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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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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팽팽 굴렸다.

눈앞에는 이제 막 마음을 열랑 말랑한 토끼 한 마리가 앉아있다.

그래서 일단 내가 결론 내린 것.

정석적인 상담사의 길을 가자.

만족률이 더 높은 게 아닌 이상 후자를 선택할 이유는 크게 없어 보였다.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첫 번째 선택지를 확정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뭐야.

오랜만에 보는 시스템의 확인 메시지였다.

과거. 아직 내 능력에 서툴렀던 시절 진세아를 상대할 때나 가끔 나타나던 것이었다.

마치 '더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정말 이 힘든 길을 갈 거임?'라고, 나를 유혹하며 떠보는 듯했다.

아니 만족률이 더 높은데 어쩌라고….

‘응, 할게.

내 결심을 확인한 시스템 창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나는 눈앞의 루나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붉은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내 말에, 루나는 대답 대신,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라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우유 거품이, 그녀의 입술에 하얗게 묻었다.

순간, 자화연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저 거품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그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찻잔을 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먼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제국에서는… 혐오하고, 또 경멸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요.”

루나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는, 마법이라는 고상한 힘 대신, 힘과 완력에만 의지하는… 천한 무투가들.”

“…….”

“두 번째는, 말을 할 수 없고 오로지 주인을 위해 부려져야만 하는… 짐승이나 가축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뱉어내기 위해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지막은….”

루나의 시선이 창밖의 허공에서, 마침내 내게로 떨어졌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저희 같은 수인이에요.”

목소리는 공허하고 담담했다.

그게 그녀가 꺼내놓은, 그녀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였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 시선을 받아주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루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담자가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끔 상황을 유도하는 것 또한 상담사의 역할이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그곳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작은 길을 터주기로 했다.

“제국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곧 혈통이자 귀족의 증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루나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거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제국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곧, 혈통이자 귀족의 증명.”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쳤다.

  • 팡!

그녀의 손바닥 위 허공에서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서로 얽히고설키며, 작고 귀여운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루나는 자신의 손바닥 위의 마법진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이 힘은… 절대로, 제가 사용할 수는 없었어야 했겠죠.”

수인이면서, 귀족의 힘을 가졌다는 것.

내가 논문들을 읽으면서도 끝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가장 큰 모순이었다.

대체 그녀는 어떻게?

“하지만 수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리고 루나는 마법진을 스르르 없애며, 모든 이유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저는 온전한 수인이 아니니까요.”

온전한 수인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아버지… 아니 백작님은 제국 백작가의 자랑스러운 후예였고. 어머니는 그 백작님이 가장 아끼시던 토끼 수인 하녀셨죠.”

그녀가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황급히 백작님으로 고쳐 부르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녀가 겪어왔을 기나긴 고뇌를 엿보았다.

“저희는… 그러니까 저와 제 쌍둥이 동생, 엘리스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백작님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그러니까··· 제국에서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 ”

그게 루나가 내놓은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였다.

그녀는 모든 진술을 마치고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니요.”

[루나]

[메인 스탠스]

[그녀는 모든 죄를 고해했고, 당신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100%]

[그녀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명심시키십시오.]

“그럴리가요.”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재빠르게 옆에 있는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하나의 영상을 재생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상담을 위해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긁어온 비공식 자료였다.

이 영상에는 현장 날 것의 기록이 전부 담겨 있다.

화면이 켜지자, 게이트가 폭주하여 반파된 도심의 처참한 풍경이 나타났다.

불길과 연기,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섬광처럼 가로지르는 하얀 인영과 검은 인영.

루나와 엘리스였다.

영상 속의 루나는, 내가 아는 그녀와는 다른 존재였다.

망설임도 없이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괴물들을 베어 넘기고, 무너지는 건물 잔해 속에서 어린아이를 구해냈다.

장면이 바뀌고, 구출된 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울먹이며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영상에는 협회가 언론 보도를 위해 준비한 비공개 인터뷰까지 함께 존재했다.

[기사]: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아이]: (울먹이며) 너무 무서웠는데… 갑자기, 하얀 천사님이 나타나서… 절 구해줬어요! 저, 크면 꼭! 루나님처럼 멋진 헌터가 될 거예요!

영상 속의 아이는, 울면서도,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루나는 그 화면을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멍하니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 했다. 영상은, 끝도 없이 많았다. 루나는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인명 구조 현장에 늘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성실한 헌터였으니까.

다음 영상.

[학생]: 루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 영상도.

[여성]: 제 아이를… 제 아이를 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든 영상이,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이들에게는, 내담자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었을 겁니다.”

수백수천의 목소리가 그녀를 영웅이라 부르고 있었다.

“… 이거… 진짜… 정말이에요?”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그럼요. 전부 진짜입니다.”

내 대답에, 영상이 끝나고 검게 변한 태블릿 화면 위로 넋이 나간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처음… 봐요. 이런 건…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 것 같네요.”

“당연히… 당연히 이곳 사람들도, 저를 전부 싫어하는 줄만 알았어요. 제국에서처럼… 짐승이라고… 불경하다고… 그래서 그래서 저는….”

그녀의 말은, 더 이상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흩어졌다.

그럼 루나의 상담은 간단히 해결한 건가?

그렇지는 않다.

이제 막 곪아 터진 상처를 드러낸 것일 뿐.

내가 지금껏 본 루나의 습성을 생각하면, 그녀가 그녀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연 것 자체가 상담의 과정이자 오늘의 성과였다.

그리고 당연히 끝난 것도 아니다.

그녀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상담은 아마, 길어질 것이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루나]

[메인 스탠스]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을 희석시키는 기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의 앞에서, 새로운 '존재의 이유'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꽉’ 붙잡으십시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뭔 소리야 갑자기.

되게 섬세하고 좋은 분위기인데 대체 왜….

그런데 상태창을 자세히 보니, 평소와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첫 번째 선택지 아래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한 줄의 문장이 지지직거리며 접혀 있었다.

나는 그 이상한 부분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열어.

그러자, 접혀 있던 선택지가 스르르 펼쳐지며, 숨겨져 있던 내용이 드러났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고 진정할 시간을 주세….]

그래, 이거지. 이게 정답이다.

그러나 내가 그 문장을 채 다 읽기도 전.

  • 치지직.

방금 나타났던 정상적인 선택지가 타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내 시야에는 다시, 첫 번째의 그 기괴한 선택지가 바뀌어 있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꽉’ 붙잡으시면서 귓가에 속삭이십시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슬슬 루나에게 무언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눈앞에 떠 있는 선택지는,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다른 모든 길은 지워져 버렸다.

적어도… 지금까지 능력이 내게 잘못된 길을 걷게 한 적은 없었으니, 일단 믿는 수밖에.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결심을 굳혔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이 흐느낌으로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양 어깨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더 꽉.][만족 적합률 110%]

진짜 미친놈인가?

오늘따라 정신이 좀 나간 것 같다.

루나의 어깨가, 내 손아귀 안에서 떨리며 흠칫 굳었다.

그녀는 놀란 듯, 눈물에 젖은 붉은 눈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루나님은….”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내 행동에 루나의 모든 반응이 멎었다.

흐느낌도 어깨에 떨림도 없다.

그녀는 그저 내 손에, 귀를 붙들린 토끼처럼. 나를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의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였다.

“상담… 선생… 음….”

그녀는 단어를 고르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혹시… 호칭을 뭐라고 하면 될까요?”

내담자가 상담사에게, 자신을 부를 호칭을 정해달라고 물었다.

호칭은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자유다.

이것마저 질문하는 것 자체가, 그녀가 얼마나 배려심이 있는 성격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돌려주기 위해,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선생님]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50%]

[상담사님]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

[주인님]

‘…….

이제 하다 하다 호칭마저 나한테 훈수를 두는구나.

게다가 마지막 선택지는….

그냥 오늘 여러모로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다.

나는 가장 만족률이 높은 선택지를 골랐다.

“편한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선생님. 이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러자, 루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늘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 근육이 아주 오랜만에 제 역할을 찾은 듯했다.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네… 선생님….”

루나는 작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