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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의 내부는 인파로 가득했다. 허나 인파에 비해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장엄한 기운을 풍기는 노사나불이 코앞에 자리한 탓이다. 뭣 모르는 민초들조차 불상 앞에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법이다. 누구 하나 경박하게 굴지 못했다.
간혹 복원된 불상에 감탄을 읊거나, 얕은 속삭임을 나누는 이들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서연은 복원록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비연천공보다 먼저 써내려간 첫 번째 서적이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당시의 심정이 생생했다.
기본기를 제대로 다진 각예가라면 누구라도 쉽게 통찰할 수 있도록 친절히 풀어 썼다. 훗날 제자들에게 각예를 어찌 가르쳐야 할지 복원록으로 미리 예행연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조금 더 옆으로 돌려 복원록 옆에 쌓인 종이 더미를 흝어보았다.
각예와 관련된 온갖 이론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낯선 것들이었다. 스승에게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던 탓이다.
‘다르긴 다르구나.’
자신보다 족히 곱절은 살아왔을 이들이다. 자신이 애써 풀어 썼던 친절한 설명들이 어쩌면 중원 무림에 오래전부터 이론의 형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재를 선측(先測)하여 접목하는 방식도 있고, 거푸집에 각예를 새겨 짜 맞추는 방식도 있구나. 헌데 저러면 각예의 운치가 반감될 터인데, 마땅한 방도가 있나……?’
본디 서연은 전체적인 얼개를 머릿속으로 잡아두고, 상황에 따라 무수히 변형할 수 있도록 각예에 대한 개념을 짜 두었다.
각예를 진행하는 도중에 재료의 속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흠결이 나타나더라도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연천공도 자연스레 각예의 영향을 받았다. 틀에 구애받지 않게 된 것이다.
산정들의 방식은 다른 듯했다.
탁자 위에 올라가있는 종이의 맨 윗장만 봐도 그랬다.
‘석굴과 비슷한 크기의 거푸집을 만들어내 한 번에 굳힌다니. 천생 야장이나 할 법한 발상이구나.’
어떻게든 기한을 맞추기 위해 고심 끝에 쥐어짠 방안인 듯했다.
종이의 맨 아래에는 그 방법조차 달포 안에 완성하기엔 아슬아슬하다 적혀 있었다.
이어지는 장에는 붓으로 온갖 난장을 벌여 놓았는데, 어린아이가 화풀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진정 화풀이로 그런 짓을 벌였겠는가. 필시 깊은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서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굴을 통째로 담금질하여 만들어내려 했다니…….’
그것도 달포라는 짧은 기간에 말이다. 날 때부터 장인이라는 종족답게 그 배포부터가 남달랐다.
비록 금속 공예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그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금속이 굳기 전에 모양을 다잡아야 하니, 시간만 놓고 보면 각예보다 훨씬 촉박하고 까다롭다던가.
“……지금 내게 감상을 물었나?”
산정 하나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
옆에서 듣고 있던 산정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족 여인이 활로를 찾아냈군.”
“어줍잖게 수준을 가늠하려다 오히려 조언만 늘어놓게 생겼네 그려.”
“초고수들이 어찌 야장일을 직접 배워 검을 보는 눈을 키웠겠는가? 만류귀종이라 했네. 경지에 이르면 안목은 저절로 피어나는 법이야. 필시 조각품을 견식한 경험이 적지 않을 터.”
한마디 한마디가 범상치 않았다.
음.
짧게 탄식한 산정 장인이 천천히 입술을 뗀다. 낭패를 본 듯한 기색으로.
“……참으로 정교하게 짜인 서책이네. 불가의 도리를 오랜 세월 탐구한 자나 알 법한 사소한 것들조차 빠짐없이 새겨져 있더군. 본디 각예라는 학문이 대부분 감각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책의 저자는 그 감각마저도 완전히 체화한 인물일 것이야.”
“감각마저 체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장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니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몰려왔다.
산정 장인은 복원록을 직접 펼쳐 보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을 보면 그 사실을 다시금 알 수 있네. 정확히 스물여덟 번째 장에 나와있는데, 노사나불의 진신을 크기에 관계없이 재현할 수 있도록 온전히 축척(縮尺)해 놓았더군. 기준을 한족 성인으로 잡아놓은 것을 보고 우리 씨족이 아님을 알았지만…….”
고명한 학사들에게 평가를 받는 학생의 기분이 이러할까.
‘그래도, 좋은 말만 들어서는 의미가 없으니.’
서연은 작은 미소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슬슬 비판이 나올 때가 되었구나.
곧 산정 장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허나, 정작 석굴을 감싼 만다라에 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더군. 본관은 그 의도가 아주 오만하다고 느꼈네.”
“오만……?”
상상치도 못했던 지적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오만하다는 것일까.
서연은 애써 충격을 감추고 산정 장인을 응시했다.
“저 끝없이 이어지는 만다라를 보게. 천하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석굴에 무한을 담아내려 했어. 요리에 비유하면 전채에 불과했던 배경이 다섯 장 크기의 노사나불을 압도했다는 말이네. 보통 이럴 경우 주객이 전도되기 십상이거늘, 신기에 가까운 기예로 그 균형을 이뤄냈지. 배경과 작품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야. 그러고도 노사나불에 관한 내용만을 적어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산정 장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복원록을 노려보았다.
“무공서로 치면 요결을 빼먹은 것이나 다름없네. 후인들로 하여금 만다라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게 하려는 요량이 아니고서야……!”
“이 친구, 또 흥분했군.”
산정 장인은 호통을 치면서 바닥을 가리켰다.
“당장 이 곡면부터가 말이 되지 않네! 사포로 갈아낸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곱고 부드러울 수 있단 말인가! 노사나불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고쳐낼 수 있으면 무엇하나? 만다라가 사라진 노사나불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은 것을!”
“거푸집으로 만들어 붙였다니까 그러네.”
“헛소리 집어치우게!”
서연은 어느새 자신들끼리 열띤 설전을 벌이는 산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예 알려주어도 따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리하지 않았을까. 당장 산정인 우리조차 몇 달째 머리만 싸매고 있지 않은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허공답보를 자유로이 펼치는 고수가 아니고서야 저 드높은 천장에 어찌 손이 닿았겠는가. 애초에 인세의 것이 아니야. 당시에도 선녀가 왕래했다는 말이 돌지 않았던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필시 비급으로도 남길 수 없는 요결이었겠지.”
“…….”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본디 노사나불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허나 작게나마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에, 불상에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배경을 깎아내었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허나 산정 장인의 말대로다. 진정 서책의 이름을 복원록으로 정했다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더해진 배경의 설명까지 온전히 담아냈어야 했다.
‘이렇게 또 배우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서연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아무튼, 본관은 감상을 마쳤으니 이제 자네가 말해보게나. 어디까지 알아들었는가?”
산정 장인이 짐짓 평정을 되찾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본관이 언급한 내용의 일 할만 이해했더라도 잘 들은 것으로 쳐줌세.”
“……들어보니 장인의 말씀에 틀림이 없습니다.”
“흠…….”
상투적인 대답에 산정 장인의 얼굴에 실망이 어린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노사나불이 주라 생각했습니다. 하여 괜히 배경에 관한 내용을 더했다가 본질을 흐릴 것을 염려하였지요. 듣고 보니 제 불찰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얌전히 듣고 있던 산정 장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변했다.
한순간에 좁혀지는 미간들.
낙양 부윤에게 노사나불을 복원한 각예가가 여인이라는 것 외에 마땅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 탓이었다.
황실에서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 여파였다.
한족이라는 것도 복원록을 보고 저들끼리 추측한 결과였다. 같은 씨족이었다면 한족을 기준으로 축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 때문이었다.
청목족? 그 자존심 강한 씨족이라면 필시 서책에서부터 특유의 기질을 숨기지 않았으리라.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가?”
장인들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당황하여 일갈할 생각조차 잊고 눈만 끔뻑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곧 나가야 하는지라, 당장에 다 적어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종이들이 가득 쌓인 탁자 앞에 섰다. 산정들은 기세에 밀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러나야 했다.
“음…….”
자연스레 서연이 정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빳빳한 표지에서 필사본임을 느꼈다. 원본은 낙양 부윤이 직접 관리하는 탓이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속으로는 만일 허풍이라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면서다.
이윽고 서연의 손에 붓이 들렸다.
여인의 손에 들린 붓이 일필휘지로 종이를 누볐다.
사악―
산정들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종이를 응시했다. 여인의 필체에서 명가의 기풍을 느꼈기 때문이다.
‘귀족가의 여식이라 그리 오만했는가.’
글쓰는 재주만큼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
첫 문장이 막 완성된 시점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이 감히 담을 수 없는 영감이 배어 나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내용이나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몇몇 산정들은 자연스레 자세를 고쳐 섰다. 미간이 다른 의미로 좁혀졌다.
'어찌 저런 공부를……?'
'중원 제일 석공이 제자를 새로 들이기라도 했는가?'
날 때부터 눈썰미를 타고난 씨족이다. 작은 손짓과 습관에서 묻어나는 삶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초고수들이 일검만 보고도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들의 능력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그중에서도 탁월하기로 손꼽히는 자들만 황실에 몸담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
문장이 한 줄 더해질 때마다 눈이 커지는 정도가 확연해졌다.
장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던 이들이 한 여인의 붓놀림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허어……!'
황실의 관리라는 체통조차 잠시 내려놓을 정도로.
그때, 낙양 부윤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뵙게 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은 몇몇 산정들이 입을 크게 벌리던 그 때였다.
두 장째를 써내려가던 붓이 멈췄다.
“아니, 음……!”
당황한 산정들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천상의 색을 머금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우웅―
땅에 피어오른 지맥이 공명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눈도 모자라 입마저 끔벅거리는 산정들이 적지 않았다.
여인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도 노사나불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여아들을 응시했다.
제자라도 되는 듯했다. 시선에서 더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뒤이어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관병들이 사람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은 그러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노사나불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일 각이라고 들었습니다. 낙양 부윤께서 필시 사고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그리하셨겠지요. 예외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어…….”
여인은 적다만 종이들을 고이 접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제 제자들을 이끌고 인파를 따라나섰다.
“언젠가 완성하면, 그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여인, 아니. 그들이 기다렸던 귀인의 옷자락이 스쳐지나갔다.
산정들은 입을 다물었다.
“…….”
망부석처럼 선 채였다. 떠나가는 귀인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