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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의 자취방은 자취방이라는 이름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2층 단독주택이었는데 그중에서도 2층을 혼자서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거길 오게 될 거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산다고?’
이걸 자취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냥 독립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조, 조용히 들어와.”
나를 집안으로 데려온 서예린은 얼굴이 확 붉어져 있었으나, 술은 전부 깼는지 말을 더듬거나 몸이 휘청거리진 않았다.
“밑에 걸리면 안 되니까.”
밑에?
1층을 얘기하는 건가?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서예린은 뭐가 부끄러운지 속삭이듯 설명했다.
“1, 1층에 부모님이 사시거든.”
“뭐야 자취가 아니잖아.”
“자, 자취야! 밥이랑 청소 같은 건 전부 내가 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셔서 간섭 안 하신단 말이야……!”
“아아.”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부모님 두 분의 타협점이 바로 지금 서예린이 아닐까 싶었는데.
두 분도 잘 알고 계셨겠지.
본인들 딸이 얼마나 시장가치가 높은지.
아무나 막 찝쩍거리고 그러다가 이상한 길로 빠질 수도 있으니 걱정된다.
하지만 자립심은 키워주고 싶다.
양쪽의 마음이 공존하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자취방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럼 내가 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부모님 마음에 본인이 대못 박고 있는 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선 서예린.
슬쩍 나를 보더니 손짓하면서 얼른 들어오라고 보챈다.
‘어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꼼꼼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거실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너무 넓어서 그런지 거실은 가구만 놓여 있을 뿐 따로 사용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자취방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향기가 나고 있는 건 맞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면서 자기 방으로 쌩하고 들어가 버리는 서예린. 문틈 사이로 살짝 보였는데 본인 방은 살짝 너저분했는데.
‘아아.’
아마 본인 방만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거긴 관리가 썩 잘 되고 있지 않은 모양이고.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 11시.
한숨을 내쉬면서 어느 정도 술기운이 가시는 걸 기다리고 있자니 살짝 졸 뻔했다.
“우진아?”
“어? 어?”
퍼뜩 일어나서 눈을 뜨자 앞에는 펑퍼짐한 하얀 티에 수면바지로 갈아입은 서예린이 있었다.
이미 전 여친을 통해서 저런 스타일이 남자의 심장을 훨씬 두근거리게 만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예린의 이런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파괴력이 컸다.
“자는 거야?”
팔짱을 끼고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서예린. 나는 손을 휘저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답한다.
“아니?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말에 서예린의 볼이 다시금 발그레 붉어진다. 그러고는 후다닥 냉장고로 달려갔는데.
가져온 건 와인과 머그컵이었다.
“와인잔은 집에 없어서…….”
그렇다고 와인을 머그컵으로 마시자는 건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그럼 집에 와인을 왜 사뒀어.”
“서, 선물 받은 거야.”
“…….”
아마 남자가 선물하지 않았을까?
저거 마시면서 서예린 좀 어떻게 해볼라고 했겠지.
“매, 맨정신으로는 못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하며 오프너로 와인을 따려는 서예린. 생각보다 잘 안되는지 낑낑거리는 걸 보면서 아직까지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깨진다.
“잠깐만 잠깐만! 난 그런 거 하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야!”
내 말에 서예린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며 되묻는다.
“아, 아니야?”
이거 진짜 미쳤구나.
“얘기를 하려고 온 거야. 서예린과 김우진이 아니라…….”
익명69와 관리자로서.
그리 덧붙여 말하자 서예린의 표정이 다시금 붉어졌다. 현실에서 익명69라고 불리는 건 아직 괴리감이 있는 모양이다.
“일단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좀 얘기해 보자.”
예상은 가고 있으나 일단 말할 필요가 있었고.
“나, 나도 네가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어!”
서예린도 자신이 밝히기 전에 이미 내가 익명69의 정체를 알고 있던 이유를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입을 떼려던 순간.
막상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네가 나한테 보낸 팬티만 입고 있는 사진들을 가지고 추론해서 네가 익명69인 걸 알았다는 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거, 맨정신으로 얘기하기 쉽지 않아서.
“야, 일단 까봐.”
와인부터 까서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말하자 서예린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까줘.”
“이것도 못 하냐. 줘 봐.”
끼릭끼릭.
“오, 오프너 부서졌잖아!”
“어라? 너무 깊게 넣었나?”
“이러면 못 마시는 거 아니야?”
“칼이랑 젓가락 가져와 봐!”
콱콱.
“코, 코르크 찌꺼기 술에 들어갔잖아!”
“……그냥 마셔도 됨.”
“으앙, 이게 뭐야!”
“속보.”
거나하게 취해서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대고 있는 나는 심드렁하니 핸드폰에 있는 글귀를 읽어갔다.
“관리자 초절륜대물, 암컷함락봉, 아기방침략자, 확정임신싸개, 연료가 필요 없는 섹x머신, 대물흑인, 금태양, 180cm80kg30cm, 어제 뜨밤 보내고 상쾌하게 기상.”
“마, 말하지 마!”
몽롱하다면서 소파에 누워 있던 서예린이 휙 일어나서는 발바닥으로 나를 후려친다.
이전에 나한테 서예린이 익명69로 보냈던 문의 내용 중 하나였다.
“속보 등산가들 관리자 육봉 에베레스트인 줄 알고 착각해 등반 도전.”
“주, 죽어! 말하지 말라고!”
이제는 아예 달려들어서는 내 핸드폰을 뺏으려고 그랬으나 나는 몸을 뒤로 빼면서 계속 읽어간다.
“그냥 보x에 자x 넣고 쑤시고 싶다아? 진짜 미친 소리 개 많이 썼네 서예린.”
“나 아니야! 나 아니라구!”
귀를 막고 몸부림치던 서예린은 퍼뜩 고개를 들고는 나를 쳐다본다.
“그거 보냈던 날에 네가 여자랑 잤다고 했던 날이잖아.”
슬그머니 내게 다가오는 서예린. 술기운 때문에 아까부터 붉던 얼굴에는 질타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누구야?”
“개인 프라이버시.”
“너는 지금 내 프라이버시 다 까발렸잖아.”
이거 봐라?
“그럼 이런 걸 나한테 쓰지 말던가! 애초에 자기 사진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왜 보내는 거야?! 너 그거 위험한 거 알아?”
“윽.”
내 말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서예린. 나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계속 쏘아댄다.
“내가 아니라 이상한 놈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왜 약점 잡힐 일을 만드는 거야!”
“그, 그래서 최근에는 안 보냈잖아.”
“후.”
그래, 그렇긴 하다.
지난번에 딸감이라면서 서양 여배우 사진 쪽을 보내줬었지.
그나마 정신을 차렸다는 소리이긴 했다.
내가 머뭇거렸기 때문일까?
서예린은 씩씩거리면서 손가락질 하며 외쳤다.
“애초에! 너도 내 거 보고 평가하고 그랬잖아! 안 꼴린다느니! 별로라고 하고! 지, 지난번에 줬던 배우 사진이 더 취향이라고 그러고!”
“……그건 네가 더 보내지 말라고 일부러 그런 말 했던 거야.”
“그럼 배우 쪽보다 내가 더 나아?”
“…….”
솔직히.
난 배우 쪽 몸이 좀 더 취향이긴 했다. 서양물 어떻게 참는데.
“이익! 너 그렇게 말해놓고 내 사진 저장하고 있지? 다 가지고 음흉하게 썼지?!”
“웃기네.”
나는 당당하게 핸드폰을 내밀며 답했다.
“1234. 비밀번호 알지? 까봐. 내가 네 사진 한 장이라도 저장했나.”
“…….”
자신 있었다.
서예린을 향한 내 나름의 양심이자 배려였으니까. 그녀가 보낸 사진 중 서예린의 사진은 한 장도 저장하지 않고 있었다.
“씨이.”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서예린은 핸드폰 확인도 안 하고는 투덜거리며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나도 원래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시야가 흔들려서 휘청거리며 넘어지듯 앉았다.
‘아, 미친.’
와인 같은 술에 내가 좀 약하던 걸 잊고 있었다. 몇 잔 마시지도 않은 거 같은데 벌써 취해서는 어지럽다.
게다가 이미 축제 주점에서 1차를 하고 온 상태이기도 했으니까.
‘안 되겠네.’
서로 숨기는 거 없이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는 이 시간은 꽤나 즐거웠지만.
계속 여기 있다가는 잠들 것 같았기에 슬슬 자리를 끝내야 할 듯했다.
“나, 이만 갈게.”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집에 가려고 했는데 옷자락이 뒤로 당겨지며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
아무 말 없이 나를 잡아당겨 앉힌 서예린. 입을 꾹 다문 채로 있으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게 분위기가 묘하다.
“뭔데? 이제 간다니까?”
술기운 때문에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마시면 필름이 끊길 수도 있을 것 같았기 조절할 필요가 있었는데.
“우리 그때 말했던 거 기억해?”
서예린이 뜬금없이 추억팔이를 시작했다.
“기억 못해. 갈 거라고.”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몰라도 더 있으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 머리에 요란하게도 울려왔다.
슬슬 일어나려 했는데 어느새 내 허벅지 위에 얹어진 서예린의 다리가 일어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했잖아.”
아…….
뜬금없이 갑자기 만나지 않겠냐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리고 뭐라 했더라…….
취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데.
“만나서 괜찮아 보이면.”
천천히 정답을 공개하는 서예린에 한 템포 늦게 깨달았다.
“한 번 해보자고.”
어느새 내 위에 올라탄 서예린.
허벅지에 그녀의 엉덩이 촉감이 뭉클하게 느껴지면서도, 서로 술 냄새가 밴 숨소리를 흘려댄다.
그것에 더 취하기라도 한 걸까.
하반신이 단단해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빤히 서예린을 쳐다봤고.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귀여워.”
“무, 뭐?”
뭔가 대답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입술이 포개어지며 달콤하지만 쓴 와인 맛의 혀가 어색하게 얽혀왔다.
천천히 입술을 뗀 서예린은 내 귓가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나 허벅지에 점 있다?”
“아, 알지.”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며 서예린이 물어왔다.
“볼래?”
“예린아! 어제 축제라고 풀어줬는데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신경질적인 어머님의 목소리에 퍼뜩 눈을 뜬다.
쨍하니 들어오는 햇빛.
주변을 둘러보니 어색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서예린의 방이었고, 나는 녀석의 침대 위였다.
그리고.
“아……?”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나체의 서예린.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있는 그녀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 시발?!”
필름이 끊겼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했다.
해버렸다.
서예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짐승 새끼처럼 해버렸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전신을 깊게 짓누르면서 피로를 싹 몰아내는 그때.
“어휴, 얘는 몇 시까지 자는 거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예린의 어머님이, 집으로 들어오셨단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