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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백작의 영지는 대륙 최동부에 위치했다. 엘프 왕국과 인접했는데, 때문에 에스텔 백작가는 대대로 엘프와 굉장히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게 에스텔 백작가가 마르지 않는 부를 얻게 된 이유였다.

이 세계의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 엘프 왕국과 거래가 가능하다? 아무리 못난이라도 부를 쌓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에스텔 백작가는 대대로 수완이 좋았다. 단순히 부를 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먼 미래를 보고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며 엘프 왕국과의 중간 다리 역할을 톡톡히 완수했다.

그로써 에스텔 백작은 부와 권력을 성공적으로 손에 넣었는데, 그래서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했느냐.

새삼 에스텔 백작의 대단함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불빛을 내뿜는다. 그 아래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것 하나 최고급이 아닌 게 없었다. 심지어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까지 초일류였다. 이 부드럽다 못해 음악을 듣는 중이라는 걸 까먹을 정도의 은은한 테크닉은, 확실히 파티장에서 쓰기에 가장 알맞았다.

게다가.

나는 파티장에 마련된 음식을 집었다. 정확히는 마련된 음료를.

은은한 대나무 잎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죽엽청이었는데, 내가 검림 말고 죽엽청을 마련해 놓은 곳을 처음 봤다.

과연 에스텔 백작가.

놀 줄 알았다.

“비싼 술을 놔두고 벌꿀주랑 죽엽청만 주구장창 먹는 건 루이나 님밖에 없을 거야.”

“그게 에스텔 백작가의 저력인 거예요. 물질적인 가치에 속지 않고, 안에 내포된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죠.”

이것과 비슷한 사례로는 광어가 있었다.

광어는 한때 최고급 횟감이었다. 없어서 못 먹었고, 사람들 또한 광어에 미친 듯이 환장했었다.

허나 광어 양식이 성공하며 광어에겐 저렴한, 싸구려 횟감 이미지가 씌워지고 말았는데, 여기서 재밌는 점이 발생한다.

과거라면 회를 공짜로 먹는 기회가 생긴다면 광어를 골랐을 사람들이, 기왕 공짜로 먹는다면 광어 말고 더 비싼 회를 먹게 되는 것이다.

맛은 그대로고, 바뀐 건 가격밖에 없는데 말이다.

근데 나는 그냥 광어가 좋았다.

참치와 광어의 선택지가 주어지면 광어를 골랐다.

소갈비와 돼지갈비의 선택지가 주어져도 돼지갈비를 골랐다.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게 내가 좋아하는 맛이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다.

죽엽청이랑 벌꿀주가 맛이 좋아 맛이.

굳이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음료를 놔두고 다른 음료를 찾을 생각은 안 들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 거 아니냐고?

맞긴 한데, 죽엽청과 벌꿀주에는 입맛을 뛰어넘는 체급이 있었다.

이 두 술을 모든 사람이 최고로 꼽지는 않겠지만, 좋은 술이라는 건 대부분 동의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권능으로 무한 양산이 가능한 탓에 저렴하다는 이유로 너무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지. 대외적으로는 용병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컸다.

그렇기에 귀족들끼리 파티를 하면 아예 벌꿀주를 들여놓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에스텔 백작은 달랐다. 당당히 벌꿀주와 죽엽청을 구비해놨다.

나랑, 결이 비슷한 인간이었다.

“에스텔 백작님과는 대화가 통할 거 같아요.”

“근데 루이나 님. 이 파티를 계획한 건 에스텔 백작님이 아니라 에스텔 백작부인 아니야?”

“혹시 애처가인 에스텔 백작님이 직접 파티를 계획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정신 차려 루이나 님. 세상에 어떤 영주가 부인의 파티에 간섭해.”

“그럴 수가.”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말이 통할 것 같았던 내 친구(예정)가 사라지다니….

“이제 저는 다시는 말이 통하는 친구를 발견하지 못하겠죠.”

“루이나 님. 나는?”

“크리스 님은 말이 통하는 게 아니라 저랑 똑같은 짓을 하는 거잖아요.”

“내가 언제 루이나 님이랑 똑같은 짓을 했어. 나는 멀쩡해.”

“그런 점을 말하는 거예요.”

아쉽다 아쉬워.

내가 작게 한숨을 쉬자,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결국 백작부인이 파티를 계획한 거면 벌꿀주는 백작부인의 작품이니 백작부인과 친구를 하면 되잖아.”

“하아. 크리스 님.”

“응.”

“여자랑 우정을 어떻게 쌓아요.”

“또 미친 소리 한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매일 파티를 여는 사람이랑 친구를 하는 건 조금.

결이 안 맞아 결이.

“백작부인이 저와 결이 맞으려면, 앞으로 마법 파티를 열어야 해요.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마법을 바치는 파티죠.”

“그건 결이 맞는 게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거잖아.”

“그게 그거죠.”

“그나저나 루이나 님? 여자끼리 우정을 못 쌓으면, 나는?”

“크리스 님의 성별은 여자가 아니라 금화 괴인이잖아요.”

“역시 루이나 님이 최고야.”

나는 달라붙는 크리스의 입에 죽엽청을 집어넣고, 파티장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아니? 따갑다 못 해 뜨거웠다. 사방에 펼쳐진 이글거리는 시선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타올랐다.

이건 반은 비유적인 표현이었고 반은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반은 나랑 친해져서 이득을 보고 싶어 하고, 반은 나를 진짜 잡아먹고 싶어 할 거라.

이런이런. 이래서 예쁘면 곤란하다니까.

뭐,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지만, 별개로 예상대로라 곤란했다.

이러면 몰래 사교계를 탐방한다는 계획엔 살짝 차질이 생겼다.

“크리스 님.”

“우아어아.”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군요. 음식 그만 쑤셔 넣고, 다 먹은 다음 대답하세요.”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비싼 음식을 양껏 먹는 크리스가 어이없었다.

크리스는 음식을 꿀꺽 삼킨 후 내게 물었다.

“왜?”

“제가 이 정도로 유명해진 건 대체 왜일까요?”

“루이나 님이 잘나서지.”

“똑바로 대답 안 하면 내일부터 루이나 여행기는 세상에 없는 시리즈가 될 거예요.”

“아니? 어차피 루이나 님은 송곳이야. 내 루이나 여행기가 없어도 이렇게 될 거였어. 받아들여.”

“그럴듯해요.”

하여간.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이토록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족을 깔끔히 찾아낼까.

마족은 감정을 먹고 사는 생명체였다.

물론 감정을 먹지 않는다고 죽지는 않았지만, 마족에게 감정을 먹지 말라는 건 맛없는 음식만 먹으며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똑같았다.

게다가 감정은 마족의 성장과도 연이 깊었다.

따라서 마족은 점점 감정을 쉽게 먹는 방향으로 진화했는데, 어떤 식이냐.

바로 감정 조종의 스페셜리스트로 진화를 했다.

즉 사람의 감정을 마구마구 흔드는 녀석에게 마족이 빙의하지 않았을까?

확인해 보자.

마침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5:5로 가르마를 탄 남자는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내가 눈을 깜짝이자 남자가 말했다.

“루이나 엘피니엘 님?”

“안녕하세요.”

“이거 참. 만나서 반갑습니다. 크로웰 제니시아입니다.”

“제니시아 자작님의 자제분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크로웰의 미소가 진해졌다. 내가 제니시아 자작을 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였는데, 크로웰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제니시아 자작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다.

각종 귀족을 속성으로 외운 게 딱 어제라.

원래는 귀족가의 이름 같은 건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저도 2황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도에 있었습니다. 저는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었는데, 루이나 님은 무려 대활약을 하셨더군요.”

“아 진짜요.”

“그때부터 루이나 님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겨 영광입니다.”

“아 정말요.”

나는 마음속에서 크로웰의 점수를 매겼다.

감정 조종 점수, 1점.

민폐 발생 점수, 1점.

불쾌 유발 점수, 1점.

축하합니다. 총 3점으로 당신은 마족이 아닙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나는 크로웰을 떠나 벽에 기댔다.

다음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크로웰이 스타트를 끊어서 그런가.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게 다가왔다.

가장 먼저 다가온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갤루아 남작님의 자제인 폴릭 갤루아군요. 애인이 한 달에 2번씩 바뀌는 정력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닫았다.

왜냐하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으니까.

난입한 남자의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했기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카이렌 님이 여기엔 왜 있나요. 학교는 어떻게 하고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나는 카이렌을 확인했다.

순금을 짜낸 금발이 흩날리고, 제국 황실의 상징인 황혼 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내 시선에 카이렌이 입술을 뗐다.

“우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만나고.”

“5황자님 아니십니까. 저도 운이 좋군요. 여기서 루이나 님과 카이렌 님을 둘 다 만나다니.”

폴릭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이렌이 무심히 폴릭을 쳐다봤지만, 폴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애인이 한 달에 2번 바뀐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애인이 없습니다. 저는 사랑을 많이 하는 남자지 바람을 피우는 남자가 아니거든요.”

“아 진짜요.”

“그런 의미에서 루이나 님과는 전부터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듣기로는 마법에 관심이 많다던데, 저도 그렇습니다. 마법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마법이라. 구체적으로는요?”

“마법의 좋은 점은 그거죠. 체계적이고 완벽한 구조. 그래서 마법과 수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모호함이 없고 확실하기에 마법은 대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하.

딱 알았다.

“저랑 얘기가 잘 통하시네요.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따로 얘기를 나눌까요.”

“아주 좋습니다. 제가 좋은 곳을 압니다. 따라오시죠.”

“잠―.”

옆에서 카이렌이 당황했지만, 나는 폴릭과 함께 빈방으로 향했다.

폴릭이 카이렌에게 비웃음을 날린다. 내게 안 보이는 각도라고 생각한 듯한데, 창문에 다 비쳤다.

뭐, 됐다.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나는 빈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카이렌은 자리에 우뚝 서서 방금 일을 되새겼다.

갑자기 폴릭과 대화를 나누다 빈방으로 향하는 루이나와, 그런 루이나를 따라가며 비웃음을 날리는 폴릭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카이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폴릭은 안 됐다.

그 난봉꾼은 인간 자체가 쓰레기였으니까.

안 되겠다.

주머니 속 묵직한 나무 케이스의 감촉을 느끼며, 카이렌은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루이나와 폴릭이 향한 빈방이었다.

방 앞에 우뚝 선 카이렌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으으읍!’

그리고 방 안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다급히 문을 열었다.

“이 더러운 쓰레기가―.”

분노를 터트리려던 카이렌이 말을 멈췄다.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방 안의 광경은 카이렌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갑작스러운 카이렌의 등장에 루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루이나의 생명력 넘치는 녹색 눈동자가 카이렌을 담고, 카이렌은 나직이 말을 꺼냈다.

“루이나 님.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루이나는.

무릎을 꿇은 폴릭에게 불꽃을 먹이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족 탐색 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