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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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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마검 포르테(Forte) (21) - 남겨진 자

농담도 과장도 쏙 빼놓고, 현자는 오직 자기 혼자 힘만으로도 대륙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국가쯤은 전복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한 번 내려쳐 시야 내의 모든 토지를 모래사장으로 바꿀 수 있었고, 집채만큼이나 거대한 나무를 키워낼 수도 있었으며, 암석과 식물 조작 능력을 활용해 강력한 골렘 군단을 양성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현자의 동료인 용사와 성녀는, 비록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그런 현자와 동격의 강자들이다.

고로, 현자는 생각했다.

‘전력을 온존한 채로 마왕과 무사히 조우 할 수만 있다면, 승산은 있을 거다.

마왕을 우습게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하나가 국가 수준의 전력인 그들 세 명이 마왕 하나에게 동시에 덤비고도 승리를 확신하는 게 아니라 승산이 있긴 있다고 여긴 시점에서, 현자의 판단은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겁쟁이라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신중했다.

하지만, 현자는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신중해야만 했다고.

“괴물 자식 같으니…!”

현자가 이를 갈았다.

애써 투지를 불태우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전투가 시작된 그 순간 마왕이 발한 참격.

그의 목을 단숨에 베어낼 것만 같았던 그 참격의 잔상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용사가 마왕의 검을 제때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단숨에 전멸당하고 말았으리라.

아니, 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카앙!

마왕과 용사의 검이 맞부딪친다.

극도로 정제되고 압축되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마왕의 오러가 화려하게 흩날리는 용사의 꽃보라와 충돌했다.

“크흑!”

열세에 처한 것은 용사였다.

검이 엇갈릴 때마다 용사의 몸을 지키던 꽃잎들이 수십 장씩 소멸하고, 용사의 몸에도 자잘한 상처가 생겨난다.

그로 인한 빈틈을 노리듯 마왕의 일섬이 발해지자, 용사의 몸통 한가운데에 대각선이 그어졌다.

“페르난도!!”

용사의 배에서 선혈과 함께 내장이 흘러나오기 전에, 성녀의 축복이 그 상처를 억지로 수복한다.

마왕은 그대로 검에서 오러를 뿜어 용사와 성녀를 동시에 베어내려 했지만, 현자가 만들어낸 골렘들이 그런 마왕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기사보다도 강력한 골렘들 수십 체를 제물로 바쳐 벌어낸 시간은 겨우 1초 미만.

용사가 다시 태세를 바로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그 때문에 현자의 전력이 크게 깎여 나갔다.

마왕은 딱히 아쉬워하는 기색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갔다.

하늘에서 생겨난 수백을 넘는 창들이 용사 일행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현자가 만들어낸 바위의 벽과 성녀의 축복이 그를 가로막았다.

현자는 마왕의 발밑을 질척한 늪으로 뒤바꿔 그의 발을 묶으려 했지만, 마왕은 제 마력으로 지면 전체를 코팅해 현자의 간섭을 틀어막았다.

용사 일행은 지금 마왕과 맞서 제법 좋은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의 마력을 소모 시키고 있고, 갑옷에 상처를 내고 있다.

자유롭게 흩날리는 꽃보라가, 성스러운 광휘가, 쇄도하는 인형의 군세가 이를 가능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왕의 마력이 바닥나는 것보다, 용사 일행의 마력이 바닥나는 게 빠르다.

마왕이 쓰러지는 것보다, 용사 일행이 쓰러지는 게 더 빠르다.

철컥.

검디검은 갑옷을 덜그럭거리며, 마왕이 검을 휘두른다.

질량을 지닌 어둠 그 자체가, 검은 갑옷을 입고 인간 흉내를 내는 듯한 외형을 지닌 마왕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마왕에게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서류 작업을 하면서 일일이 일희일비하는 일이 없듯이, 그저 마왕에게 있어선 이 싸움 자체가 ‘처리해야 할 작업’에 불과하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현자는 깨달았다.

지금 저 마왕의 눈에 자신과 동료들은 그저 서류상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걸로는 부족해, 애초에 전력 계산 자체가 틀렸다!

고작 위계 하나 차이가 아니다.

초월과 그렇지 않은 이의 아득한 경계가, 용사 일행과 마왕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현자의 머릿속이 필사적으로 회전했다.

도주? 불가능하다.

셋이 나란히 도망치려고 해봐야 그대로 등을 베일 뿐이고, 누구 하나가 미끼가 된다고 한들 유의미한 시간을 벌 수 없다.

어떻게든 단기전으로 몰아붙인다? 불가능하다.

용사 일행은 지금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으로 마왕을 몰아붙이고 있다. 여력을 남겨서 길항인 게 아니라,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길항이란 뜻.

전장을 바꾸는 건 어떨까? 이 가짜 몸을 제물로 바치는 건? 협상으로 블러프를 시도하는 건? 차라리 항복은?

수많은 선택지와 수단이 현자의 뇌리에서 조합되고, 그 즉시 현자 본인에게 반박당해 폐기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방법을 강구하는 도중에도 전황은 점점 나빠져 갔다.

마침내, 현자가 절망에 빠진 그 순간.

“─신이시여. 위대하신 당신께, 저 자신을 봉헌 하나이다.”

공기가 뒤바뀐다.

마왕의 마력이 가득 메우고 있던 공간의 점유율을, 성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광채가 강탈하기 시작한다.

용사와 현자의 힘을 증폭하던 빛이 몇 배로 강해지고, 그들의 몸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지만, 용사와 현자는 기뻐할 수 없었다.

성녀의 몸이 발끝부터 빛으로 사라져간다.

모시는 신에게 막대한 힘을 빌리는 대가로서, 성녀의 존재 그 자체가 제물로 바쳐진다.

자애롭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길 만큼은 비겁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지극히도 인간적이던 여인이, 어쩌면 죽는 것보다도 더 심한 결말을 자처한다.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순간, 현자는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던 방법을 성녀가 스스로 선택했기에.

성녀의 선택에 슬퍼하는 것만큼이나, 그로 인해 생겨난 승산에 기뻐하는 자신이 역겨웠기에.

“────!!”

포효와 함께 용사가 앞으로 뛰쳐나간다.

지금 자신이 망설이는 것이 성녀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넘쳐흐르는 눈물조차 나중으로 미룬 채 마왕에게 검을 휘둘렀다.

방어에 사용할 최소한의 꽃잎조차 모조리 공격으로 돌린 결과 용사의 몸 곳곳이 베이고 터지고 으깨지지만, 성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빛이 용사를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린다.

현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왕의 주문으로 팔다리가 날아가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마왕의 품속으로 달려들어 갑옷 한복판에 모든 마력을 주입한 지팡이를 꽂아 넣는다.

푸욱!

끼릭, 끼리리릭!

마왕의 갑옷 안쪽에서 자라난 나무뿌리가, 마왕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한다.

마왕의 몸을 이루고 있는 어둠이 힘을 내뿜을 때마다 뿌리들이 부러지고 말라붙지만, 그 근원이 되는 지팡이만큼은 결코 부러지지도, 말라붙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마왕을 방해했다.

기이이이이이이이익!

용사의 꽃보라가 끝없이 마왕의 몸을 후려치며, 그 갑옷을 갉아낸다.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마왕의 몸이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현자는 속으로 외쳤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제발, 늦기 전에!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왕이 쓰러지는 것보다 먼저, 용사와 현자에게 힘을 주던 그 막대한 광휘가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왕의 검이 용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현자는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치명상.

성녀가 없어진 이상,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더 이상 없다.

그 사실에 현자는 포기했으나, 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용사는 제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대신에, 오히려 마왕의 손을 붙잡고 그 검을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깊게, 깊게, 마왕이 그 검을 빼내지 못할 만큼.

용사의 의도를 깨닫고, 현자의 눈이 크게 떠진다.

현자는 용사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체력도 마력도 바닥까지 소비한 몸뚱이는 외침 하나 자아낼 힘조차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용사와 현자의 눈이 마주쳤다.

친구에게 남길 마지막 인사라는 듯이 힘껏 웃음을 만들어 보인 용사는, 그대로 마왕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짙푸른 오러가 용사와 마왕의 몸을 감싸며, 이윽고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났다.

흐드러지듯이 만개하는, 최후의 꽃보라.

마지막으로 흩날리던 꽃잎마저도 사라진 뒤, 현자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녀가 있었던 장소. 너풀거리듯 남겨진 그녀의 의복이 보였다.

용사가 있었던 장소. 푸른 꽃잎에 감싸인 채 바닥을 구르는 흑색의 투구가 보였다.

병사들이 있었던 장소. 마왕군과 함께 서로 공멸한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현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정적에 잠긴 폐허 속.

아주 오랜 시간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류를 위한 자네들의 헌신과 공헌에, 진실된 감사의 말을 표하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