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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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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강아린은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처음엔 진짜 기절할뻔했다.

예쁘긴 하다, 입이 벌어진 것도 맞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과연 드레스라고 부를 수 있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실상 옷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깨는 물론, 옆구리까지 깊게 파였고,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살결이 드러났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파티보다는 침실에서 어울리는 옷이었다.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스타일리스트들도 순간적으로 말이 없었다.

수제 드레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제발, 이건 아니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됐다.

다행히 강아린은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건 나중에 입지 뭐.”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커튼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 스륵.

조심스럽게 커튼이 젖혀졌다.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강아린이 입고 나온 건,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드레스였다.

고급스러운 소재가 몸에 부드럽게 붙어 어깨선과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노출은 최소화됐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드러난 곡선이 더 눈길을 끌었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강력하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강아린은 내 앞에 와서,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하는 흉내를 냈다.

“이제, 가실까요?”

싱긋 웃으며, 눈을 반달처럼 접는다.

“예… 그러세요.”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아, 잠깐만.”

강아린이 손짓으로 나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워치를 꺼내 화면을 톡, 톡 두드렸다.

뭔가 입력하는 모양이었다.

“뭔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강아린은 워치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아, 업무 때문에.”

묘하게 장난스러운 표정.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 시각, 유 가(家)의 무도관.

  • 챙,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중을 갈랐다.

“하아….”

유하나는 숨을 고르며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눈앞에는 유무진.

그녀의 아버지가, 부드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넘게 이어진 무언의 대련.

“대단하구나.”

유무진은 기쁜 듯 웃으며 검을 거뒀다.

  • 털썩.

유하나도 무릎을 꿇으며 검을 땅에 기대었다.

“후우… 잠깐 쉴게요.”

“그래, 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유무진은 짧게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하나는 땀에 젖은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후….”

숨을 고르는 유하나.

아버지와의 대련은 만족스러웠다.

‘행복하다.'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너무 충분한 순간이었다.

그때.

  • 띠링.

워치가 짧게 진동했다.

유하나는 별생각 없이 손목을 들었다.

“…?”

그녀는 메세지를 보자마자, 순간 몸에 흐르는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그곳에는, 사랑하는 그이가 정장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헉….”

유하나는 숨을 삼켰다.

그렇게 넋을 놓은 채, 사진을 계속 바라봤다.

추가로 도착한 짧은 메세지.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셨던 피로는 그대로 머리로 몰려 열로 바뀌었다.

파티?

그녀가 아는 파티라고는, 전략 교류회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파티를 싫어한다.

‘쯧, 이번에는 안가야겠구먼.

원래 유하나도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허례허식이 가득한 친목회 따위.

그는 그녀의 딸과 대련하는 시간이 훨씬 소중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가지 않았다.

덕분에 유하나 역시 자연스레 빠지게 되었다.

괜찮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안 괜찮아.

유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무진이 무도관 출구로 향하고 있다.

“잘 추스르고 나오려무나.”

싱긋 웃으며, 문을 나선다.

그때.

“아빠아아아아!!”

딸의.

아니.

한 여성의 투정이 무도관을 가득 채웠다.


한편, 아르카디아 교단.

“성녀님! 온천 개방 시간입니다~”

“어, 고마워~”

천여울은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요 며칠 꽉 짜였던 일정에서 드물게 얻은 자유 시간.

그녀는 제대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정해인과 함께하는 일정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에 있을 전략 교류회가 딱 그랬다.

허례허식, 보여주기, 어깨 힘주는 자리.

원래라면 의무감에 참석했어야 했지만, 이번엔 단칼에 잘랐다.

‘안 갈래~

그냥 용사 쪽에 짬 때렸다.

허례허식 차리고, 어깨 좀 세우고 그런 건… 마침 그쪽이 좋아하는 거니까.

서로 좋은 거 아니겠는가?

덕분에 오랜만에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천여울은 물에 발끝을 담그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흐우….”

그때였다.

  • 띠링.

워치가 작게 울린다.

“응?”

그녀는 목욕 중일 때는 대부분의 알림을 꺼놓는다.

‘중요한’ 알림을 제외하면.

천여울은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순간, 시야가 멈췄다.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

천여울은 사진을 본 순간 넋을 잃었다.

사진 속.

차가운 조명 아래 서 있는 남자.

매끄러운 블랙 정장 차림.

빛을 부드럽게 반사하는 고급 원단이 그의 넓은 어깨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렀다.

단정히 넘긴 머리 때문에, 더욱 또렷해진 이목구비가 보인다.

목에 자연스럽게 묶인 넥타이까지.

익숙하지 않은 차림 탓일까,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천여울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귀여워….”

그리고 동시에,

너무 멋있었다.

천여울은 무의식적으로 홀린 듯이 모든 사진을 저장했다.

그러나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

짧은 메세지.

천여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아린이 갈만한 파티는 하나밖에 없다.

‘교류회.

  • 첨벙첨벙!

천여울은 수건 하나만 대충 걸치고 온천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서는 한 여성 사제가, 곧 입힐 예정인 천여울의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매님!”

천여울이 다급히 불렀다.

“네… 헉!”

사제는 고개를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수건 하나만 걸친 채 물기를 머금은 천여울.

그 너머로도 드러나는 선명한 실루엣.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이, 보는 이의 숨을 잠시 멎게 했다.

“용사, 걔네 출발했어요?”

그러나 천여울은 빠르게 물었다.

교류회에 가야 하는 건 본인이었다.

사제는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네… 방금 막 출발하셨는데….”

“아.”

잠깐 가만히 서 있던 천여울이, 비척거리며 다시 온천으로 돌아갔다.


늘 그렇듯, 정해인의 기숙사 방.

  • 바스락바스락.

두툼한 이불 아래,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녀 하나.

방의 불은 꺼져 있었고, 커튼은 바깥 빛을 완전히 가려 놓았다.

가끔,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그때.

  • 띠링!

작은 알림음이 이불 속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꺄아악!”

이불 밑에서 시온의 짧은 비명이 터졌다.

순식간에 이불이 들썩인다.

파닥파닥.

작은 몸짓이 이불을 안쪽에서 요동치게 만들었다.

최근 별다른 사건이 없던 탓에, 집돌이인 정해인은 기숙사에 박혀있었다.

평일엔 접근 불가.

요즘은 어떤 정신 나간 마법사가 주기적으로 결계를 쳐놓았다.

따라서 그의 방에 올 수 있는 때는 모두가 나간 주말뿐.

시온은 나름대로 굶주린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도 늘 그렇듯 방 주인이 외출을 나간 틈을 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사진 속에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정해인이 있었다.

시온 입장에서는 핵폭탄처럼 떨어진 뉴스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오늘 아침.

​시온은 할아버지의 파티 동행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오늘은… 방이 비니까….'

아마 할아버지는 지금쯤 성아라 언니랑 가고 있을 것이다.

워치 화면을 터치했다.

거울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정해인의 너머로, 차마 드레스라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작은 면적의 옷을 입고 있는 강아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년.”

  • 톡 톡.

그 모습이 싫어, 화면을 톡톡 두들겼다.

사진이 확대되었다.

정해인의 어깨, 손, 목선.

“헤….”

다시 터치했다.

사진이 축소되었다.

또 터치했다.

다시 확대했다.

끝없이 반복.

그 순간, 워치 창이 울렸다.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짧은 메세지.

메시지 옆의 숫자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사라졌다.

모든 인원이 전부 읽었다는 뜻.

그리고, 아무도 답장이 없다.

보낸 사람도, 받은 사람들도.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시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걸.

“아….”

그녀는, 완벽한 패배자였다.

  • 부스럭.

손끝에 걸린 워치를 내려두고.

그녀는 정해인의 사진을 크게 확대한 화면을 그대로 남긴 채,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깊숙이, 더 깊숙이.

“… 읏.”

이불 속 어둠 속에서.

시온은 홀로 자신의 패배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