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4 KiB
#54화 하인 세드릭(Cedric) (20) - 안녕히, 나의 하인이여.
대악마 루시드라는 최근 기분이 좋았다.
어느 정도 좋냐고 묻는다면, 혼자서 그냥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데도 느닷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입꼬리가 꿈틀꿈틀 움직일 정도였다.
먼 과거 수많은 이들을 손짓하나, 미소 하나로 좌지우지하던 대악마의 품격에는 그리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고, 루시드라 역시 이를 자각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내 승리야!’
오랜 봉인에서 깨어나, 황태자 알론드와 계약을 맺은 지도 어언 몇 달째.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고 오냐오냐 자라났을 귀하디귀한 도련님 하나 농락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그녀였지만, 황태자 알론드는 여러모로 비범한 존재였다.
아니, 좋게 말하면 비범하고, 툭 터놓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사람 새끼가 아니었다.
능력도 사기 같고, 성격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황태자 때문에 그녀가 대체 그동안 얼마나 골탕 먹고 고통을 받아왔던가.
허나, 그 굴욕의 시간도 여기까지였다.
루시드라가 보기에, 클라우디아라는 저 귀족 계집은 절대로 세드릭, 그러니까 황태자의 분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태자 본인이야 해줄 거 다 해주고, 계약 기간도 끝났으니 이제 훌훌 떠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딱딱 떨어지는 법이던가.
‘본래 사랑에 빠진 계집아이만큼 앞뒤 안 가리고 마구 달리는 존재는 없는 법이야. 아무리 네가 잘났어도, 이번만큼은 별다른 수가 없을걸?’
귀족으로서 본인이 손에 넣은 권력을 휘둘러 억지로 붙잡으려 하건, 아니면 네가 사라지면 다시 망나니로 돌아갈 거라며 떼를 쓰건, 어느 쪽이든 자기가 떠난 후에도 클라우디아가 한 사람의 영주로서 자립하길 바라는 황태자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행보다.
그리고 그건, 황태자와 루시드라의 내기에서 루시드라가 승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 후후. 후후후후! 뭘 요구하면 좋을까? 대체 뭘 요구해야 저 뻔뻔한 인간에게 내가 그동안 느낀 굴욕을 되갚아 줄 수 있을까?’
황태자의 꼼꼼한 성격으로 작성된 계약서 탓에, 흔히 악마들이 계약자들을 등쳐 먹는 것처럼 무리한 요구를 할 수는 없다.
황태자를 꼭두각시 삼아 제국을 뒤흔드는 그런 엄청난 일은 불가능하겠지.
허나 그녀 개인의 사소한 원망과 분노를 해소하기에는 충분했다.
연신 즐거운 고민을 이어가던 루시드라는, 이내 황태자의 그림자에서 세드릭의 그림자 쪽으로 의식을 옮겼다.
자, 그러면 그녀에게 승리를 안겨줄 귀엽디귀여운 귀족 영애께서는 대체 어떤 깽판으로 세드릭, 그러니까 황태자를 골탕 먹이고 있을지 구경이나─
“…알았어. 보내줄게.”
─응?
후작과의 대화를 끝마친, 클라우디아는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온몸이 핏빛으로 이루어진 뱀 한 마리가 올라가 있었는데, 후작이 본인이 직접 갈 수는 없다며 빌려준 그의 혈마수 중 일부였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세드릭이 제국의 공작원이라고?’
후작 본인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클라우디아는 그의 말투에서 기묘한 확신을 느꼈다.
뭣보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세드릭이 지닌 그 기묘할 정도의 유능함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이, 클라우디아의 가슴을 타들어 가게 했다.
“아가씨?”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자신을 응시하는 세드릭의 모습을 본 순간, 클라우디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를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을 텐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머리가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쉬익.
하지만 그녀가 데려온 핏빛 뱀은 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주인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뱀은 클라우디아가 멍해져 있건 말건, 혀를 날름거리며 세드릭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쉬익?
그리고 이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강대한 포식자인 뱀의 감각은, 눈앞의 생물이 틀림없이 다 죽어가는 중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기세가 넘치는 상태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었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태에, 뱀은 인간으로 치면 고개를 연신 갸웃하다가, 이내 그냥 본인, 아니 본사(本蛇)가 느낀 그대로 클라우디아에게 그 의지를 전달했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혈마수들은 인간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다.
그저 피로 연결된, 어버이이자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의지’를 주고받을 뿐.
그래서 본래 주인인 후작과는 제법 능수능란한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후작의 피를 이어받긴 했어도 엄연히 다른 인물인 클라우디아와는 의사 전달에 살짝 문제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실력이 살짝 모자란 통역이 중간에서 말을 옮기는 정도의 미묘한 왜곡이 발생했다.
후작은 이를 알고 있었고, 클라우디아에게 설명도 했지만, 반쯤 넋이 나가 있던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후작은 이를 눈치챘지만, 굳이 그녀를 붙잡고 똑바로 들으라고 주의하지는 않았다.
사실 몸이 나쁘다, 괜찮다 정도를 표현하는 거라면 살짝 왜곡이 있어도 알아듣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테니까.
그 결과.
-얘는 다 죽어가는 거 맞음. 근데 뭔가 커다란 거랑 이어진 상태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라는 문장이.
-얘는 이미 죽은 몸. 근데 뭔가 커다란 게 얘를 붙들고 억지로 괜찮은 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라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당연히 클라우디아는 경악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심코 세드릭에게 물었다.
“세드릭 너… 혹시 무슨 마법으로, 누구랑 이어져 있어?”
세드릭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클라우디아가 여태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경악한 듯한 반응이었다.
세드릭의 시선이 클라우디아와 어깨 위의 핏빛 뱀을 오가더니, 이내 그 얼굴에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한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갑자기 말도 없이 저택을 떠나셔서 걱정했건만,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가신 거였군요.”
“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서야? 그래서 괜찮다고 한 거야? 그 마법 때문에?”
무언가 강대한 마법이 세드릭을 붙잡고, 그의 생명을 이어주고 있다.
이는 클라우디아에게 그렇게까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당장 그녀가 다루는 혈마수만 해도, 일단 살아 있는 채 그녀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그 어떤 부상이라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세드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숨길 수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진실을 간파한(?) 상대에게 아니라며 발뺌하는 것도 보기 흉한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마법(분신)이 있는 한, 저에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설마, 그런 마법(종속)에 걸려 있었다니…!”
클라우디아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저 공작원을 파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생명까지도 손아귀에 쥔 채 지배한다니.
제국은 이 얼마나 강대하며, 또 악독한 존재란 말인가.
말을 잃은 채 입만 뻥긋거리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세드릭은 고해를 이어나갔다.
“제가 이곳에서 했던 모든 행적은, 그리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악행이라고 할만하겠군요. 아가씨를 속인 채 이용한 것이니까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클라우디아가 보기에, 세드릭은 그저 생명을 목줄로 잡힌 채 위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이었다.
그걸 어찌 세드릭의 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뇨,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저의 의지로 행한 일이니까요.”
허나 세드릭은 이를 단호히 부정했다.
그로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었지만, 클라우디아에게는 그마저도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고결함으로 보였다.
“주군에게 이리도 큰 심려를 끼치다니, 저는 하인 실격일지도 모르겠군요.”
“지, 지금 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요, 아가씨야말로 중요합니다.”
세드릭은 울먹이는 클라우디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지극히 차갑게 바라본다면, 하인이란 그저 돈 받고 주인 밑에서 일해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온기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 모시는 주인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만한 인물이라 여겨질 때, 하인들은 가슴 속에 긍지를 품습니다. 주인이 주변에서 인정받으면 덩달아 기쁘고, 주인이 올바른 길을 걷는다면 그 뒤를 따른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요.”
“처음 만났을 당시의 아가씨는, 좁은 우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자신과 주변을 끊임없이 상처입히시는 분이셨습니다. 빈말로도 존경할 만한 주인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아가씨는 달라지셨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몸에 품은 힘으로 사람들을 돕고, 부족한 능력이 있다면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지요. 아가씨의 얼굴만 봐도 두려움에 떨던 하인들은, 이제는 아가씨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품습니다.”
세드릭은 호흡을 고르듯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당당히,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선언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클라우디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름도, 신분도, 거짓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성장에 기뻐하던 마음만큼은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저는 한순간의 아지랑이일 뿐이지만, 아가씨께서 계속 훌륭한 군주로 남으신다면, ‘하인 세드릭’ 또한 그 그림자 속에서 불멸로 남을 것입니다. 고로, 아가씨야말로 누구보다도 중요한 분이십니다.”
클라우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세드릭은 그런 클라우디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우디아의 입이 열렸다.
“…알았어. 보내줄게.”
세드릭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끝까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배려? 웃기지 마.”
클라우디아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신한 자 특유의 강렬함이,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거야. 지금 나로서는 능력도, 세력도 부족하겠지만… 두고봐. 언젠가 너의 배후에 있는 이에게 당당히 나아가서, 내 하인을 돌려달라고 선언해 줄 테니까.”
세드릭은 순간 벙찐 얼굴을 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배후에 있는 이(나)에게서 하인(나)을 되돌려달라고 말하겠다니, 실로 시적인 표현이로군.’
어지간한 허니트랩 정도는 코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그조차도 이 정도 각오에는 나름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감탄은 감탄이고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그건 어마어마한 가시밭길입니다, 아가씨.”
“말려도 소용없어. 난 반드시 해낼 거니까.”
“정말로 그만두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겠다는 거야! 너한테 말릴 권한 같은 건 없어!”
“허어.”
세드릭은 탄식했다.
그 탄식에서 무얼 느꼈는지, 클라우디아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당찬 웃음 비슷한 것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 몸 건강히 기다려. 언젠가, 내가 반드시 찾아갈 테니.”
“…긍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흥! 그거 잘됐네! 너도 가끔은 골탕을 먹어봐야 해!”
“이것 참.”
그 뒤로는, 평소처럼 떠들썩한 잡담이었다.
때때로 클라우디아가 울컥한 것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낼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이별이 슬프고 힘들어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종의 마지막 하루가 흘러갔다.
그리고 대악마는 그림자 속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