실시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새기면서, 다시 걷고, 또 걸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보이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
.
.
“아오, 씨…….”
개 같이 굴렀다.
물론 히드라나 탈로스와 같이, 세레핀이 마주했다던 신화 속 괴물을 닮은 녀석들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온갖 종류의 짐승을 닮은 것들, 때로는 사람을 닮은 것들까지 튀어나와서 나를 공격해 댔다.
다행히 상처 입은 곳은 없었지만, 온몸의 근육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최근에 열심히 운동을 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옷걸이로 쓰고 있던 실내 사이클까지 꺼내서, 히스토리에가 쏘아대는 눈총을 감내하면서 다릿심을 기르고, 덤벨도 열심히 으럇으럇 들어대고, 푸쉬업도 하고.
아침마다 조깅, 가끔은 새벽에 야깅을 뛰면서 체력을 증진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
“아, 씨. 깜짝이야.”
내게 다시금 달려드는 늑대를 닮은 그림자의 대가리를 콩 쪼갰다.
그리고 확실히 체감한 것은.
헥토르의 용기는 변동성이 강한 스킬이었다.
곰을 상대할 때는 곰에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늑대를 상대할 때는 늑대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딱 레벨 스케일링에 맞춰져서 내 신체가 강해지는 느낌.
게다가 1:1 상황이 아니면 힘이 강해지지도 않았으니.
아까 늑대 두 마리한테 쫓길 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어쨌든.
이런저런 고난과 역경 끝에 조금씩 마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오.”
뭔가 그럴싸한 유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하니 안에 잠든 고대 로봇이라거나, 미믹 같은 게 있진 않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체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왔다.
내 든든한 프렌드가 되어주었던 나뭇가지 몽둥이도, 슬슬 부러지기 직전이었고.
그를 대체할 만한 다른 병장기를 파밍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저기서 잠시 몸을 숨긴 채 주변 상황을 관조할 필요가 있으리라.
묘하게 그리스식 건축 양식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유적지의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Ἀπόλλων]
내 추론을 입증하듯, 그리스어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보였다.
애석하게도 내 전공은 서양사학이 아니라 동양사학이었기 때문에, 9개 국어 리스트에 그리스어는 없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라틴어였다면 완벽히 읽었을 텐데. 쩝.
그 외에도 무언가 고고학적 가치가 있을 법한 부서진 조각상들을 보며 군침 흘리면서,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사람……?”
다 무너져 내린 옥좌 위에, 잿빛 세상에서 오직 혼자만이 빛을 간직하고 있는 금발의 잘생긴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지더니.
“Τραγουδήστε την τέχνη.”
“…….”
금태양을 닮은 환한 미소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내게 발사했다.
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본 것인지.
“신실한 인간의 의지가 깃든 자여. 잊혀진 기억을 예술로써 노래하라, 그러면 다시 태양이 떠오를지니.”
금태양은 꽤 고풍스러운 말투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입을 떼어 무어라 반문하려는 순간.
그의 몸이 환한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뭐지?
환각을 본 건가?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으려니.
“어어……?”
사내가 사라졌던 곳으로부터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색, 암갈색, 청록색, 푸른색.
세상에서 사라졌던 색조들이, 조금씩 풍경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경에서 제국 수도로 귀환하기 위해, 대균열로 향하는 길.
“──!”
“────!”
“분명히 다 처리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처리되지 않은 마수들이 몇 마리씩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서 베어내며.
그는 끝없이 달렸다.
.
.
.
족히 두 시간은 넘게 전력 질주를 하던 세레핀이었지만.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레핀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대균열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전술적으로는 ‘유적’이라 명명하였던 곳이자, 마치 예지 능력이라도 갖춘 것처럼 까다롭게 모든 공격에 대응하던 거대한 뱀을 토벌했었던 곳.
당연하게 다른 마경의 풍경들과 같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곳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에는 잿빛이 아니라, 천연색이 감도는 풍경이 그림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대균열을 통과해 버렸나 싶어서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등 뒤로는 잿빛 마경이 펼쳐져 있었다.
3년 넘게 마경을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풍경은 처음 보는지라.
세레핀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유적의 중심부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 화려한 천연색의 중심에서.
“어어! 용사님! 용사님이다……!”
세레핀은.
너무나도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김율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