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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거지 그리츠(Gritz) (9) - 명대사
회색 머리. 벨라리아의 왈가닥. 고아원 애들 괴롭히면 찾아오는 그거.
기타 여러 가지 별명을 지닌 미소녀인지 미녀인지 아무튼 예쁘장한 여인,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음, 아무래도 망한 것 같은데.’
수군수군. 웅성웅성.
거리를 거닐 때마다, 어디 가게에 들릴 때마다, 하다못해 숨만 쉬어도 주변에서 시선과 웅성거림이 느껴진다.
그 자체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무녀인지 뭔지 하는 직함을 얻은 뒤로 매일 같이 반복되던 일상이었으므로.
문제는, 겉보기만 비슷하고 그 내용물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는 점이었다.
“오오, 무녀님.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십니다!”
“무녀님, 제 얼굴 기억하시지요? 저희 가게의 가죽신, 원장님께서 참 많이 사 가셨었는데….”
“자자, 무녀님. 이것 좀 드셔보십시오. 오늘 막 딴 사과로 짜낸 주스입니다. 가격이요? 아이고, 무녀님의 은총 덕분에 저희가 이리 평안히 살고 있는데 어찌 제가 금품 따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 무녀님. 여기, 저희 아이의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자! 너희들! 오늘도 이 도시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다, 알았나!!”
전에는 그레이스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던 이들이,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기 위해 애를 쓴다.
가게 주인들은 뭐라도 하나 퍼주고 싶어서 난리고, 그레이스의 손에 닿는 것이 무슨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며, 경비대들은 그녀의 시야 근처에서 과할 정도로 각을 잡은 채 빠릿빠릿 행동한다.
만약 제삼자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런 시민들의 행동에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그리 차디찬 외면과 냉대를 이어간 주제에, 이제 와서 참으로 뻔뻔하다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잘못된 해석이었다.
시민들이 뻔뻔하고 염치가 없어서, 과거의 일을 깔끔하게 망각했기에 저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찔리는 게 많은 이들일수록, 그걸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발악하듯이 그레이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만약 그레이스가 그동안 시민들에게 당한 걸 기억해 뒀다가, 수호신이 된 뒤에 복수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수호신의 권능은 단순히 땅 파고 씨앗 심는 농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산에 열리는 과일이나 낚시를 통해 잡히는 물고기에까지 골고루 미친다.
그리고 벨라리아의 주류 산업은 1차 산업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렵다면, 대충 그레이스에게 다른 사람의 통장 잔고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녀가 농업 버프 +100%를 선언하는 순간 내 통장 잔고가 2배로 증식하고, 그녀에게 외면받는 순간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통장 잔액이 제로, 아니 마이너스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아니, 설령 잘 보일 수 없더라도, 하다못해 찍히는 일만큼은 회피해야 한다.
자기가 현명하고 귀가 밝다고 여기는 이들은, 은밀히 퍼져나가는 ‘소문’을 접하자마자 앞다투어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아부를 떨어댔다.
물론 그들 전부가 이 소문이 사실이라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수상쩍다고 여기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소문이 가짜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레이스가 수호신이 아니라 그냥 무녀라고 해서, 그들이 뭐 크게 손해 보는 게 있나? 기껏 해봐야 잠깐의 수치심과 시간 낭비 정도인데?
안 하면 최악의 경우 망한다.
하면 최악의 경우라도 딱히 손해는 없다.
그들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판단해 선택을 내렸고, 그런 그들의 행보를 본 다른 이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소문’이 진실이라 여기게 되었다.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라, 뭔가 진짜 있긴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렇게 움직이는 게 틀림없다면서.
소문이 행동을 부르고, 행동이 진실성을 보강했다.
처음에는 분명 비밀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도시 전체가 공유하는 진실이 되었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거예요, 진짜!?”
탕!
그레이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외쳤다.
그 맞은 편 소파 위에는 웬 오크통 하나가 떡 하니 자리를 자치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책상이든 식탁이든 그렇게 손바닥으로 탕탕 치는 거 아니다. 네가 아니라 널 가르친 부모가 욕을 먹어.”
“음, 확실히 원장님이 봤으면 일단 등짝부터 후려쳤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려다, 이내 움찔하고는 행동을 멈췄다.
그리츠는 그 모습을 보며 고놈 말 참 잘 듣는다며 껄껄 웃었지만, 그 웃음은 다소 이른 감이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덮치는 뱀처럼 스으윽 움직인 그레이스가, 그대로 테이블을 우회한 뒤 오크통을 붙잡고 짤짤짤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 상황 어쩔 건데요! 보는 사람마다 다들 눈빛이고 말투고 죄다 이상해졌는데!”
“계집아이야, 인간적으로 사람에게 대답을 요구할 거면 통을 흔드는 건 멈춰야 하지 않겠냐? 응?”
“세상에, 내가 오늘 고아원에 갔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요? 동생들이 저보고 ‘누나, 여신님이야?’라고 했다고요! 심지어 지젤마저 ‘언니… 아니…지? 그래,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게…’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거 절대로 믿는 눈이 아니었어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일단 고개는 끄덕여주겠다는 반응이었다니까요!?”
“허허허, 이 계집년. 사람 말을 귓등으로 처먹는 재주가 있었군.”
빡!
“아얏!”
지팡이 꿀밤으로 그레이스를 단숨에 제압한 자칭 거지는, 카닐리안 가주의 정성 어린 손질 덕에 최근 부쩍 깔끔하고 윤기가 흐르게 된 오크통을 빛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주변 반응이 그렇다는 건,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고 있다는 뜻 아니냐. 뭐가 그리 불만이야?”
“그야 소문 자체가 죄다 날조에 허구니까 문제죠!”
“허구든 뭐든 상관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지.”
그리츠가 이죽거렸다.
“저기 성역인지 뭔지 하는 곳에 있다는 수호신 놈은 뭐 처음부터 수호신이었다더냐? 사람들이 그놈을 수호신으로 인식하고, 풍작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바뀐 거지.”
“그거야 그 수호신은 아무도 안 믿을 때부터 이미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저는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평범한 마을 처녀에 비해 활발하고, 건강하고, 근성도 있는 그레이스였지만 딱 거기까지.
그녀는 용사의 가문에 태어나 특별한 검술을 단련한 적도, 대마법사의 제자로서 마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마력 같은 건 쓸 줄도 몰랐고, 당연히 농사에 관여하는 힘 같은 건 쥐뿔도 없었다.
애초에 시작 지점 그 자체가 다른데 뭘 어쩌란 말인가?
“흐하핫.”
그레이스의 타당하고 합리적인 지적에도, 그리츠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그녀의 말을 사뿐히 무시했다.
그는 되려 그레이스에게 이런 제안까지 건넸다.
“그러면 어디 한번 실험해 보자꾸나.”
그리츠의 지팡이가 방구석에 있는 화분을 가리켰다.
카닐리안 가문에 있는 온갖 종류의 화초들은 그 엄격한 기풍 때문이라도 철저하게 관리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최근에는 가문 자체가 축제다 뭐다 하며 난리라서 그런지 화분 안의 꽃은 다소 시들시들한 상태였다.
“저거에다가 손을 대고, 한번 생각해 봐라. 이 꽃이 건강해지면 좋겠다고.”
“…아니, 그게 무슨.”
“한번 해봐라. 네가 나를 믿는다면.”
평소와 달리 묘하게 진지한 그리츠의 말에, 그레이스 역시 입을 다물었다.
꽃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눈을 감은 채 집중한다.
꽃이 건강해지면 좋겠다. 활짝 피어나면 좋겠다. 다시금 아름다워지면 좋겠다.
이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고, 그저 간절히 바라면서.
문득,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 온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불꽃 같은 직접적인 뜨거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간접적이고, 조금 더 포근한.
햇빛을 잔뜩 머금은 흙 같은 따스함.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그레이스는 입을 헤 벌리고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엥?”
방금까지만 해도 시들시들 죽어가던 꽃이, 어느새인가 화사하게 피어나 있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고개가 삐걱삐걱 목각인형 같은 움직임으로 돌아가, 그리츠를 향했다.
오크통 안의 그리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레이스는 그리츠가 무척이나 오만불손하게 웃고 있으리라고 직감했다.
세상에는 ‘축복’이라는 힘이 있다. 천상의 신이 그들의 신도를 어여삐 여겨 자신의 권능 중 일부를 내려주는 걸 말하지. 전쟁의 신을 믿는 사제는 강화나 파괴 등의 공격적인 힘을 얻고, 자애의 여신을 믿는 사제는 치유나 보호 등 보조적인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사제나 무녀가 다루는 힘은, 그 본인이 품은 마력의 크기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직 자신의 신과 얼마나 가까운가, 얼마나 신에게 많은 총애를 받는가야 말로 중요하지.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의문이 있다. 사제와 무녀는 신에게서 힘을 공급받는다. 그렇다면, 정작 신은 어디에서 힘을 공급받을까?
혹자는 말한다. 신이란 본디부터 초월적이고 강대한 존재이기에, 외부에서 힘을 공급받거나 할 필요가 없이 오로지 그 자신만으로 존귀한 이라고. 그렇기에 그저 마음에 드는 신도에게 자비로서 힘을 베풀 뿐이라고.
적어도 내 생각에는 개소리다.
신앙이란 열망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한두 사람의 믿음이야 그저 그런 망상으로 끝나겠지만, 수백수천을 넘어가는 믿음은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이지.
물론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아니다. 햇빛은 강렬한 힘이지만, 사람은 식물과 달리 광합성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지.
하지만 신들은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축복을 내리고, 그 축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그로서 신앙을 긁어모은다. 속된 표현으로는 일종의 미끼 상품이지.
너무 불경한 거 아니냐고? 글쎄.
뭐 신들 중에는 순수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는 신들도 있긴 하겠지. 근데 그놈들이 주류는 아니었을 거다.
만약 그놈들이 주류였으면 신살자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신살자 손에 만신전이 박살 나서 신전들이 지금처럼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신살자가 누구냐고? 대충 넘겨라. 지금 너한테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마 지금 ‘수호신’이라 불리는 그것은, 일찍이 신이었던 것, 혹은 그 분신체 같은 거였을 거다.
본래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존재였는지도 더는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영락한 존재였겠지.
그냥 방치했다면 알아서 소멸했겠지만, 어느 바보가 그것을 향한 신앙을 만들어낸 탓에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고, 덕분에 부활했다.
지금은 기껏 해 봐야 영지 하나 분량의 신앙밖에 없으니 지상에서 폭군 놀이나 하고 있지만, 바깥에까지 신앙이 널리 퍼졌다면 언젠가 하늘로 올라갔겠지.
그리고 너는 그런 수호신의 무녀다.
즉, 수호신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신앙을 끌어내는 촉매이자 마중물이지.
여태까지는 ‘제물’로서의 인식이 너무 강했던 탓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너를 제물로 여기지 않는다.
그뿐이더냐? 사람들은 너를 다음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수호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너도 할 수 있다. 비록 힘의 크기 자체는 제법 차이가 나겠지만.
그리고 수호신이 사라진다면, 수호신을 향한 신앙은 모조리 너를 향하게 된다.
이게 바로 신을 없애고도 이 땅에 존재하던 축복은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다.
신앙을 실질적인 힘으로 바꿔주던 신이 사라지면 네 힘도 사라지는 거 아니냐고? 그거야 신을 쓰러트리고 네가 그놈을 흡수해버리면 될 일이고.
뭐라고 떠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알려줄 테니, 이렇게 외쳐라.
신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