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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2 KiB

서란은 식산대붕에 안전장치를 잔뜩 설치했었다.

자아가 생길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를 탈취에 대비했을 뿐이었다.

미치광이 과학자가 완성한 약점 없는 거대로봇.

몇 가지 우연 덕분에 통제권을 탈취한 주인공.

자기가 만든 창조물 때문에 패배하는 악당.

전형적인 클리셰였다.

서란은 미치광이 과학자 포지션을 자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설계 단계에서부터 대비책을 마련했다.

안전장치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적 장치와 하드웨어적 장치였다.

첫 번째, 소프트웨어적 안전장치는 누군가가 인형핵을 통제하려고 할 때 작동한다.

안전장치는 대상에게 본인 인증을 요구한다.

지구인에게는 굉장히 친근한 방식이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

남은 시도 횟수, 두 번.

참고로 찍어서 맞히는 건 불가능했다.

비밀번호의 길이는 100자가 넘었으니까.

세 번 이상 틀리면 인형핵 접속 단말이 잠기고 자안효 군단이 제어실로 들이닥친다.

비밀번호를 맞혔다고 끝이 아니었다.

홍채 인식, 음성 인식, 지문 인식 등이 계속된다.

서란의 몸을 통째로 들고 오지 않는 이상 본인 인증을 무사히 마칠 방법은 전무했다.

본인 인증에 실패하면 거의 확실하게 죽는다.

백만 마리 올빼미와의 사생결단에서 살아남을 재주가 있었다면 탈취를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식산대붕을 파괴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만 식산대붕의 인형핵에서 자체적으로 자아가 생겨나면서 얘기가 좀 달라졌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건 내부로부터의 탈취였다.

외부로부터의 탈취만을 상정한 소프트웨어적 안전장치는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하드웨어적 안전장치는 좀 특이하다.

이 안전장치는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

인형 공장이나 격납고, 종자 보관소, 추진기 및 자세 제어 기관처럼 주요 설비가 가동될 때만 은밀하게 작동한다.

은밀하다는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하드웨어적 안전장치는 먼저 나서서 사용자에게 뭔가를 요청하지 않았다.

타이머를 작동시키고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제한 시간 동안 암호화 신호를 수신하지 못하면 보안 절차를 작동시켰다.

보안 절차란 회로의 물리적 절단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퓨즈 역할의 부품을 일제히 폭발시킨다.

이러면 인형핵의 명령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인형핵과의 연결이 끊어진 주요 설비는 즉시 독립적인 대응 절차를 개시한다.

결계를 통해 구역 전체를 폐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결이 재개될 때까지 침묵한다.

끊어진 회로를 복구하고 싶으면 예비용 부품을 찾아서 알맞은 자리에 끼워 넣어야만 했다.

물론 예비용 부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절한 교체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도 서란뿐이었다.

인계 제일의 인형술사가 악의를 듬뿍 담아서 만들어 낸 난공불락의 보안 체계였다.

그래서 서란은 걱정하지 않았다.

제까짓게 날아가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얼마 못 가서 비행 기능이 정지했을 터였다.

추락하는 식산대붕이 결정할 수 있는 건 머리와 엉덩이 중 어느 쪽으로 착지할지 정도였다.

이제 보니 엉덩이로 착지한 모양이었다.


식산대붕은 지반 위로 머리만 빼꼼 나와 있었다.

추락하면서 그대로 땅에 박힌 것으로 추정됐다.

거대 오목눈이가 불쌍한 눈으로 수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식산대붕에게 악감정이 있거나 성격 파탄자라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적인 희열의 일종이었다.

수학 문제나 퍼즐을 풀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

논리에 기반한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쾌감.

나의 노림수에 누군가 제대로 걸렸다는 환희.

서란의 머릿속에서 소년 소녀 서란즈가 경쾌한 박자에 맞춰 포크 댄스를 추고 있었다.

기쁨의 춤사위였다.

담청은 식산대붕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런, 너무 가엾구나.”

서란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꺼내줍시다.”

“그러자꾸나.”

구조 작업 자체는 금방 끝났다.

담청이 손짓을 하자 바닷물이 식산대붕을 피해서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뒤이어 서란이 거산요지선공을 운용해서 지반을 부수고 식산대붕을 들어올렸다.

거대 오목눈이는 며칠만에 자유를 되찾았다.

식산대붕은 비척비척 구멍에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바다 한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찰랑거리는 파도가 거대 오목눈이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담청이 식산대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구나.”

“난생처음 물에 빠져서 놀란 게 아닐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식산대붕은 눈에 띄게 기운이 없었다.

서란은 혹시나 싶어 법력 잔량을 확인했다.

넉넉한 걸 보니 동력 부족은 원인이 아니었다.

순전히 기분 문제인 모양이었다.

둘은 식산대붕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지친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한동안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서란이 말했다.

“일단 내부로 들어가 보죠. 침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도 할 겸.”

“종자 보관소와 도서관이 걱정되는구나.”

“안전장치가 작동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서란과 담청은 힘없이 벌려진 부리로 들어갔다.

내부는 대체로 멀쩡했다.

구역 격리 절차가 제때 작동한 덕분이었다.

주거 지역과 통로만 조금 침수된 탓에 담청이 힘을 쓰자 금방 뽀송뽀송해졌다.

서란은 복도 구석에 숨겨진 비밀통로로 들어갔다.

미로 같은 구조를 통과하자 어떤 장치가 보였다.

장치 내부의 망가진 부품을 예비용과 교체하자 끊어졌던 회로가 복구됐다.

도로 기어나온 서란이 말했다.

“일단은 추진 기관만 복구했습니다. 식산대붕을 데리고 오죽문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따라오려고 할지 모르겠구나...”

“잘 어르고 달래 봐야죠, 뭐.”

서란과 담청은 밖으로 나왔다.

식산대붕은 여전히 쭈글쭈글한 표정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측은지심이 들게 했다.

담청이 손뼉을 치며 거대 오목눈이를 불렀다.

“얘야,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서란도 옆에서 우쭈쭈 하며 거들었다.

“대붕아, 벌떡 일어서야지! 벌떡!”

“어서 가자꾸나!”

“우리 대붕이 착하다, 착해!”

식산대붕은 눈을 힐끗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서란과 담청은 거대 오목눈이의 투실투실한 엉덩이를 향해 연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요지부동이었다.

담청이 물었다.

“이제는 반응도 안 하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예 귀를 막고 무시하는 꼴이니...”

“듣고는 있을 겁니다. 정 싫었으면 안 들리는 곳으로 떠났겠죠. 충격 요법을 써 볼까요?”

“예를 들면 어떤 방식으로 말이냐?”

서란은 크게 외쳤다.

“우리는 갈게, 대붕이는 여기서 살아!”

식산대붕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살짝 불안해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통하는 것 같았다.

담청의 표정이 밝아졌다.

“과연, 효과가 있구나.”

“진짜 떠날 것처럼 연기를 좀 하죠.”

“알겠다.”

담청은 오색 구름의 고도를 약간 높였다.

식산대붕은 안절부절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란과 담청을 애처롭게 올려다봤다.

오색 구름은 천천히 서쪽으로 향했다.

식산대붕은 허둥지둥 오색 구름을 뒤쫓았다.

그런데 날아오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담청은 의아함을 느꼈다.

“왜 날개를 놔두고 걸어오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비행이 무서워진 게 아닐까요?”

“무섭다니?”

서란은 뒤뚱뒤뚱 걷는 식산대붕을 보며 대답했다.

“개한테 물려본 사람은 작은 개도 무서워하고 그러잖아요. 비슷한 경우 아닐까요?”

“생애 첫 비행에서 호되게 추락한 탓에 하늘을 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 말이냐?”

“그게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요?”

서란과 담청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내렸다.

거대 오목눈이는 허겁지겁 둘을 뒤쫓고 있었다.

혹시라도 오색 구름이 자기만 놔두고 떠나 버릴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날개를 펼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서란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서란과 담청, 식산대붕은 우여곡절 끝에 오죽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운송 수단은 거대한 오색 구름이었다.

안 타겠다고 버티는 걸 달래느라 고생깨나 했다.

얘기를 듣던 장선화가 감탄했다.

“정말 놀랍네요. 안 좋은 경험 때문에 뭔가를 기피하게 되고, 혼자 남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인형이라니... 마치 생물 같아요.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그야말로 인형술의 정점!”

“정점까지는 아직 멀었지. 식산대붕의 경우는 순전히 우연이었어. 재현이 불가능한 건 물론이고 원리조차 가늠이 안 돼.”

“아닙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선생님은 열여섯이라는 나이로 축기에 성공하신 천재 중의 천재! 저 장선화, 작년에 축기기 수사가 되면서 다시 한번 선생님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작년 여름, 장선화는 축기기에 도달했다.

당시의 나이는 스무 살, 수재에 속하는 편이었다.

목표는 당연히 인형술사였다.

옆에서 삼안묘가 거들었다.

“장 수사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저는 처음 뵌 순간부터 그 위대함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요!”

삼안묘는 요즘 팔자가 폈다.

척박한 대수림 심층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하도 잘 먹어서 좀 있으면 굴러다닐 것 같았다.

하녀가 들어와서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겨울방학을 맞아 한가해진 호혜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저 없는 동안 잘 지냈어요?”

“음, 빈말로라도 평안했다고는 못 하겠군요.”

호혜문은 요즘 청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당장은 결혼 생각이 없다는데도 포기하질 않았다.

더 난감한 건 두 사람의 관계였다.

이아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자요? 그것도 십 년 전에 가르쳤던?”

“예, 자기보다 두 배는 더 나이 많은 여자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와...”

이아금은 고백 공격의 최대 피해자였다.

하지만 이런 난감한 고백은 이아금도 처음이었다.

십 년 전에 가르쳤다면 제자의 현재 나이는 많아 봐야 스물, 호혜문보다 서른 살 이상 어렸다.

이후에도 온갖 이야기가 오고 갔다.

서란과 담청, 장선화, 호혜문, 이아금은 함박눈이 내리는 화목한 연말을 보냈다.

식산대붕도 담장 밖에서 서서 저택 중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담청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금영영은 영 소식이 없구나. 혹시 뭐라도 아는 사람 없느냐?”

서란이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또 다시 한 해가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만병문 법기 공방 입구.

법기 공방장 설 수사가 말했다.

“너는 이제 자유다.”

금영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날씨 좋네...”

12년만의 해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