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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나진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베른하이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탕가가 벌써 이곳까지 추격해왔다고? 그건 불가능할 텐데. 베른하이겐의 뇌리를 뒤흔드는 초조감, 그리고 불안감.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 하던가.
베른하이겐 역시 기사이며, 기사단장직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혼란스러웠던 생각을 정리하고 평정을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종자라고 했다.’
기사단의 선발대, 혹은 단순한 허세.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눈앞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보잘것없어보였으므로. 어찌 됐던 저자를 빠르게 치워버리고 도주하는 게 옳으리라.
판단, 그리고 결론.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2초 남짓.
빠른 판단이었고 빠른 대처였다. 허나, 시간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다. 나진이 입에 담은 것은 베른하이겐을 떠보기 위한 허세가 아니다. 전투에 앞서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문장을 입에 담은 순간 나진은 전투를 위한 준비를 마쳤단 뜻이다.
쾅!
2초. 거리를 좁히기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 열 걸음이 넘는 거리를 나진이 한순간에 좁혔다. 베른하이겐이 판단을 내렸을 때, 나진은 이미 베른하이겐의 코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빠르다. 예상보다도 더.
베른하이겐이 눈을 부릅떴다. 반격하기엔 모자란 시간. 팔을 몸 안쪽으로 끌어당겨 베른하이겐은 목과 심장을 보호했다. 그곳만 뚫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었으므로.
스칵!
검기를 머금은 나진의 검이 베른하이겐의 팔뚝을 얕게 베고 지나쳤다.
역시나, 얕다.
제 팔이 잘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베른하이겐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저 속도는 제법 놀랍긴 하나, 저 검기가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끄으으윽!”
베른하이겐이 눈을 부릅떴다.
검기에 베인 상처가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웠다. 뇌리에 불똥이 튀었다. 고통에 익숙하며, 악마화로 하여금 무감각해진 육체일 터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밀려오는 고통은 베른하이겐이 한평생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다.
영혼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체내의 마기가 거세게 출렁였다.
곧장 반격하려던 베른하이겐의 자세가 고통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그 틈을 나진이 놓칠 리가 없다. 쩌억, 하고 나진의 발차기가 베른하이겐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리하여 흐트러진 자세가 아예 무너진 순간.
콱.
검을 강하게 움켜쥔 나진이 베른하이겐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마치 단두대와 같은 검격. 새하얗게 빛 무리치는 검기가 일선(一線)을 그었다.
“이, 빌어 처먹을··· 애새끼가···.”
그러나 그 검은 베른하이겐의 머리를 쪼개지 못했다. 급히 팔을 들어 올린 베른하이겐이 팔뚝으로 나진의 검을 받아낸 까닭에. 팔뚝에 절반쯤 파고든 검이 부글거리며 차오르는 살갗에 밀려 나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베른하이겐은 자신의 등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진은 눈을 부릅뜨곤 뒤로 도약했다.
본능이 경고했으므로. 거리를 벌리라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나진이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베른하이겐이 어깨 위로 튀어나온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발검(拔劍). 검집을 쪼개며 튀어나온 검이 새까만 궤적을 그렸다.
촤아아아아아악!
검기에 휩쓸린 나무가 쪼개졌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리를 벌린 채 나진은 베른하이겐이 움켜쥔 검을 바라봤다. 보통의 롱소드보다 두세 배는 두꺼운 검날을 가진, 대검에 가까운 검.
저만한 크기의 검을.
저만한 속도로 휘두른다.
위협적인 근력이었고, 대검을 휘감은 새까만 검기 역시 제법 위협적이었다. 검게 물든 탁한 검기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뿌득, 뿌드드득.
베른하이겐이 제 어깨를 풀었다.
본래 그 또한 검을 뽑아들 생각은 없었으나, 나진의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저 애송이가 뽑아내는 검기는 이질적이다, 그렇게 베른하이겐은 판단했으니까.
검기의 위력 자체가 위협적이진 않다. 문제는, 저 검기에 베인 순간 느껴지는 영혼이 타들어 가는듯한 고통이었다.
‘성질을 품은 검기 같지는 않다.’
특수한 성질을 품고, 자신만의 형태를 가진 검기는 소드 시커의 상징. 베른하이겐의 눈에는 나진이 소드 시커급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저놈이 뽑아내는 검기가 뭔가 특수하단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싸움을 오래 끌어서 좋을 건 없다.
베른하이겐은 그렇게 판단했다.
카앙, 하고 대검을 제 견갑에 걸친 채 베른하이겐이 자세를 잡았다. 한순간에 그 기세가 달라졌다.
슐하우저 가(家)의 기사단장, 베른하이겐.
악마와 계약하기 전에도 소드 엑스퍼트의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던 그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하여금 육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금, 그는 소드 시커 초입의 검사와도 견줄만한 강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베른하이겐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기껏해봐야 상대는 소드 엑스퍼트급의 무인이 아니던가. 날랜 구석이 있긴 하나, 고작 그뿐이다. 그는 전투에 있어 경지는 절대적인 것이라 여긴다.
······그것은, 대체로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언제나 경지의 차이가 승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지로 구분되지 않는, 미세한 무언가가 만들어낸 변수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
“후우···.”
그리고 나진은.
지하도시에서 살아온 소년은.
언제나 자신의 손으로 변수를 만들어냈으며, 승리를 쟁취해왔다. 이번 역시 그럴 뿐이다.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고선 눈을 부릅떴다.
핏발이 선 눈동자.
두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한시적인 미래다.
기회의 도시에 온 이래 나진은 성장했다.
그 성장은 가파르고 막힘이 없지만, 나진은 여전히 소드 엑스퍼트급의 무인이다. 당연하게도 시커급에 근접한 베른하이겐보다 약하며, 절대적인 강함에서 그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기술, 근력, 그외의 다양한 것들.
아마도 대부분의 요소에서 밀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진이 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각과 시력이다. 한없이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 그리고 모든 것을 포착하는 섬뜩한 눈동자.
본래부터 ‘보는 것’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소년이,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지 어언 몇 개월.
나진의 눈동자는 이미 상식을 벗어난 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신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 눈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범인의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나진만이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이다.
흔들리는 풀밭.
호흡. 움직이는 베른하이겐의 눈동자.
검을 쥔 파지법.
피어오르는 검기의 새까만 입자.
그리고, 근육의 약동.
베른하이겐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순간 나진은 이미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베른하이겐이 검을 휘둘렀을 때, 나진은 이미 베른하이겐의 측면에 파고들어 있다.
쩌억!
베른하이겐의 대검에 땅이 크게 파인 순간, 파고든 나진의 검이 베른하이겐의 살갗을 베고 지나쳤다. 상처는 얕으나 나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릅뜬 눈동자로 베른하이겐의 움직임을 읽어내며 나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나가 휘몰아친다.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마나 연공법.
본래대로라면, 악마와의 전투에서 나진의 마나 연공법은 자해에 가까운 짓이다. 마기가 가득 들어찬 마나를 빨아들였다간 몸이 그대로 망가지고 말 테니.
하지만 나진은 엑스칼리버의 소유자다.
그 체내에 마나가 들어오는 순간, 마기는 완벽하게 정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빨아들인 마나와 체내에 존재하던 마나를 나진은 모조리 육체의 강화에 때려 박았다. 과거라면 견디지 못할 마나의 양.
그러나, 지금은 견딜 수 있다.
스카카가가각!
가속. 잔상을 흩뿌리며 휘둘러진 검이 베른하이겐의 몸을 난도질했다. 한 번의 빈틈을 보였을 뿐인데 세 번의 검격이 베른하이겐의 몸을 할퀴었다.
까드득.
이를 악문 베른하이겐이 쿵, 하고 땅을 내려찍었다. 흙먼지가 튀어 오른다. 저런 얕은 상처는 제 목숨을 위협하지 못함을 베른하이겐은 안다. 알기에, 그는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 전략을 선택했다.
대검이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진다.
급히 고개를 젖힌 나진의 머리 위로 대검이 스쳐 지나갔다. 큼지막한 대검을 휘둘렀으니 빈틈을 보일 만도 한데, 베른하이겐의 동작에는 빈틈이 없다. 대검이 완전한 궤적을 그리기 전에 그가 허리를 비틀었다.
궤적이 휜다. 대검이 부자연스럽게 정지하며 나진을 덮쳤다.
그 동작을 미리 읽었기에 나진은 몸을 뒤로 던져 회피했다. 그러나 대검이 만들어내는 검풍마저 완전히 피해내진 못했다. 튀어 오르는 흙먼지와 박살 난 돌조각들이 나진을 덮쳤다.
핏.
트롤 가죽이 몸을 보호해주나, 얼굴은 보호하지 못했다.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튄다. 흙먼지에 한순간이지만 시야가 가려졌다. 흙먼지 사이로 뻗어나오는 건 베른하이겐의 각반이다. 철로 된 각반이 나진의 복부를 걷어찼다.
카아아아앙!
급히 검을 끌어당겨 보호했지만, 방어를 위해 검면을 지탱했던 팔뚝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선 나진이 숨을 가다듬었다.
동작을 미리 읽는다곤 하나, 막을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팔뚝이 시큰거렸다. 한쪽 손아귀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거 더럽게 촐싹대는구만.”
까득, 까드드득.
검기에 베인 고통을 참으려는 듯, 한껏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이를 갈며 베른하이겐이 흙먼지를 걷어냈다. 대검을 한번 휘둘러 시야를 확보한 그가 나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축 치켜세웠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덤볐냐? 오는 길에 기사들의 시체를 많이도 봤을 텐데, 대가리 터져 죽은 그 미련한 놈들을 보면··· 감이 잡히지 않던?”
히죽이며 베른하이겐이 땅을 박찼다.
인간을 초월한 각력. 한순간에 나진에게 접근한 그가 대검을 휘두르며 비웃음을 흘렸다.
“네가 감당할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새까만 검기를 두른 대검. 짓쳐드는 대검의 앞에서 나진은 무표정이 검을 들어 올렸다.
“알아.”
검기와 검기가 충돌한다. 대검의 무게에 나진의 무릎이 굽혀지나, 검기는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그 사실에 베른하이겐은 위화감을 느꼈다.
카앙!
나진이 베른하이겐의 검을 받아쳤다. 무게감에 삐걱이는 몸을 억지로 고정하며 나진이 베른하이겐의 검을 연달아 받아냈다.
캉, 카앙, 카아아아앙!
대검이 찍어누르는 무게감에 나진의 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나진은 정면에서 베른하이겐의 검을 받아냈다. 때로는 교단의 검술을 빌려서, 때로는 이반이 보여줬던 검을 흘리는 기술을 빌려서.
“알고는 있는데.”
나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시야를 마주한 순간 베른하이겐은 섬뜩함을 느꼈다. 핏발이 선 소년의 눈동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 눈동자는 맹수의 것을 닮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을 것만 같은, 요사스레 빛나는 눈동자.
그 눈동자에 한순간이지만 압도당한 베른하이겐은 거칠게 검을 휘둘러 나진을 밀어냈다. 그리곤, 쿠웅. 땅을 내려찍으며 베른하이겐이 칼자루를 쥔 손아귀에 힘을 줬다.
우득, 우드드득!
마치 힘을 압축하는 듯한 자세. 등 뒤로 당긴 대검을 베른하이겐이 기합과 함께 수평으로 휘둘렀다. 슐하우저 가(家)의 기사단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시절, 베른하이겐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었다.
트롤을 단칼에 양단한 검술.
검은색의 검기를 두른 대검이 반월의 궤적을 그렸다.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과 나진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풍압이 휘몰아쳤다. 나진의 양옆에 세워져 있던 나무가 쩌억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나진 역시 위력을 온전히 받아내진 못한 채, 뒤로 쭉 미끄러졌다. 열 걸음이 넘게 밀려난 나진은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나서야 멈춰 섰다.
‘···받아냈다고? 그걸?’
검을 휘두른 베른하이겐이 눈을 부릅떴다.
트롤조차 단칼에 쪼개는 검을, 하물며 강화된 근력으로 휘두른 검을 어떻게 받아냈는가. 휘둘러지는 대검을 향해 나진이 보였던 기이한 움직임을 베른하이겐이 알 턱이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나무에서 몸을 땐 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은 거칠다. 방금 일격을 받아내며 한쪽 팔이 완전히 부러 진지, 오른팔을 축 늘어트린 채 나진은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들어올린 칼끝으로 베른하이겐을 겨누며 나진이 말했다.
“당신에게 기사란 무엇이지?”
어쩌면 나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기사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받은 베른하이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라도 끌려고 하는 것인가? 베른하이겐은 질문에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쿠웅, 하고 나진을 향해 그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명예와 긍지는, 당신에게 있어 무엇이지.”
나진은 질문했다. 질문하며 자세를 잡았다.
쾅, 하고 땅을 파헤치는 대검.
시간을 끌 심산이라면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양 베른하이겐은 나진을 연신 몰아붙였다. 뒤로 밀려나던 나진이, 꾸욱 하고 자세를 낮췄다.
“대답해.”
한순간의 가속.
베른하이겐을 상회하는 움직임을 보인 나진이, 대검을 휘두른 베른하이겐의 손목을 베었다. 검은 손목을 아예 가르고 지나가진 못했지만,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상처를 새겼다.
촤악!
피가 튀어 오르며 베른하이겐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세 살갗이 차오르긴 하나, 이래서야 대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없다. 그가 나진을 발로 걷어차 밀어냈다.
나진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단지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에게 기사란, 명예란, 긍지란 무엇이냐고. 나는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베른하이겐은 헛웃음을 흘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목의 살갗이 차오를 때까지, 그 무의미한 문답에 어울려주겠다는 양 그가 입을 열었다.
“기사가 무엇인지 물었냐?”
베른하이겐이 답했다.
“기사란 출셋길에 오르기 위한 수단이다. 돈과 권력, 그리고 힘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기사다.
평민이었던 그가 신분을 올릴 수 있었던 방법이고, 평민으로선 가질 수 없는 돈과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준 게 바로 기사 작위였으니까.
“명예와 긍지도 마찬가지지.”
베른하이겐이 웃음을 흘렸다.
“지킨다고 얻는 것 하나 없지만, 그것들은 팔아넘기거나 버릴 때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지. 기사의 긍지라는 게, 그 하잘 것 없는 게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리는지 넌 모를 거다. 애송아.”
주인을 배신할 때. 주인의 약점을 다른 영지의 귀족에게 팔아넘길 때. 혹은, 가문의 가신들의 불충을 눈감아 줄 때. 그때마다 기사의 긍지를 훼손한 값이라며 그들은 금화 수백 닢을 건네곤 했다.
지켜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을 어겼을 때 받는 것은 달콤한 금화다.
“긍지, 명예, 계율··· 이곳에 오면서 봤을 텐데? 그 하잘것없는 것에 집착하던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날 봐라. 그 전부를 버리니 이렇게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않나?”
기사의 명예를 핑계로 가문의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악마가 봉인된 유물을 강탈했다. 기사의 긍지를 핑계 삼아 동료들을 끌어내 살해했다.
명예와 긍지에 목매는 미련한 놈들.
그런 놈들을 농락하는 것만큼 즐겁고, 쉬운 일이 없음을 베른하이겐은 알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앞의 청년은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와 같은 미련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너만 해도 그렇지 않냐.”
내 손목을 베어냈을 때.
계속해서 달려들었다면 조금이라도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을 텐데, 고작 명예와 긍지에 대한 대답을 듣겠답시고 내게 시간을 주고 있지 않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야.”
베른하이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나진은 고개를 숙였다. 분노하는 걸까? 혹은, 이딴 명예도 긍지도 모르는 이에게 밀리고 있단 사실에 절망하는 걸까.
둘다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진은 웃고 있었다.
“···왜 웃지?”
“그냥, 새삼스레 운이 좋았단 생각이 들어서.”
웃음을 머금은 채 나진은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기사가, 너 같은 놈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명예와 긍지를 아는 기사.
밑바닥에 떨어졌음에도 긍지를 잃지 않은, 마지막의 순간까지 기사이기를 선택한 아탕가의 기사.
자신이 처음으로 만난 기사가.
자신에게 꿈을 심어준 기사가.
그런 이반이어서 다행이라고,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나진은 생각했다. 명예와 긍지를 금화 따위와 저울질하는, 악마 기사 베른하이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진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기사가 무엇인지.
나진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기사이자 별이다. 별빛이 닿지 않는 지하도시에서, 그 눈동자에 별을 품고 있었던 어느 기사의 모습을 나진은 떠올렸다.
‘그 어디에 떨어져 있다 한들.’
한없이 추락해서.
별이 닿지 않는 곳까지 떨어졌다 한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남은 긍지를 지키며······.’
자신이 기사임을 망각하지 않은 채.
‘별을 쫓는 기사.’
저 밤하늘의 별을 쫓는 기사.
그것이 나진이 되고 싶은 기사였다.
‘명예와 긍지를 품은 채, 별을 쫓는 기사.’
명예. 긍지. 그리고 별.
나진의 머릿속에서 완성되지 않았던 기사라는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기사와 거리가 먼 이를 마주하고 나서 완성됐다. 그려지는 목표. 완성된 그림.
그 순간이다.
나진의 검기(劍氣)가 새하얗게 솟구친 것은.
한순간에 출력이 올라간 검기. 일전에 이반과의 결전에서 무의식 중에 터득했으나, 여태껏 쓴 적이 없는 운용법이었다. 허나 그때와는 달리······.
거세게 솟구친 검기에 백금색의 입자는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진이 떠올리는 것은 별이 아닌 어느 기사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