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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사서 에른스트(Ernst) - 알드리지 강습소의 우등생
에리스(Eris)는 부모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스는 그 사실에 딱히 큰 슬픔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녀에게는 부모가 없었지만, 이를 대신하고도 남을만한 위대한 스승이 함께했으니까.
라벨로시아의 인간 국보.
대륙 전체에서도 희소한 6위계의 대마법사.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스승을 존경하며 칭송했고, 그때마다 에리스는 꼭 본인이 칭찬받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위대한 마법사인 스승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에리스의 실력은 유달리 뛰어났다.
사람들은 에리스를 보며 이야기했다.
천재.
대마법사가 직접 선택한 수제자라고.
스승 역시 그런 에리스를 보며 칭찬을 건네고는 했다.
「잘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정진해나가면 된단다.」
다른 이들이 건네는 요란한 찬사보다도, 스승이 건네는 담백한 칭찬 쪽이 에리스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었다.
고된 마력 단련도, 어려운 지식을 습득하는 일도, 스승이 건네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가 있으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에리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어느 날 스승에게 방문한 어떤 전령이 꺼낸 이야기가 계기였다.
전령은 이야기했다.
어떤 ‘학생’을 가르칠 외부 강사로서 스승을 초청하고 싶은데, 혹시 이에 응할 생각이 있느냐고.
에리스를 비롯한 제자들은 어이없음을 느꼈다.
대마법사인 스승의 밑에서 마법을 배우고 싶은 이들은 발에 챌 만큼 많다.
국내는 물론이고, 타국에서조차 제발 제자로 받아달라며 뇌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수두룩한 판에, 가르칠 생각 있으면 스승보고 직접 찾아오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야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더욱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 건 스승의 반응이었다.
전령이 건넨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의 행동에 우려를 표했다.
초청장을 보낸 상대는 다름 아닌 아이제른 제국.
라벨로시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국의 압박에, 스승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자들의 걱정을, 스승은 웃으며 부정했다.
「제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뿐이란다. 그 녀석이 ‘가르치는 게 기쁘면서 괴롭다’면서 칭찬인지 한탄인지 모를 이야기를 하는 제국의 황태자라는 인물도 궁금하고.」
제국 측에서는 스승이 원한다면 제자들과 함께 머물 저택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잠시 들렀다 오는 것뿐인데 괜히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없다면서.
스승은 홀가분한 태도로 제국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고, 에리스와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기다렸다.
스승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석 달 뒤의 일이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귀환에, 제자들은 수군거렸다.
마법을 제대로 배우기에는 너무나 빠른 시간이다.
어차피 황태자 쪽도 제대로 배울 생각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스승 밑에서 배웠다는 경력이 필요했던 것 아니겠느냐.
애초에 친구를 만나러 가신다고 하셨으니, 스승 노릇이야 그냥 형식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제자들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에리스는 그런 스승을 걱정했다.
제국에서 돌아온 스승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한숨을 내쉬는 일이 늘어난 것은 덤이었다.
왕실에서도 그런 스승의 모습을 걱정했던 것일까.
스승의 오랜 지인이기도 한 현군(賢君)의 오른팔이, 고급스러운 술을 싸 들고 스승을 찾아왔다.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에리스는, 그제야 스승이 괴로워하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인가? 자네가 이렇게 아까워할 정도로 제국의 황태자가 지닌 자질이 뛰어났다고?」
「뛰어나다는 수준이 아니야. 그런 말로는 감히 평가할 수가 없어.」
술에 만취한.
에리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스승은 한탄을 이어갔다.
「마법이라는 학문, 그 자체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천재 중의 천재야. 제국의 그 녀석이 괜히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어.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하게 해야 할 인재가 검술이니 제왕학이니 하며 다른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낭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다른 이도 아니고 제국의 황태자다.
외부의 자잘한 일들을 모조리 무시한 채, 순수하게 마법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일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라며, 스승은 탄식했다.
그런 스승을 위로하듯이, 지인이 이야기했다.
「자, 자, 진정하게나. 자네에게는 이미 훌륭한 제자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누구였더라. 아, 그래 에리스. 그 아이가 뛰어나다고 저번에 자랑도 하지 않았나.」
본인의 이야기가 들려오자, 에리스는 저도 몰래 숨을 삼켰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 스승이 본인의 칭찬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하아…. 그 아이로는 부족해.」
그리고 그 기쁨은, 스승이 내뱉은 깊은 한숨과 함께 나락으로 처박혔다.
평소의 자상하고 사려 깊은 스승이었더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근처에 숨어 있는 제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크나큰 실의와 음주로 인한 취기가 위대한 대마법사를 평소보다 부주의하게 만들었다.
「에리스 그 아이가 뛰어난 건 맞네. 성실하고, 영특하지. 자질로 따지면 내가 거둔 제자 중에는 최고야.」
그렇지만, 딱 그것뿐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범재들 사이에서는 뛰어나다고 평가받겠지만, 진짜 천재들의 영역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재. 그게 에리스야.」
「수제자에게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닌가? 저번에는 손녀 같은 아이라더니만.」
「귀여워하는 거랑 과대평가하는 건 다른 거야.」
「부디 그 애 앞에서 그런 말은 안 하기를 빌겠네.」
「하라고 해도 안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관둬.」
그 뒤에도 두 노인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에리스는 그 내용을 듣지 못했다.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억누른 채, 들키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가슴 속에 쌓아둔 한을 술자리에서 털어버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줄곧 울적한 기색이었던 스승의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다른 제자들 역시 그런 스승의 모습에 안심했다.
「훌륭하구나, 에리스. 역시 내 제자야.」
에리스의 스승은 변함없이 자상했다.
겉모습만으로 봤을 때, 스승은 에리스나 다른 제자들에게 실망하거나 낙담하는 듯한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의 본심을 알게 된 에리스는 칭찬을 받으면서도 예전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자질을 아까워하던 스승의 한탄이, 에리스를 수재라고 말하던 그날의 평가가, 그녀의 가슴속을 계속해서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끈적하게 타오르는, 질투의 불꽃이었다.
라벨로시아의 현군(賢君)이 쌓아 올린 업적은 무척이나 많지만, 개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바로 교육 개혁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라벨로시아에서 교육이란 사교육이 기본이자 전부였다.
귀족이나 부호들이 개인 교사를 초청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있었어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만을 위한 시설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현군은 여러 강대국들을 모범 삼아 적령기의 학생들이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 기관을 창설했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권했다.
강습소라 이름 붙여진 교육 기관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양성되면, 이는 곧 국가의 이익으로도 이어지는 까닭이었다.
무려 국왕이 직접 왕실의 내탕금까지 써가며 지원하는 교육 기관.
당연히 거기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구열 또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리가 없지.’
에리스는 그렇게 속으로 냉소했다.
어진 왕의 기대가 어쨌든, 왕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귀족들의 기대가 어쨌든, 실제로 학업에 임하는 건 한창 놀고먹고 싶은 나이의 청춘들이다.
그것도 강습소에서 다른 귀족들에게 밀리면 안 된다며 어린 시절부터 빡빡한 스케쥴 속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받았던 이들.
그런 학생들이 답답한 집안에서 벗어나고, 심지어 함께 어울릴 또래도 잔뜩 있는 환경에서 성실하게 공부만 하리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지나치게 과한 기대였다.
반대로 평민 출신 학생들의 경우 본인들은 놀고먹는 주제에 텃세까지 부리는 귀족 학생들을 향해 ‘더러워서라도 출세하고 만다’라며 의욕을 불태우긴 했지만, 그렇게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 대부분이 자국 귀족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가슴 속에 차곡차곡 누적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국가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뭐, 어느 쪽이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에리스는 주변을 향한 관심을 사그라트렸다.
애초에 이딴 꽃밭 같은 강습소가 미래에 어찌 되든 간에, 그건 에리스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강습소 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머쥔 학생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천공 아카데미』의 입학 자격뿐.
일개 교육 기관 주제에 그 영향력이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막대하다고 평가받는, 대륙 중부 최고로 손꼽히는 배움터.
중부에 속한 여러 나라에서도 한 줌에 속하는 천재들만이 입학하여, 그 내부에서 한층 더 경쟁과 투쟁을 반복하는 그곳이야말로 에리스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진정한 싸움터일 테니까.
“에리스 양, 이야기 들었어요! 저번 시험에서도 전 과목 만점이었다면서요? 정말로 굉장해요!”
그런 에리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 여학생이 에리스에게 웃는 얼굴로 칭찬을 건네왔다.
마음 같아서는 ‘네, 그러는 당신은 한 과목 빼고는 전부 평균 이하였죠. 수강료를 바닥에 흩뿌리는 기분은 어떤가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에리스였지만, 실로 안타깝게도 천공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우수 학생’의 조건에는 단순 성적뿐만 아니라 사교 관계 역시 포함된다.
아무리 에리스의 성적이 독보적이라고 한들,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상급 교육 기관으로의 입학 자격은 물 건너간다는 소리.
고로, 에리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했다.
“그저 운이 따랐을 뿐이랍니다. 피레네 양이야말로 방어 주문의 실력이 많이 늘어난 것 같던데요?”
“에리스 양이 저번에 이것저것 알려주신 덕분이에요! 아버님께서 잔소리가 워낙 심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과목이 전부 개판인 와중에 겨우 방어 주문 하나만으로 꾸짖음을 멈춘다니, 그것참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애초에 귀족 학생 중 진지하게 마법이나 검술 같은 것을 파고드는 이는 드물다.
귀족은 능력 있는 자를 고용하고 부리는 이들이지, 자기들이 직접 그런 힘을 쓸 필요는 없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니까.
당장 에리스 자신만 하더라도, 대마법사 델피나리스 웨인하트의 제자라는 직함이 없었다면 이렇게 대등하게 말을 나누지도 못했겠지.
‘졸업시험까지 앞으로 반년이었던가. 시간이 좀 빨리 갔으면 좋겠네.’
대마법사의 수제자로서 여러 마법을 배워온 에리스에게, 여기 강습소에서 배우는 지식들은 대부분 이미 배운 것들의 재탕에 지나지 않았다.
수학이라든가 역사, 교양 같은 지식은 그나마 좀 새롭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잦은 예습과 복습을 통해 리 졸업까지 배울 내용은 모두 끝낸 상태.
본 무대인 천공 아카데미에 도달하기 전 실력을 점검하는 과정이라 여기며 어떻게든 참아 넘기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에리스 양. 여기 알드리지 동쪽에 있는 검은 건물 아시나요?”
“‘열리지 않는 관’ 이야기인가요?”
“네! 거기요! 최근에 브라운 상회에서 그 건물이랑 인근 토지를 매입했다는데, 어제부로 건물이 개방됐다고 하네요! 내용물은 도서관이라고 해요.”
“흐응.”
에리스는 살짝 눈을 빛냈다.
기본적으로 향상심과 탐구욕이 강한 그녀에게, 책이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이미 강습소 내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읽어버린 뒤였는데, 새로운 책 수급처가 생겼다고 하니 절로 흥미가 돋았다.
‘…한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