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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승급을 축하드립니다.”
나진은 승급 시험의 감독관이 건넨 증서와 명패를 받아들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새까맸던 명패는 이젠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잘 보니까 재질도 다른 것 같고.’
녹색 등급 명패와 달리, 적색 등급 명패는 재질과 형태까지 달랐다. 나진이 명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감독관은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적색 등급의 모험가가 되었다는 것은, 귀하의 명성이 단지 캄브리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도 이 명패를 보이면 그에 걸맞은 대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색의 위에 있는 거라곤, 백각 등급의 모험가 다섯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적색쯤 되면 도시의 최상위권 모험가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는 뜻이고··· 당연하게도 최상위권 모험가에겐 그에 걸맞은 특혜가 따라오는 법이다.
“앞으로 누리실 수 있는 특혜로는······.”
한동안 감독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특혜부터 시작해 앞으로 받을 수 있는 의뢰의 종류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듣고 나서야, 나진은 중앙 길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중앙 길드 건물을 나온 순간.
건물의 앞에 모여있던 모험가들의 시선이 나진에게 쏟아졌다. 정확하겐, 나진이 달고 있는 붉은색으로 빛나는 명패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명패를 확인한 모험가들은 혀를 내둘렀다.
도시에 발을 디딘 지 4~5개월 남짓.
고작 그만한 기간에 적색이 된 나진에게 그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느낀다.
적색 등급이 무엇인가? 숱한 모험가들이 이 도시에 들어올 때 한 번쯤은 꿈꿔보는 등급이요, 그들에게 있어선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등급이다.
10년이 넘어가도록 녹색 등급에 머무르는 이들이 많은 것을 생각해 보면, 단 5개월 만에 적색 등급에 오른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는 감탄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질투할 터.
하지만, 나진에게 후자의 감정을 느끼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천재를 질투해 보아야 자신이 피곤할뿐더러, 세간에 도는 소문이 나진의 자격을 증거하고 있었으므로.
공작가의 기사 다섯을 때려눕혀.
심지어 그중에 넷을 동시에 상대해.
공작가의 기사단장과 맞붙고도 살아남아···.
들려오는 소문이 전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나진이 소드 엑스퍼트 중에선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으리라.
-소문이 사실이라면···.
-얼마 안 가 백각 등급도 되는 게 아닌가?
-소드 시커가 그리 쉬운 줄 알아? 심상도 자각해야 하고, 자각한다 한들······.
-그래도 소드 엑스퍼트 다섯을 동시에···.
-넷이야.
-넷이나 다섯이나.
모험가들이 저들끼리 수군댔다.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당장 의뢰를 받을 생각은 없지만 해야 할 일은 있었으니까.
흑색이든 녹색이든 적색이든, 명패의 색을 무엇으로 물들여도 나진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나진은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수련. 또 수련의 시간이었다.
디에타와 얽힌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나진의 수련에는 새로운 과정이 추가됐다. 바로 제 심상을 가다듬는 과정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하는 과정.
본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행하는 심상 수련은 무척이나 정적이고, 또 지루한 법이다. 제 내면을 들여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을 뿐인 수련이니까.
하지만 나진의 경우는······.
“있잖아? 혹시 호수는 구현해 볼 생각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너도 저번에 봤을 테지만 내 성역(星域)이 호수잖아? 새파랗게 예쁜 호수.”
심상 수련이 그리 정적이진 않았다.
이미 심상에 자리 잡고 있는 성좌 하나가 있었으므로.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하면 지하도시의 풍경이 보이는 것보다 먼저, 새파란 머리칼의 소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호수의 마법사 멀린.
그녀가 담장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이 넘도록 호숫가에서 살다 보니까 호수가 좀 그립네. 내가 호수에 발 담그고 있는 게 취미였거든. 물장구 좀 치면 마음도 좀 진정되고.”
“그래서 호수를 만들어 달라?”
“응. 가능할까?”
멀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풍경일 때야 바라지도 않았지만, 기왕 심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니 그녀는 욕심을 좀 내기로 했다.
“요만한 호숫가 하나는 괜찮지 않을까?”
멀린이 두 팔을 크게 벌려 원을 그렸다.
굳이 따지면 호수라기보단 대야나 우물에 가까운 크기였다. 저게 뭔 소리인가 싶다가도, 수련의 일부이지 않을까 하고 나진은 생각했다.
심상이란 결국 상상의 구현이다.
무언갈 구현하는 과정 자체가 수련이 되겠지.
그게 설령 호숫가라 한들, 아무튼 간···.
멀린이 다 생각이 있어서 시키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진은 두 눈을 감고 집중해 봤다. 호수를 본 적이 그리 많지는 않다. 지하도시에는 없었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한두 번 본 게 고작이다.
‘그나마 떠올릴만한 건······.’
멀린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호수.
그 새파란 호수를 나진이 가만히 떠올려봤다.
“오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자니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진이 눈을 뜨자 멀린이 박수를 치며 제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엔 정말 작은, 대야만한 크기의 호수가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이걸 진짜 만드네?”
오랜만에 본 호수가 반가운 듯 멀린이 해맑게 웃었다. 참으로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주섬주섬 구두와 양말을 벗은 그녀가 호수를 향해 조심스레 제 발끝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그녀가 호수에 발을 담그려는 순간.
멀린의 맨발이 닿자마자 호수가 파스슥,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잔뜩 기대를 하며 멀린이 뻗은 발끝은 지하도시의 흙바닥을 두들길 뿐이었다.
“······.”
고개를 휙 돌려 멀린이 나진을 바라봤다.
정말로 기대했는지, 울상을 지은 멀린이 애꿎은 흙바닥을 발로 꾹꾹 밟아댔다.
“유지하는 게 쉽지는 않네요.”
“그야 뭐 그렇겠지··· 네가 호수를 본 적이 그리 많지도 않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멀린을 바라보며 나진은 쓰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나진은 본론으로 넘어갔다.
심상을 깨우친 뒤부터 나진은 종종 이런 식으로 멀린과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러는 편이 심상을 수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고,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편했으니까.
지하도시의 흙바닥에 나진이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 적색 등급의 모험가가 됐잖아요?”
“응. 그렇지. 내 생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단 느낌이고.”
“적색 등급쯤 되니 받을 수 있는 의뢰가 다양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지명 의뢰라는 걸 받을 수 있게 됐는데 말입니다.”
흙바닥에 그린 그림은 세 개.
새롭게 적색 등급에 오른 나진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그들 몇몇이 나진에게 지명 의뢰를 걸어왔다.
“차례로 도적 소탕 의뢰, 호위 임무······.”
두 그림을 차례로 가리킨 다음.
나진이 마지막 그림을 가리켰다.
“흑마법사의 수색 및 토벌 의뢰.”
“이건 무조건 마지막 거 받는 게 맞네.”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멀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 번째 그림을 가리켰다. 흑마법사 수색 및 토벌 의뢰. 자세한 내용은 의뢰를 수주하면 듣게 되겠지만··· 나진 역시 웬만하면 세 번째 의뢰를 수주할 계획이었다.
“마법사랑은 전투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이번 기회에 미리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나중에 가면 지겹도록 싸워야 할 거거든.”
“마법사랑요?”
“응. 흑마법사는 기본이고, 악마들도 기본적으론 마법사하고 계통이 비슷한데··· 그래서 그런지 악마하고 계약한 마법사가 엄청 많을걸?”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지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악마한테 영혼도 팔아 처먹는 족속들이야. 특히나 요즘은 탑에 박혀 연구만 하다 보니 머리에 맛이 간 놈들이 한가득이고.”
“···멀린도 마법사 아니에요?”
“애 좀 봐라? 내 시대 때 마법사들은 달랐어. 탑에 박혀 연구는 무슨··· 숲에 숨어서 연구하면서 침입자들이랑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아무튼, 하고.
멀린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나락의 마녀는 예외로 치더라도 악마이니, 흑마법사니 하는 것들하고 부딪칠 일은 많을 거야.”
“그러니 이번 기회에 경험해 보자는 뜻이죠?”
“그런 거지. 특히 마법은 경험하고 지식이 중요하거든. 이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말을 고르던 그녀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모르면 맞아야 해.”
“···예?”
“마법전의 기본이 그거야. 파훼법 몰라? 모르면 맞아야지. 물론 이건 검술이나 다른 쪽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이긴 한데, 마법전에선 이게 유난히 심해.”
“그건··· 안 좋은 소식이네요.”
나진이 씁, 하고 혀를 찼다.
마법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애당초 마법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진이다. 그렇게 나진이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멀린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가 걱정이야?”
“예?”
“네 옆에 있는 게 누군지 잊었어?”
멀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상 최초로 열 개의 고리, 십환(十環)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인류 최초로 신비를 규정한 대현자. 열한 개의 별을 지닌 성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깨우친 자.
멀린이 팔짱을 낀 채 미소지어 보였다.
“장담하건대, 내가 있는 한 네가 몰라서 당할 일은 없어. 마법사 전용 공략집을 들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건 그렇겠네요.”
“그렇지?”
나진은 세 번째 그림에 동그라미를 쳤다.
흑마법사 수색 및 토벌전.
적색 모험가가 된 이후, 처음으로 받을 의뢰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깊은 숲속에 위치한 오두막.
사내는 제 목덜미를 긁고 있었다. 살가죽이 벗겨져 피가 흘러나옴에도, 사내는 제 목에 새겨진 낙인이 가렵다는 양 긁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 목이 가렵다 했더니.”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신 분께서 여긴 무슨 일이오?”
오두막을 찾아온 손님.
사내는 한숨을 쉬며 손님을 맞이했다. 저 재수 없는 낯짝에 당장에라도 화살을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지만, 사내는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해봐야 상황은 해결되지 않으니까.
“의뢰를 맡기고자 한다.”
오두막의 의자에 걸터앉은 손님.
로브를 벗지도 않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의뢰 내용을 설명하려는 순간, 사내는 정색했다.
“약점 하나 잡았다고 사람을 이리 막 부려 먹으면 곤란하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오.”
“중요한 의뢰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마지막이라. 달콤한 말이군.”
사내가 큭큭대며 웃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당신이 숨 쉬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란 사실을 기억하시오.”
“기억하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의뢰가 무엇인지.”
“간단한 의뢰다.”
“그건 내가 판단하오. 설명만 하시지. 간단하게.”
“사람 하나를 죽여주었으면 한다.”
손님이 초상화 하나를 내려두었다.
초상화를 집어 든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을 죽여달라고?”
“그래.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깔끔하게.”
“조용하게는 힘들 것 같은데. 내 기억하기로 이놈··· 도시에서 제법 유명하지 않소?”
사내가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을 가리켰다.
이 인물에 대해선 사내도 알고 있었다. 요 근래 캄브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었으니까. 짧은 시기에 적색 모험가에 오른 인물.
모험가, 이반.
그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다.”
“하기야, 사냥개한테 알려 줄 이유 따위 없으시겠지.”
사내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초상화를 쥐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뢰를 받아들이겠단 뜻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 거짓이 아니길 바라겠소. 이 나이 먹고 끌려다니는 건 사양이라서.”
“그래. 자네는 물론이고 자네의···.”
“더 말하지 마시오.”
빛이 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
그늘에 가려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사내의 눈동자는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은 섬뜩한 시선이었다.
“알아들었으니까.”
“···알겠다.”
사내가 벽에 걸려있는 무기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투척용 단검, 사냥용 덫, 온갖 약물, 검은색으로 칠해진 마체테······.
그리고 대궁(大弓)과, 대형 쇠뇌.
그것은 인간의 근력으론 당길 수 없는, 오직 초인에 근접한 무인들을 위한 무기다. 굵은 활시위와 어지간한 장검을 방불케 하는 전용 화살들. 그 모두를 챙긴 사내는 판초를 깊게 눌러썼다.
“당장 수행할 생각인가?”
“빨라서 나쁠 것 없지.”
사내를 바라보며 손님은 말했다.
“믿겠네, 카프만 테오시스.”
도시의 다섯뿐인 백각 모험가.
전(前) 테첼 산맥의 레인저.
매의 눈, 카프만 테오시스는 손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