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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거지 그리츠(Gritz) (6) - 기원

카닐리안 가문의 하인, 코빈은 연이은 노동 탓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낸 뒤 허리를 쭈욱 폈다.

“으어어어.”

입에서 절로 곡소리와 함께 허리가 아주 잠시 시원해졌지만, 이내 그건 기분 탓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 둔한 통증이 이어졌다.

아마 내일도 이 통증은 계속 남아 있겠지.

그리 생각하니 새삼스레 짜증이 치솟아 올라, 코빈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축제는 무슨 얼어 죽을 축제야…. 개 같은 년. 뒈질 거면 그냥 얌전히 뒈지면 될 걸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하.”

이 땅의 사람들이 무녀에게 품는 감정은 대개 죄책감과 꺼림직함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다.

무녀의 희생 덕분에 자기들이 무사히 살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걸 직시하기는 힘드니 그냥 적당히 외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염치마저 부족한 인간들도 존재했고, 코빈 역시 그중 하나였다.

막말로 무녀가 뒈지든 하늘로 가든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코빈은 그저 괜히 쓸데없는 제안을 해서 없는 일거리를 만들어낸 무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투덜대면서 짐 옮기기를 반복하던 도중.

문득 코빈의 시야에 묘한 것이 들어왔다.

‘오크통?’

제법 커다란 크기의 참나무 술통이, 복도 한구석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수상한 일이었다.

당장 가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상황에 따라서는 상부에 보고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못 본 척 해야지.’

그러니까, 지금이 축제 기간이 아니었다면 그러했다.

저택 전체가 들썩이고,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어지러이 움직이는 상황.

자기 말고 누구 다른 이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한 코빈은 오크통에서 관심을 꺼버렸다.

괜히 손대거나 얼쩡거렸다가 그 모습을 본 상급자에게 ‘거기 너, 잠깐 이것 좀 도와라’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이다.

자고로 이런 시기에는 그냥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바쁜척하는 게 최고의 요령이었다.

코빈은 알지 못했다.

오늘 카닐리안 저택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친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바빠서, 귀찮아서, 괜히 건드렸다가 욕먹을까 봐, 나중에 알아보려고,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담당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크통을 방치했다는 사실을.

“으랏, 억? 카악?!”

어느새인가 발밑에 있던 작은 천 쪼가리를 밟고서 넘어진 뒤에도 결코 알지 못했다.

오크통에서 투척한, 흐물흐물한 천 쪼가리가 이 먼 거리를 뚫고 일직선으로 날아와 제 발밑에 안착했다는 건, 그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

어느 하인에게 입조심의 교훈을 알려준 뒤에도, 오크통의. 아니 그리츠의 잠입 작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때로는 사람들의 인식을 이용해서.

때로는 시야의 사각에 몸을 숨겨서.

때로는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경로를 그리며.

안으로, 더 안으로.

이 저택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 있는 곳으로.

꽈악. 추욱.

가주의 방 앞을 지키던 호위는, 그리츠의 기습을 앞두고 호위로서 해야 할 그 어떤 역할도 해내지 못했다.

무기를 뽑아 대응하지 못했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 이상 사태를 알리지 못했으며, 하다못해 격렬한 발버둥으로 침입자의 체력과 시간을 빼앗는 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리츠가 마치 미끄러지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등 뒤에 접근한 뒤 입을 막고 목을 조여 의식을 빼앗을 때까지, 그가 해낸 것이라고는 그저 팔다리를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축 늘어진 것뿐.

그래서 카닐리안 가문의 가주는, 웬 침입자가 자기 방에 정문으로 돌입한 뒤 그의 입에 지팡이 끝을 쑤셔 박고 나서야 비로소 위험을 인지할 수 있었다.

“……? ……?!”

“입 다물어라. 이대로 머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

“열심히 눈을 굴리는 걸 보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굳이 알려고 할 것 없다. 지금부터 너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거기에 성심성의껏 대답만 잘 해주면 돼. 당연히 소란은 피우지 말고. 알겠냐? 알겠으면 눈 두 번 깜빡여라.”

깜빡. 깜빡.

쑥, 하고 가주의 입안에 박혀 있던 지팡이가 뽑아져 나왔다.

그리고 가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침입자다!! 가주실에 칩입자가 나타났다!!”

가주가 공포로 인해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되려 그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현명했다.

침입자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질문하려고 했다.

즉, 자신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있고, 곧바로 죽여버린다는 선택은 할 수 없다.

분노나 다급함으로 인해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상대의 무기는 날붙이가 아닌 둔기.

그에 반해 이곳은 자신의 저택 한복판이니, 몇 대 두들겨 맞는 정도만 버티면 그 사이에 아군이 올 것이다.

가주의 행동과 판단은 그 나름대로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도, 저택은 고요했다.

그리고 그리츠 역시 딱히 가주에게 화를 내거나,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가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전부 당한 건가?’

이 저택에 있는 그의 하인들이, 병사가, 모조리?

가주는 알지 못했다.

그리츠가 차음공(遮音功), 그러니까 얇은 막처럼 펼친 마력으로, 가주의 주변을 감싸버렸다는 것을.

이 저택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멀쩡히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가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애초에 그런 기술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가주의 추측은 엉뚱한 곳으로 도달했다.

눈앞에 있는 괴인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홀로 이 저택의 모든 이를 몰살시켰거나, 혹은 괴인을 돕는 다수의 동료가 있거나.

어느 쪽이든 가주에게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 발버둥은 다 쳤냐? 그러면 이제 사람 말 무시하고, 약속도 어긴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리츠는 가주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오해하라고 판을 깔아둔 것이기도 했다.

“대, 대답하겠소! 아니, 대답하겠습니다! 뭐든지 말할 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단순히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팬다는 식으로 가는 것보다, 상대방의 상상력과 공포심을 부추기는 쪽이 효율적이니까.

마침내 가주의 입에서, 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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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바깥이 마왕이니 어쩌니 난리가 난 것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저희 카닐리안 가문은 이 땅을 통치해 왔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독보적이고도 특별한 지배자는 아니었지요.

여러 토호, 여러 유력가 중 하나 정도의 입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의 선조께서는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존재가 선조께서 본래 알던 어떤 생물과도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뜻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등 뒤에 커다란 날개가 있었고, 몸 주변으로는 은은한 빛무리가 마치 금가루처럼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필시 아름답고도 장엄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네, 추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조께서 그것을 발견하셨을 때, 그것은 이미 온전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얀 새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 중 한쪽은 중간부터 뜯겨나가 있었고,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 중 절반 정도가 피와 검은 진흙을 섞은 것 같은 무언가에 물들어져 있었으며, 하반신은 아예 짓뭉개져 피곤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부나마 남겨진 멀쩡한 신체 부위가 지극히도 아름답고 장엄했기에, 그것이 입은 상처와 결손은 지극히도 참담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롭고도 끔찍했던 것은, 그 존재가 그런 상태에서도 살아 있었다는 겁니다.

동정심이었는지,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내뿜는 기이한 마력에 홀린 것인지, 선조께서는 그것을 집으로 데려가 보살폈습니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지만, 그 정신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후한 표현이겠지요, 그건 차라리 백치에 가까운 무언가였습니다.

둔하고, 어리석었으며, 가르쳐 준 것도 곧잘 까먹고는 했지요.

과거가 무엇인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어 이곳에 쓰러진 것인지 질문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별다른 쓸모도 없이 밥만 축내는 그것을, 선조께서는 일종의… 쓰레기통처럼 활용하셨습니다.

불평, 불만, 원한, 짜증.

한 세력을 이끌며 느끼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것에게 털어놓거나, 맞장구, 그러니까 같은 상대를 욕할 것을 요구했지요.

하인 상대로 떠벌리기에는 민감하거나 자칫 약점으로 이용될 수 있는 내용도, 그것을 상대로는 얼마든지 떠들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테고, 거동조차 불편한 존재이니 도주의 위험도 낮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이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평소처럼 선조님의 이야기를 멀뚱멀뚱 듣고 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호응이나 하던 그것이, 갑자기 선조님께 역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원해?

-그 녀석이 불행해지기를 원해?

-불행해진다면, 어떻게 불행해지기를 원하는 거야?

한참 경쟁 중이던 이 땅의 다른 토호 세력을 욕하던 선조께서는, 큰 고민 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상대의 농사가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그 세력의 수장이 선조님께 자기네 밀밭이 얼마나 질이 좋고, 풍성한 알곡을 맺는지를 떠벌리며 이죽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조께서는 그때 그 일을 곧 잊어버리셨습니다.

사람은 쓰레기통에 버린 물건이 뭔지 하나하나 기억하지 않습니다.

쓰레기통에 뭔가를 던져넣었을 때 평소랑은 조금 다른 소리가 났다고 해도 그게 특필해서 주목하고 기억할 만한 일은 아니지요.

본래라면 그걸로 끝날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는, 정말로 그 경쟁 상대의 농사가 망해버렸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가문, 다른 농지는 모두 풍년인데, 오직 그 가문의 농지만이 기록적일 정도의 흉년을 맞이했지요.

너무나 기이한 일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한참이나 그 일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선조께서는, 한동안 잊고 있던 그것과의 대화를 떠올리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에게 물으셨지요. 네가 뭔가를 한 거냐고.

그것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열을 알려주면 하나도 기억할지 말지 하는 존재였으니까요.

선조께서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그냥 그 일을 흘려넘기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 가문과 다른 가문 사이에 또다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새로 파낸 우물을 누가 사용할지에 대한 다툼이었죠.

저희 가문은 그 힘 싸움에서 밀려났고, 술에 취한 선조께서는 이번에도 그것 앞에서 불평불만과 욕지거리를 내뱉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원해?

-그 녀석이 괴로워하기를 원해?

-어떤 식으로 괴로워하기를 원하는데?

선조께서는 상대의 우물이 말라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써 차지한 보람도 없이, 진흙만을 내뱉는 그런 쓸모없는 우물이 되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물은 말라붙었고, 경쟁 가문은 한탄했습니다.

사람들은 불행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저 우물을 판 장소가 나빴겠거니 하고 넘어갔지요.

선조께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그저 우연이라고 한들, 두 번은 의심을 풀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선조께서는 그것에게 이번 일도 네가 한 거냐고 질문하셨지만, 그것은 역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조께서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땅을 말라붙게 할 수 있냐고.

누군가가 이용하는 물을 메마르게 할 수 있냐고.

누군가가 열심히 키워낸 나무를 시들게 할 수 있냐고.

그것이 대답했습니다.

-원해?

선조께서는 대답하셨고, 이내 그 모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카닐리안은 이 땅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