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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KiB
S# 114.
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
편의점에서 숨은 한예화를 찾은 차서아는 피에 묻은 망치와 칼을 손에 쥐고 다가간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한예화를 바라보는 눈.
‘어떤 눈으로 봐야 할까.’
서연은 대본을 읽을 때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망설였다.
차서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 인간이다.
병 때문에.
라고 변명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또 죽이려 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예화를 만나기 전에.’
차서아는 한 사람을 더 죽인다.
편의점 아줌마.
관객의 입장에선 그저 애꿎은 말을 한 인간에 불과했으나, 차서아에게는 아니었다.
차서아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인간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그 감정을 올바르게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일 뿐.
그렇기에 어떤 의미론 인간에게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울어야 하는 상황에 웃는다면.
웃어야 하는 상황에 눈물을 흘린다면,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서연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그것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잊지 못한다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이유는 모르지만, 서연은 전생의 기억에 대해 떠올리고자 하면, 무엇이든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달라지지 않았고.
주로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지식을 떠올릴 때 참고용으로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퇴색되지 않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것, 그에 대한 기억만을 남기고 서연의 전생은 점차 뿌옇게 변했지만.
여전히 그 얼굴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연예계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릴 때와는 달랐다.
그 이유를 여태 몰랐지만, 의 대본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 나는 그때 큰 상처를 입었던 거구나.
그래서, 잊지 못하는 거구나.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낄 뿐.
해외에서는 감정표현 불능증을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단어’를 뜻하는 lexi
‘영혼’을 의미하는 thym이라는 단어에 부정의 의미가 있는 ‘a’를 붙여 ‘영혼을 설명하는 단어가 없다’라는 의미다.
‘정말 영혼이 없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우습게도, 그건 환생으로 부정되었다.
내게도 혼이란 게 있었고, 지금은 감정도 평범하게 느낀다.
단순한 신체의 장애.
단순해도 인간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그러니.’
차서아는 이 순간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준 편의점 아줌마를 죽일 때.
그리고, 한예화를 비롯한 사람들을 죽일 때.
그녀는 분명 감정을 느꼈다.
단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뿐.
「…….」
차서아는 망치를 내리쳐, 편의점 아줌마를 죽인다.
대본에는 ‘무표정하고 냉정하게’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아니.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감정표현 불능증은 표정이 드물다.
하지만 그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기에 그럴 뿐이다.
그러니, 이때 분명 차서아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다만 그것이 슬픔이나 고통을 동반한 표정이어선 안 된다.
그건, 올바른 감정표현이었으니까.
선혈이 튀었다.
아니, 마치 그렇게 느껴졌다.
피가 튀는 것 같은 환영.
망치를 휘두르는 모션과 함께, 살려달라고 외치던 편의점 아줌마가 쓰러지고.
차서아는 그런 편의점 아줌마를 내려보았다.
코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두 번 더 망치를 내리친다.
물론 그 망치가 배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촬영하던 스태프들은 순간 움찔할 정도의 기세였다.
‘연기, 맞지?’
이전에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평소보다 강했다.
뭣보다.
‘표정.’
다음 장면을 찍기 위해 대기하던 임승철 형사 역의 배우, 김대헌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이 촬영 중이라는 걸 순간 잊을 정도였다.
‘웃는 건가? 아니면, 우는 건가.’
웃고 있지만, 마치 우는 것 같았다.
김대헌은 저런 연기를 하는 배우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 박선웅이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고, 영화의 엔딩에서 짓던 웃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도 느낌이 달랐다.
보다, 복합적인.
많은 감정을 내포한 얼굴이었다.
박선웅 배우의 연기는 보다 또렷했다.
복수를 했다는 희열과, 그래봐야 죽은 아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런 슬픔이 나타난 연기였다.
그렇기에 그저 감탄하며 보았다.
‘하지만.’
서연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웃고 있음에도 울고.
마치 스스로 어떤 감정을 나타내야 할지 모르는, 길을 잃은 표정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 같은.
「…….」
벌려진 입이 뻐끔뻐끔 움직였다.
손에 쥐고 있던 도구를 떨어트리고, 서연은.
아니, 차서아는 자신의 양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마치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은 기괴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져서.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이 무심코 얼굴을 찡그릴 정도였다.
‘그런 거 대본에 없었잖아.’
대본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배진환 감독이 따로 지시한 연기인가?
하지만 미세하게 커진 배진환의 눈으로 보아, 그건 아닌 모양.
쿵!
천천히.
양손을 얼굴에서 뗀 차서아는 이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쿵.
쿵.
쿵.
마치 스스로의 심장을 뛰게 하려는 것처럼.
혹은 체한 가슴을 내리게 하려는 것처럼.
여태까지 차서아의 행동은,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애초에 감정과 행동이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행동과 감정이 일치했다.
답답함.
그리고 고통.
차서아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떨어진 공구를 차서아는 천천히 집어 든다.
머뭇거림 따위는 없었지만, 그것을 쥐는 순간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차서아는 그런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이내 피에 젖은 망치를 재차 꽉 움켜쥔다.
후우, 후우, 후우.
숨을 크게 몰아쉬고.
한예화가 있다는 편의점 창고로 향한다.
우습게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차서아의 뒷모습이 오히려 감정을 알기 쉬웠다.
그녀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게 S# 114가 끝이 났다.
“서연 양, 여기 녹차.”
“아, 감사합니다.”
서연은 김대헌 배우가 내민 종이컵을 받아서 들었다.
그는 늘 촬영장에서 마실 녹차를 가져오곤 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촬영이 모두 끝난 건 붉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S# 114번은 한 번에 오케이가 떨어졌지만, S# 115번에선 몇 번이나 NG가 나고 말았다.
김홍백 교수와 연습했던, 임승철 형사와의 마지막 혈투 씬.
차서아의 감정이 폭발하고, 임승철 형사 또한 필사의 각오로 싸우는 장면이다.
“……몸은 괜찮으세요?”
“핫핫, 괜찮죠, 괜찮고 말고요.”
김대헌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서연이 액션 연기에 합을 맞추지 못했냐?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서연은 아주 깔끔했다.
솔직히 대역을 쓰지 않은 액션 연기에 걱정했으나, 오히려 문제는 자신이었다.
“저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젊은 연기자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연기에 지고 이기고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서연은 설핏 웃었다.
드문 서연의 미소에 무심코 넋을 잃었던 김대헌은 헛기침했다.
“그보다, 오늘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마치…….”
김대헌은 뒷말을 삼켰다.
마치, 차서아 본인인 것 같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연기를 본 스태프들은 백이면 백, 김대헌에게 공감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서연의 정신상태를 의심해서는 아니고.
혹여 과한 메소드 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메소드…… 인가.’
그는 배우다.
그러니 서연의 연기가 메소드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었다.
주서연이라는 배우는 메소드 연기를 장기로 삼는 배우.
그리 알려졌기에, 모두가 이 연기를 메소드라 여기는 것 같았지만.
김대헌은 오늘 확신할 수 있었다.
차서아의 연기는 단순한 메소드가 아니라고.
주서연이라는 배우의 내면이 나타난 연기라고 말이다.
‘혹시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니겠지.’
김대헌은 자신의 망상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 촬영을 위해 감정표현 불능증이라는 질병에 대해 찾아봤던 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질병에 걸린 이가 배우를 한다는 건.
하물며 메소드 연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메소드 연기라는 것 자체가 누구보다 배역을 이해하고, 그 감정에 공감해야 할 수 있는 연기니까.
감정표현 불능증과는 정반대.
‘하지만 차서아를 누구보다 강렬하게 이해했다는 건…….’
정말 난해한 배역이라 생각한다.
그걸 훌륭히 나타낸 서연이 그만큼 대단했고.
오늘 몇 번이나 김대헌이 장면을 다시 찍은 것도 서연 때문이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서연의 연기와 장면이 죽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찍은 마지막 S# 115번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서연 양도 그렇겠지?’
그런 마음으로 서연을 보았지만, 서연은 그저 김대헌이 준 녹차를 홀짝거릴 뿐이었다.
물론 서연은 그런 김대헌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편의점, 이거 물어는 주는 거겠지.’
몇 시간에 이르는 촬영 시간 동안 찍은 임승철과 차서아의 치열한 전투씬.
아주 제대로 날뛴 탓에 아주 개박살이 난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여러 편의점을 순회하는 서연에게, 편의점이 산산이 부서진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었다.
“서연 씨.”
그때, 찍은 영상을 전부 확인한 배진환 감독이 서연에게 다가왔다.
“오늘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장면, 아무래도 PV에 일부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잘 뽑혔어요.”
미리 하이라이트를 찍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광고용 PV에 미리 넣는다고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혹시, 이번 영화 찍고 또 영화 찍을 생각 있어요?”
“영화요? 그야…….”
있기야 있다.
우선 생각해 둔 건, 올해 말에 오디션 하는 영화.
4억을 구하기 위해 염두에 둔 이미지 개선용 영화였다.
“아, 당장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내년, 내년일 겁니다, 아마.”
“아마.”
“네, 그렇죠. 제가 듣기로…… GH 그룹에서 하나 더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영화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배진환 감독은 잠시 망설였다.
오늘 연기를 보고 깨달았다.
서연은 뜨는 배우다.
아마 이번 영화가 개봉하면 그 이름값이 배는 오르겠지.
그래서 망설여졌다.
정말 좋은 자리이지만, 그 영화의 감독이 마음에 걸려서.
“서연 양, 혹시 조방우 감독님……을 혹시 압니까?”
조방우 감독.
어렸을 적 서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조민태 감독의 아버지.
그 이름에 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슬슬 때가 됐구나.’
한때, ‘불패의 감독’이라 불렸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며,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이.
그의 유작이 개봉하는 건 내년 말.
그 시기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