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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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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타날 아서의 후계자.

엑스칼리버에게 선별 될 영웅의 재목.

그런 존재와의 만남을 멀린은 지난 수백 년간 몇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봤었다. 물론, 그 누구도 아서보다 위대해질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엑스칼리버에게 선택받았단 것은 자질은 갖추고 있단 의미일 테니까.

아서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영웅으로서의 격을 갖춘 인물이리라.

그렇기에 얼마 전 검이 뽑혔을 때, 멀린이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던 후보군 역시 이 시대의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뿐이었다.

당대 최고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아니면 검의 교단을 이끄는 검성? 그도 아니라면 오래된 기사의 계율을 지키는 긍지 높은 기사단의 단장?

솔직히 말해서 후보군이 썩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줄 만했다. 엑스칼리버를 쥘 명성과 실력, 그리고 인성을 두루 갖춘 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멀린이 눈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빛나는 검을 쥔 채 몹시나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하나 서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단한 인격자인 것도 아니고.

영웅으로서 완성된 격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명성과 업적 또한 전무한 소년.

내세울 점이라 해봐야 아서를 모욕한 전적이 있다는 점뿐인데, 이건 감점이면 감점이지 점수를 줄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멀린은 머릿속으로 눈앞의 소년에게 점수를 매겼다.

합격점은커녕 낙제점.

면접을 보라고 면접장에 데려다 놨더니, 면접관에게 도발과 함께 중지를 날린 격의 후보자. 멀린은 이마가 지끈해짐을 느꼈다.

‘이딴 게······ 후계자?

이딴 건 아서의 후계자가 아니야, 하고 외치며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멀린은 나진의 손에 들린 검을 흘겨봤다.

선별의 검, 엑스칼리버. 아서왕의 죽음 이후 아서의 의지를 대변하게 된 한 자루의 검.

‘왜, 저런 애송이를······.

이제는 죽고 사라진 자신의 왕.

생전의 아서를 떠올린 멀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별의 검은 영웅의 재목을 선택한다. 하지만 영웅이 걸어갈 길을 선별하는 것은 선별의 지팡이인 멀린의 몫이었다.

멀린은 눈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아니꼬움을 지울 수는 없지만, 소년이 아서를 모욕했단 사실과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멀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찌 됐든 눈앞의 빌어먹을 애송이는 검을 뽑았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백 년의 정적을 깨고 검을 뽑은 소년.

엑스칼리버가 소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도대체 무슨 가능성을 보았기에 소년을 선별(選別)했는지. 그걸 자신도 알아야겠다.

숨을 가다듬은 멀린이 눈을 감았다 떴다.

푸른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 그 눈동자 위로 별이 떠올랐다. 마치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별자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듯이.

“애송아.”

멀린이 나진을 노려봤다.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경고이자 조언이었으며.

이는 멀린이 던지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건 인간이 가질 검이 아니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검이란 뜻이야.」

「너, 분명 무너질걸?」

수백 년 전의 아서 역시 경험한 시련.

아직 영웅이라 불리기 이전의,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이전의 아서에게 던졌던 질문을 멀린은 눈앞의 소년에게 똑같이 던졌다.

“너, 분명 무너질걸?”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별하기 위해서.

‘무엇을?

소년의 자질과 가능성을.

“너, 분명 무너질걸?”

멀린의 말에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가 쥐고 있는 그 검. 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너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멀린이 손가락을 뻗었다.

나진이 쥔 검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건, 단순히 네가 아서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야.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너는 ‘반드시’ 영웅의 길을 걸어야 해. 엑스칼리버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선별의 검, 엑스칼리버.

영웅의 재목을 선택함과 동시에 검을 쥔 자가 영웅이 될 것을 강요하는 검. 동화 속에서는 이를 무척이나 숭고하고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네가 검을 쥐고 걷는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하지. 수많고 수많은 시련이 존재해.”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난과 시련이 영웅을 만든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언제나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이들. 그것이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실체다.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 반역의 기사와 그 추종자들, 세상 끝의 용과 버려진 것들의 마녀······.”

멀린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는 곳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숱한 영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영과 육을 능욕한 더러운 존재들. 그들이 모두 너를 주목하겠지. 어디 그뿐이겠니?”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하늘 위의 수많은 별자리 중, 널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어. 또 저 땅 아래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들 중 너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니?”

수많고 수많은 악의.

“그거, 견딜 수 있어?”

영웅의 길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들.

“네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아. 소드마스터든, 영웅이든, 어느 집단의 수장이든, 혹은 아주 고귀한 출신이든···.”

초월의 길에 오른 소드마스터라면.

충분한 위업과 명성을 쌓은 영웅이라면.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다면.

하물며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기반이라도 있다면.

“네가 그런 것들 중 하나라도 가진 채 검을 뽑았다면, 내가 말했던 것들은 단순한 조언에 불과하겠지.”

그런 것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몰아치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설령 흔들리더라도 금세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아니잖아.”

멀린이 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불어오는 바람에 쉽게 흔들릴 거고, 어쩌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며, 강자들의 노리개가, 가지고 놀기 좋은 먹잇감이, 부리기 좋은 인형이 되기 십상이지.”

소년에게 예견된 미래.

“그걸 네가···.”

“뭐 그렇게 말이 길어요?”

나진이 멀린의 말을 끊었다.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뭐 그렇게 말이 기냐고요. 요점만 말하면 단순하잖아요. 주제도 모르고 검 뽑았는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말투가 싸가지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멀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멀린을 마주 바라봤다.

“성좌님 말씀대로 전 가진 거 없어요. 별 볼 거 없는 거 사실이고, 담그려 한다면 담가지겠죠. 그걸 누가 몰라요?”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나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당장 지상으로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개고생했던가.

몇번이고 죽을 뻔했고, 실제로도 이반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미 시체가 돼서 지하도시의 어딘가를 굴러다니고 있을 게 뻔했다.

강자들이 날 노릴 거라고?

수많은 것들이 날 묻으려 들 거라고?

멀린의 경고에 나진은 코웃음 쳤다.

내가 그것도 모르겠는가. 검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이미 목숨을 걸 각오는 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각오도 안 한 채 검을 뽑은 건 아닙니다.”

선을 넘어선 순간부터 나진은 각오를 다졌다.

가진 게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별을 향한 동경뿐이다.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포기할 바에는 차라리 짓눌려 죽는 편이 낫다.

나진이 멀린을 흘겨봤다.

눈앞의 성좌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얼추 감이 잡혔다. 물러서고 겁먹어봐야 이도저도 안 된다. 나진은 오히려 당당해지기로 했다.

“아서왕도 처음부터 대단했던 건 아니잖아요? 아무런 기반 없이 밑바닥부터 올라왔으니 대영웅이라 불렸던 거고요.”

몇 번이고 동화책을 읽었던 나진이다.

아서와 멀린의 만남을, 멀린이 아서를 인도해 주는 장면을 몇번이고 다시 읽었던 나진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나진이 내뱉는 말에는 약간의 실망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나진이 읽은 동화 속의 멀린은.

결코 저런 말을 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아무것도 아닌 이를 위대한 왕으로 만든 이가 바로 멀린이었으니까.

“그런 아서왕을 인도한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치사하지 않습니까?”

“날 도발하는 거니, 지금?”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멀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험이란 걸 눈치챘나?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말로는 누가 못할까.”

그래도 나쁘진 않은걸.

겁먹기는커녕, 당당하게 받아치는 기개가 나쁘진 않았다. 멀린은 눈앞의 소년에게 약간의 흥미를 느낀 채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일렁이던 아지랑이가 한순간에 나진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말로는 뭐든지 쉽다. 하지만 언제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이걸 보고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면.”

멀린의 걸음이 멈췄다.

“그때는 인정해 줄게.”

나진의 눈동자에 낀 아지랑이.

그것이 나진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진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과 도달해야 할 전장들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은 이상 ‘반드시’ 겪게 될 시련들.

수백년 전 아서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것.

그것을 보고도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다면, 그때는 저 소년을 다시 평가하게 되리라. 그리 생각하며 멀린은 딱딱하게 굳은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의 시야에 수많은 풍경이 지나쳐 갔다.

단순히 보고 있는 것이지만, 나진은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몸이 떨렸다. 진동하는 악취에 콧잔등이 시큰거렸고, 뜨거운 열기에 살갗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사이하고, 사악한 것들의 전장. 숱한 악마들과 그들의 계약자가 활개 치는 어두운 영지. 그곳에서 악마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숱한 강자들을 보았다.

악마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진은 그들에게 제 살을 내주어야만 했다.

뜯어먹히고, 망가지고,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채 그들의 사역마가 되고 만다. 끔찍한 최후에 몸서리 칠 시간도 없이 시야가 뒤흔들렸다.

별들이 탄생하고, 별들이 지는 전장. 본격적으로 별들이 개입할 수 있는 무대. 그곳에서 이미 하늘에 자리 잡은 별들이 부리는 텃세를 보았다. 그들에게 농락당해 여정을 마무리 짓고 마는 숱한 영웅들을 보았다.

별이 되려는 이들을 짓밟고.

별을 꿈꾸는 이들을 망가트리며.

그들이 가진 별을 빼앗는 타락한 성좌들을 나진은 보았다. 그들은 탐욕스레 제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진을 시야에 담은 순간, 나진은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려 바스러졌다. 존재의 근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숱한 풍경들을 넘어선 곳.

나진은 마지막으로 보았다.

지평선의 저 너머에 자리 잡은 죽음의 땅을. 앞선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들이 자리 잡은 곳을. 이번에 나진은 그곳에 서 있지는 않았다. 단지 아주 멀리서 그곳을 지켜보고 있을 뿐.

지평선의 너머에서 무언가 파도쳤다.

마치 산맥이 파도를 치는듯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나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용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용. 그 용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를 인식한 순간 나진의 영혼은 잘게 바스러졌다.

나락의 땅, 캄란.

그곳의 편린을 마주한 순간 나진의 영혼은 무너졌다. 그 과정이 몇차례고 반복되자, 아지랑이가 꼈음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던 나진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틀렸네, 이건.

망가지고 말았다. 하기야, 저런 애송이의 정신으로 저런 풍경들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기고 나는 강자들조차 저 풍경을 바라본 순간 몇달은 앓아누울 테니까. 그들 중 몇은 아예 꺾여버릴 거고.

아서는 이 풍경을 보고도 곧장 일어서선 각오한 바라며, 멀린에게 쏘아붙였지만······.

‘그건 아서라서 가능했던 거야.

감히 그 누가 아서처럼 될 수 있을까.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내뱉는 소년의 모습에 조금은 기대했지만, 역시 말뿐이었던 걸까. 멀린은 실망감과 함께 소년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지랑이를 거두고, 기억을 지운 뒤 성검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고작 여기서 무너진다면 소년에겐 가능성이 없을 테니까. 타락한 것들의 노리개가 되게 내버려 두느니 여기서 끝 마치는게 나으리라.

그렇게 멀린의 손가락이 나진의 이마에게 닿으려는 순간이다.

“압, 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레 뻗어 나온 손이 콱, 하고 멀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멀린은 눈을 크게 뜬 채 제 손목을 붙잡은 나진을 바라봤다.

탁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있었다.

그 눈에서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멀린이 보여준 환상을 나진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왔다.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드러난 나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멀린이 놀라움을 느낄 틈도 없이.

나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별 볼 일 없다는 거. 아서왕처럼 고결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는 거 알아요. 눈에 안 차는 게 당연하시겠죠.”

숨을 몰아쉬며 나진이 말했다. 호흡은 가빴고 부릅뜬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아서가 시대를 타고났을 풍운아라는 거,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서왕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했고··· 저 밤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건 가장 빛나는 존재라는 걸 압니다.”

인류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숱한 악마들을 쓸어 넘기고.

거짓된 성좌들을 모조리 떨어트렸으며.

끝내는 캄란의 시간을 멈춰버린 위대한 대영웅.

“그렇기에.”

그렇게 빛나는 존재이기에.

“저는 아서왕처럼, 아니 아서왕보다 더 높은 곳에 가야만 합니다.”

목표로 삼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대를 타고난 풍운아가 아닌, 시대를 이끌었던 대영웅이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가 가로막든 간에 갈 겁니다. 가장 높은 곳에 저만의 별을 걸어야 하니까요.”

긍지를 잃지 않은 기사에게 약속했고.

별이 보이지 않는 땅에서 맹세했으니까.

“그러니, 이건 돌려드리지 못해요.”

나진이 엑스칼리버를 콱 움켜쥐었다.

엑스칼리버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

그런 나진을 멀린은 말없이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나진이었으며, 또한 나진이 아니기도 했다. 멀린은 나진에게서 아주 오래전의 과거를 보았다.

「뭐가 가로막든 좋다.」

「난 이 시대를 이끄는 영웅이 될 거다.」

「가장 높은 곳에 내 별을 걸어, 나를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생각이다. 그렇기 위해선 상징이 필요하지. 바로 이 검과 같은 상징이.」

아서와의 첫 만남.

자신이 보여준 미래에도 굴하지 않았던 아서의 모습을 멀린은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건 반납하지 못해.」

「이제부터 이 검은 나와 함께 상징이 되어야만 하니까.」

「승리와, 영광,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

그렇게 외치던 아서의 모습을 떠올리며.

멀린은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칼 탓에 나진은 멀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멀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 말.”

웃음을 지운 멀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는 소년을 압박하지 않은 채 멀린은 입을 열었다.

“아서가 시대의 풍운아라는 그 말.”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증명해야 할 거야. 건방진 꼬맹아.”

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과 멀린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으니까. 멀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정신력하고 기개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네.”

합격점을 주기에는 멀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보았다. 가능성을 보았기에 멀린은 고민했다. 지금부터 그녀가 선택해야 할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 가진 별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결정이었으니까.

고민은 길었고 또한 짧았다.

결국에 결정의 순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녀가 모셨던 왕인 아서가 남긴 유언이었으니까.

「언젠가 이 검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면.」

「그 자를 인도해 주길 바란다.」

「내 의지가 남길 선택 같은 건 믿지 마라. 네 마음대로 해. 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고 그때의 아서는 웃으며 말했다.

「약간의 빛이 보였다면.」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그걸 개화시키는 게 네 몫이지.」

「그렇기에, 선별(選別)의 지팡이일 테니.」

가능성은 보았다.

빛 또한 보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멀린은 현재를 보았다.

‘마음에 안 들지만.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본 멀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흥미, 혹은 기대감이 서린 웃음이었다.

“잘 들어 꼬맹아.”

멀린이 나진에게 손을 뻗었다.

“넌 네가 내뱉은 말에 책임져야 할 것이고, 증명해야 할 거야. 아서가 시대의 풍운아인지 아닌지 네 삶으로서 증명해야만 한다는 거지.”

멀린이 히죽였다.

“증명 못 하면 넌 내 손에 죽어. 네게 내릴 천벌은 그때까지 미뤄두겠어. 중간에 포기하거나 도망치면 그때 바로 네 머리에 벼락을 꽂아버릴 테니, 뒤로 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가 뻗은 손은 나진의 앞에 멈췄다.

이마나, 멱살이 아닌 손과 손을 맞잡기에 적당한 위치. 제 앞에 놓인 손을 바라보며 나진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 어쩌란 거지. 그렇게 쳐다보는 나진의 모습에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으르렁댔다.

“안 잡아? 죽을래?”

나진이 마지못해 멀린의 손을 맞잡았다.

손을 맞잡은 순간 나진의 시야가 뒤흔들렸다. 이곳에 끌려올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은 다른 감각이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나진은 보았다.

멀린과 맞잡은 손의 손등에 별자리가 새겨지는 모습을. 그것은 열한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선별의 지팡이가 지닌 별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