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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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이 직접 요청했다?
자화연의 그 말의 진의를 가늠하려 애썼지만… 현재로서는 구분할 수 없었다.
만약 저 계집의 말이 진짜라면 의원의 부탁을 받아 타당한 행위를 한 이를 자신이 방해하고, 또 겁박한 것이 된다.
그 사실을 의원이 알게 된다면….
물론 군주가 무엇을 하든 신하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맞겠으나.
자화연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썩 유쾌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
자화연의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에서 서서히 핏빛이 가라앉았다.
그녀를 휘감던 어둠의 기운 또한 스르르 흩어졌다.
일단은, 지금은 여기까지다.
“됐다.”
자화연은 차갑게 식어버린 폐허를 한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금강.”
“예. 지존.”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인영 하나가 솟아올라 무릎을 꿇었다.
“후송은?”
“협회에 연락을 취해두었습니다.”
금강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바로 그때.
- 삐요오오오오옹.
저 멀리서부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응급 차량이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협회의 후송 차량이다.
진세아는 자신의 품에 안긴 유선우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지러웠던 납치극이, 마침내 끝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터들은 제 역량과 능력을 갈고닦아, 매달 진행하는 길드 내부 테스트에서 그를 증명한다.
“후우….”
- 콰앙!
거대한 더미 허수아비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유니온 길드의 최첨단 훈련장.
그곳에서는, S급 헌터인 루나와 엘리스 자매가, 정기 신체 능력 테스트를 치르고 있었다.
“루나 헌터님 또 기록 경신… 요즘 컨디션이 너무 좋으세요!!”
“아니에요.”
전력 분석관의 흥분한 목소리가 훈련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작 루나 자신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상해….’
분명 몸이 가벼워졌다.
이전에는 온 힘을 다해야만 낼 수 있었던 속도와 힘이 이제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 콰아아앙!
엘리스의 하이킥이 더미에 제대로 적중했다.
“엘리스 헌터님도 최상입니다!!”
컨디션이 좋은 것은, 엘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전력 분석관의 앞에 섰다.
“루나님은 근력이랑 속력이 지난달 대비 15% 상승… 엘리스님은 근력만 20% 상승… 두 분 다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혹시 최근에 특별한 훈련이라도….”
“아니요.”
“전혀여?”
두 사람의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사실, 그건 루나와 엘리스 둘 모두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렇군요… .”
전력 분석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태블릿에 데이터를 기록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훈련장의 문이 열리며, 또 다른 헌터 여우 수인 릴리가 나른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음 차례였다.
“아직 안 끝났나요~”
“아 거의 다 끝났어요!”
루나와 엘리스는 이제 자리에서 떠나려 했다.
“와… 뭐야? 기록 경신했어?”
릴리는 전광판에 떠 있는 수치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와 함께 두 자매에게 질문했다.
“우리 토끼 동생들, 둘 다 수컷이라도 생긴 모양이네?”
“?!”
“…!”
그 한마디에 루나와 엘리스는 릴리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망설이는 루나 대신, 엘리스가 먼저 릴리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소리에여?”
“아~ 모르는구나?”
릴리는 그런 두 순수한 토끼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암컷 수인은 말이야. 마음에 드는 수컷이 생기면 몸이 먼저 반응하거든.”
“다른 암컷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눈앞의 수컷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본능적으로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거지.”
그 충격적인 이야기에 루나와 엘리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능력이 피크를 찍을 때가 바로….”
릴리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발정기지.”
마지막 단어에 루나와 엘리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뻣뻣하게 굳은 채, 전력 분석관과 릴리에게 로봇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훈련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들, 아니 토끼들처럼.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릴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백 퍼센트?’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이제야 좀 수인 같네~”
자고로 암컷 수인이란, 마음에 든 수컷 하나쯤은 밤새도록 울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다음은 저 맞죠~”
릴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쭉 펴며, 분석관에게 향했다.
한편.
- 또각또각.
고요한 복도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루나는 자신의 붉어진 뺨을 애써 차가운 손으로 식히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손도 뜨겁다.
릴리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엘리스 또한 마찬가지.
장난기 넘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 큰일이야.’
그녀는 붉게 달아올라 굳은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두 토끼는 길드 라운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라운지의 분위기는 상당히 산만했다.
헌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TV 앞에 모여 숨을 죽이고 있다.
화면 속에서는 긴급 뉴스가 속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스는 가장 가까이 있던 동료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여?”
동료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화면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번에 우리 길드로 왕진 왔던 상담사님….”
“지금 납치당하셨다나 봐….”
그 말에 루나와 엘리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상담사님?
누구?
이 길드에 왕진을 온 상담사는 단 한 명뿐이다.
“선생… 님…?”
루나가 허탈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엘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토끼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 근데 다행히도 지금은 구출되어서 괜찮다고….”
동료는 뒤늦게 희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응?”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또 한편, 창천맹의 총본산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집무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방 안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향이 좋구나.”
공기 중에는 춘란의 맑고 청아한 향기가 감돌았다.
이서령은 비단 장포의 소매를 정갈하게 걷어 올린 채, 난초 잎사귀에 맺힌 아침 이슬을 부드러운 천으로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주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또 고결하다.
그녀는 마지막 잎사귀의 물기까지 닦아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고풍스러운 나무 책상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서적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법.]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중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우수하고 또 기묘한 곳이다.
중원에서 무공을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은 무공 서적이다.
그러나 무공 서적이란 아무나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구하기도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깝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이라는 엄청난 정보마저, 책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소량의 돈만 내면 그 지식을 누구에게나 팔았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소통하기.]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하기.]
[조건 없는 사랑을 표현하기.]
이서령은 요즘 매일 아침 이런 구절들을 보며 다짐한다.
지금까지 못 했던 것들을 지금 와서라도 바로잡기 위한 그녀만의 노력이었다.
비록 유월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괜찮다.
더 노력하면 되니까.
이서령은 그렇게 다짐하며 서적을 덮었다.
“…….”
그리고 그녀의 백옥같은 뺨 위로 희미한 홍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이 넓은 집무실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책상 가장 깊숙한 곳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서적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방금 전의 그 반질반질한 새 책과는 달리 표지는 해지고 책장은 누렇게 바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낡은 서적이었다.
[지아비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법]
처음에는 그녀 또한 ‘좋은 아내가 되는 법’이라는 이 세계의 현대 서적을 읽었었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은 이서령의 사상과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남편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라.’
‘남편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려 들지 말아라.’
그 부분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늘과 같은 지아비에게 어찌 아내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몇몇 서적은 오히려 지아비를 휘어잡고, 그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괴상망측하고 발칙한 이야기까지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서령은 점점 더 과거의 기록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이 책은 아주 오래전, 조선이라는 시대의 어느 이름 모를 현모양처가 남긴 기록이었다.
그녀는 책의 첫 장을 경건한 손길로 펼쳤다.
그리고 그 안의 가르침들을 새겨넣기 시작했다.
[일(一). 지아비는 아내의 하늘이니,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
특히 이 첫 번째 구절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아내란 지아비가 벗으라면 벗고, 엎드리라면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평생, 남성이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일 뿐이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중원인이었다.
막상 자신의 부군으로 모시고 싶은 자가 생기니, 뼛속 깊이 박혀있던 사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
이서령의 시선이 일곱번째 장에서 멈췄다.
하얀 뺨 위로 홍조가 더욱 피어올랐다.
[칠(七). 지아비의 몸은 옥체와 같으니, 소홀히 하지 말라.]
[매일 밤, 잠자리에서 지아비의 지친 몸을 성심성의껏 어루만져 그 정기(精氣)를 북돋아 드리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다.]
[아래는 여인이 반드시 익혀야 할, 지아비를 기쁘게 하는 몇 가지 방중술(房中術)에 대하여….]
이서령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어떤 무공 비급을 읽을 때보다도, 더 진지하게 그 글자들을 읽어내렸다.
그렇게 그녀가 새로운 세상에 천천히 발을 들이고 있던 바로 그때.
- 똑똑.
- 파다다닥!!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이서령은 화들짝 놀라 읽고 있던 책을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평소의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암명대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굳어 있었다.
“대주, 무슨 일인가?”
이서령은 붓을 들어 화선지에 난초를 그리기 시작하며 물었다.
암명대주는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맹주님. 해태 길드에서 변고가 생겼습니다.”
“변고?”
“유선우 의원님이… 납치 당하셨다고··· 합니다.”
- 빠각.
이서령의 손에 있던 붓대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주에게 되물었다.
“뭐라?”
그녀의 얼굴의 온화함이 사라졌다.
방 안의 따뜻한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곳에는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어미도, 지아비를 생각하며 미소 짓던 여인도 없었다.
과거 마교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여인.
구천현녀(九天玄女), 이서령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