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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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KiB
용신제는 성황리에 종료됐다.
신도들은 알찬 행사 내용에 만족한 채 귀가했다.
교단 관계자들도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용신제 뒷정리를 서둘렀다.
서란도 자유를 되찾았다.
“드디어 끝이다!”
이 서류가 진짜 마지막이었다.
서란은 찬찬히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결재 도장을 쾅 찍었다.
이로써 용신제 관련 업무를 모조리 처리했다.
서란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동이 뒤따라왔다.
서란이 뚜벅뚜벅 걸어가며 물었다.
“용신님은 어디 계시지?”
시동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수집품 창고에 계십니다.”
서란은 최단 경로로 수집품 창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동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몇 차례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서란의 육감이 벽 너머 움직임을 포착했다.
작은 체구가 잡동사니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했다.
잠시 후,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담청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바쁘다던 일은 전부 마친 것이냐?”
“예, 방금 막 끝났어요.”
“고생했구나, 어서 들어오거라.”
서란과 담청은 수집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동은 따라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자동문이 도로 닫혔다.
두 명탐정은 책장이 늘어선 구역에 당도했다.
서란의 마지막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어쩐지 생활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서란은 웬 천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못 보던 건데 이건 뭔가요?”
담청은 자부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
“소개하지, 내가 직접 만든 은신처다.”
“은신처요?”
“그래, 서란 너는 특별히 들여보내 주마.”
그러더니 천막 입구를 살짝 들췄다.
담청표 은신처의 구조는 지극히 단순했다.
가구로 삼면을 막고 이불을 덮은 게 전부였다.
안쪽은 이불이 두껍게 깔려서 푹신해 보였다.
서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아늑한 은신처네요!”
담청은 눈에 띄게 좋아했다.
“역시 알아 주는구나!”
“모를 수가 없죠. 혹시 들어가 봐도 되나요?”
“당연히 되고말고!”
서란과 담청은 엉금엉금 은신처로 기어들어 갔다.
내부는 꽤나 비좁았다.
하지만 기분 좋은 폐쇄감이었다.
둘은 천장을 바라보고 나란히 누웠다.
어두운 천막 안을 담청의 뿔이 은은하게 밝혔다.
맞닿은 팔뚝으로 서로의 호흡이 느껴졌다.
서란은 눈을 감은 채 안락함을 만끽했다.
“좋군요...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어떠냐, 마음에 들더냐?”
“예, 아주 좋아요...”
잠시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담청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어떤 식으로 운을 떼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런 표현, 저런 표현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그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서란, 고맙구나.”
이불의 감촉을 즐기던 서란이 물었다.
“뭐가요?”
담청은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수직 동굴의 호수에서 보낸 삶, 여의주를 잃어버리고 세상에 나온 일, 존귀함을 바라던 인간.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감상을 온전히 전달할 만한 어휘력이 담청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방금 전 한마디를 그저 반복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서란은 눈치 없이 되묻지 않았다.
대신 팔꿈치로 담청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담청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용안에는 서란의 행동에 섞인 배려가 보였다.
산호 마차에 탑승하던 서란이 말했다.
“용신은 어째서 일기 쓰는 걸 그만뒀을까요?”
서란은 일기를 직접 읽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담청을 통해 요약된 내용을 들었다.
덕분에 일기의 결말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과연 용은 홀로 온전한 존재가 맞는가?’
그 짧은 의문을 마지막으로 일기는 끝났다.
뒷장은 모조리 백지였다.
굉장히 의아한 일이었다.
담청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말이다. 자기 생애 전체를 글로 남길 정도의 기록광이 왜 그랬을까?”
“정작 일기보다 나중에 쓰인 책도 꽤 있었죠?”
“그래, 버섯 요리 백선 같은 요리책은 실종 직전까지도 집필하고 있었지.”
전대 용신은 모든 책에 집필 날짜를 기록했다.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언제 집필을 마쳤는지, 혹은 언제 내용을 수정했는지 등이었다.
덕분에 서란과 담청은 전대 용신의 행적을 날짜 단위로 추적할 수 있었다.
전대 용신은 분명 일기 쓰기를 멈췄다.
하지만 집필 자체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마지막 일기 이후로도 무수한 책을 썼으니까.
서란은 의미 없는 궁리를 멈췄다.
“뭐, 자세한 건 돌아가서 차분하게 알아보죠. 어차피 책 읽을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다. 너무 열심히 생각했더니 좀 어지러운 것도 같구나.”
“담청 님도 저처럼 누워서 좀 쉬세요.”
서란과 담청은 호화로운 좌석에 몸을 뉘었다.
열두 마리의 일각해마가 끄는 산호 마차 뒤로 기나긴 수송 행렬이 따라오고 있었다.
운반물은 전대 용신이 집필한 서적들이었다.
이대로 식산대붕에 실어서 오죽문까지 가지고 갈 요량이었다.
어느덧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산호 마차가 해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부가 공손한 말씨로 도착을 알려 왔다.
서란은 창 밖을 보곤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이 섬 맞아?”
무인도 어디에도 식산대붕은 없었다.
의식을 각성한 거대인형이 처음으로 목격한 건 자기 부리 위에서 다투는 인면조 두 마리였다.
둘은 발길질을 주고받으며 투닥거리고 있었다.
식산대붕의 의태 기관이 반사적으로 두 인면조의 움직임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똥그란 눈을 깜빡깜빡.
새하얀 머리통을 갸웃갸웃.
엉덩이와 꼬리깃을 씰룩씰룩.
식산대붕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인면조 두 마리는 깜짝 놀라서 숲으로 도망쳤다.
자연스레 식산대붕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거대 오목눈이는 종종거리며 숲으로 다가갔다.
사실 자기 입장에서만 ‘종종’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섬 전체가 울렸다.
두 인면조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벌벌 떨었다.
다행히 두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식산대붕이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관심이 옮겨간 대상은 무인도 중앙의 산이었다.
50장(약 150m)정도의 낮은 높이였다.
하지만 식산대붕을 제외하면 인근에서 가장 거대한 물체였다.
거대 오목눈이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자기 몸통으로 산봉우리를 밀었다.
호기심이 어떤 사고를 거쳐 몸통박치기로 발현됐는지는 오로지 본인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인계 제일 인형술사가 만든 거대인형의 돌파력을 바위산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산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식산대붕의 호기심도 무사히 해결됐다.
숲 속 친구들은 아주 기겁을 했다.
들짐승이 내달리고, 새들도 일제히 날아올랐다.
무인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일부는 서쪽으로 향했다.
서쪽으로만 가면 넓은 대륙이 나온다.
인면조 두 마리도 필사적으로 날갯짓했다.
식산대붕의 눈이 두 인면조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저 멀리 존재하는 대륙을 발견했다.
거대 오목눈이는 호기심을 참지 않았다.
활짝 편 날개, 번개 같은 비상, 우아한 비행.
거대인형은 대륙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섬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동물들만이 남겨졌다.
식산대붕이 무인도를 떠난 연유였다.
서란은 난장판이 된 무인도를 둘러봤다.
거대한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고 돌산 하나는 깔끔하게 무너져 있었다.
이동 경로가 정말 투명하게 보였다.
식산대붕의 흔적을 뒤쫓던 서란은 끝에 다다랐다.
힘껏 도약한 모양인지 깊게 새겨진 발자국.
방향은 서쪽, 대륙을 향해 있었다.
서란은 이마를 탁 쳤다.
“큰일 났네...”
담청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거대인형한테 자아가 생긴 것 같아요.”
“언제는 절대 그럴 일 없다더니?”
서란은 억울했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죠.”
“그런데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되는 것이냐? 서대륙 사람들이 위험한 건 아니고? 걱정이 되는구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몇 겹이나 되는 안전 장치를 마련해 놓았거든요. 특히 제 명령 없이 다른 대상을 공격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담청은 무너진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공격성이 아니라는 말이냐?”
“나름대로 친근함을 표시한 게 아니었을까요?”
“애정 표현이 참 무겁구나. 서둘러 찾자꾸나.”
그렇게 가출 오목눈이 찾기가 시작됐다.
원정대원들은 전대 용신의 장서를 챙겨서 운하를 따라 복귀할 예정이었다.
서란과 담청은 오색 구름을 두르고 날아갔다.
하늘을 날던 담청이 물었다.
“식산대붕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느냐?”
“방향 정도는 가능합니다. 지금은 서쪽이네요.”
“알겠다, 조금 더 속도를 내마.”
담청의 뿔이 번쩍이자 오색 구름이 급가속했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비행 속도였다.
마음이 조급한 탓이었다.
그때 서란이 담청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담청 님, 지나쳤습니다.”
“뭐라고?”
“저기에요, 저기.”
담청은 서란이 가리킨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망망대해를 내려다봤다.
수면 아래에 커다란 물체가 하나 앉아 있었다.
사라진 식산대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