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
rupy1014 f66fe445bf Initial commit: Novel Agent setup
-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21 KiB
Raw Permalink Blame History

성화 수호 기사단의 단장, 슐레인.

그를 상대한 후 나진에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나진의 검기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는 건데, 이는 나진이 발아(發芽)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벌써 발아에 다가간다는 게 어이없긴 한데, 네가 소드 시커가 된 이후 겪었던 시련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여태까지 경지가 안 올랐던 게 이상하기도 하고······.

멀린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진은 소드 시커가 된 이후 숱한 강적들을 상대했다.

당장 소드 시커에 오르자마자 소드 시커급의 강자 둘을 상대했으며, 소드마스터와 대련했고, 명멸의 마녀와 한판 붙었다. 거기에 더해 강화된 적룡, 6서클의 흑마법사, 외륙의 까마귀들과 한때는 초월자였을 투구기사와도 결투를 벌인 마당이 아닌가?

어지간한 소드 시커가 수십 년에 걸쳐 겪을 시련을 나진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몰아서 경험했다.

그러니 슐레인을 통해 발아의 경지에 오른 검기가 어떤 형태인지 보게 된 지금, 나진은 자신이 그 경지를 목전에 뒀음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게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았으니까.

이게 첫 번째로 겪게 된 변화였고.

둘은, 나진으로서도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기본적으로 나진은 깊게 잠들지 않으며 꿈을 꾸는 일이 몹시 드물었다. 하지만 슐레인을 상대하고 난 뒤 나진은 자주 꿈을 꾸었다. 거기까지야 뭐, 피곤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을 테지만··· 문제는 나진이 꾸는 꿈의 내용이었다.

나진의 꿈에는 슐레인이 나왔다.

그가 웃으며 동료들과 술잔을 맞부딪치는 장면, 그가 수호했어야 할 영지가 불타는 장면, 그가 선택을 하는 장면을 나진은 보았다. 어쩌면 단순히 ‘보았다’라는 단어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나진은 슐레인이 되어 그 장면을 경험했으니까.

「······.」

망자가 되어가는 제 동료들을 바라볼 적 슐레인이 느끼는 허무함과 절망감을 나진 역시 똑같이 느꼈다. 그가 검을 휘둘러 인간을 사냥할 때 느끼는 죄책감 역시 나진은 느꼈다.

「슬퍼할 이유도, 절망할 이유도 없다. 삶은 하나의 희극이다. 춤춰라. 웃어라. 노래하라. 현실이 무거운가? 무거운 나머지 웃지 못하겠다면 내가 거들어주지.」

그리고 나진은 보았다.

슐레인이 맞닥뜨린 어느 기사를.

「본인은 키호테. 환락의 기사다.」

그자를 기사라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스스로를 기사라 칭했다. 그는 광대처럼 웃고 떠들며 성화 수호 기사단을 공격했다. 그의 랜스에 찔리거나 꿰뚫린 이들은 모두 망자로 변했다.

슐레인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던 슐레인의 동료들은 모두 망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슐레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꿈에서 깬 이후 나진은 투구기사에게 질문했다. 혹시 키호테라는 자를 알고 있냐고. 이게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꿈인지, 아니면 정말로 슐레인의 기억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지?”

나진의 질문에 투구기사의 목소리는 단숨에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건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일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진이 쉽게 답하지 못하자, 투구기사는 짧게 숨을 내뱉고선 입을 열었다.

“환락의 기사, 키호테. 환락제의 사도다.”

환락제. 유엘이 경고했던 성좌의 이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진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 꿈은 슐레인의 기억을 엿본 게 맞는 것 같다고. 꿈에서 처음 본 인물이 현실에도 존재하는 인물이었으니.

“과거에는 어느 왕국의 기사였다곤 하는데, 지워진 탓에 알 방도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그놈은 기사라 불릴만한 놈이 아니다. 차라리 광대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겠지.”

투구기사가 비웃음과 함께 이야기했다.

“제 주군의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감언하며 비위를 맞추지. 키호테는 환락제의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을 위해서 제 신념을 모두 내던진 놈이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그놈 눈에 구멍 하나 뚫어준 게 나다. 있으나마나 한 눈동자에 구멍 하나 예쁘게 뚫어줬지.”

확실히, 슐레인의 기억에서 본 키호테의 눈에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나진이 내심 감탄했다. 꿈에서 본 키호테는 강자였다. 슐레인이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강자.

“꽤 강해 보이던데요.”

“강하지. 그놈도 초월자니까.”

나진이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투구기사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이봐. 나도 한때는 초월자였어. 지금이야 이리 초라한 신세지만 말야.”

“그래 보입니다.”

“초월자란 부분이? 아니면 초라해 보인단 부분이?”

“둘 다요.”

쓰읍, 하고 그가 혀를 차며 그는 벽에 등을 기댔다. 나진이 눈을 붙이는 동안 그가 불침번을 섰으니 이젠 교대할 차례였다. 불침번을 서며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집어넣던 나진은 멀린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슐레인의 기억을 꿈으로 꾼 것 같은데,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냐고.

-아니, 모르는데? 그게 뭐야?

어째 도움이 안 됐다.

나진이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려니 멀린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나도 모르는 걸 어떡해!

‘뭐라 안 했습니다.

-방금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 지었잖아. 나 쓸모없다고 속으로 생각했잖아!

‘그게 들렸습니까?

-떠본 건데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와, 와!

물론 농담이었다. 그녀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 뒤늦게 ‘농담이에요. 하고 덧붙였지만 멀린은 속이 풀리지 않은 듯,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쿵쿵 때려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봐. 짚이는 게 있으니까.

그녀가 끙끙대며 신음하기를 잠시,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 기능 아니야? 엑스칼리버는 별빛을 흡수하는 검이고, 별이란 곧 그 사람의 이야기니까.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서도 그랬어. 외륙에서 타락한 기사들을 상대한 적이 많았는데, 걔네 장례를 치러줄 때 아서는 걔네가 생전에 뭐였고 무슨 업적을 이뤘는지 줄줄 읊어주곤 했거든.

아서와는 접점이 조금도 없는, 그래서 아서가 알 턱이 없는 변방의 기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었다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그때는 뭐 그냥, 아서는 아는 게 많으니까 그랬구나 싶었는데······ 네 말을 들어보면 아서도 너처럼 기억을 엿본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확신하진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멀린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너랑 달리 아서랑은 모든 걸 공유하지 않아서 나도 아서에 대해 모르는 건 있어. 어쩌면 모르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르지. 아서는 고민이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했으니까. 비밀도 많은 편이었고.

그렇게 말하는 멀린의 눈동자가 낮게 깔렸다.

-그러니까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나한테 이거고 저거고 다 떠맡긴 채 혼자 떠난 거겠지. 긴 대화는 필요 없으며 신뢰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서는.

조금 섭섭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리 중얼거리다 말고 멀린이 불쑥 나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손가락으로 나진의 심장을 쿡쿡 찌르며 멀린이 나진을 빤히 바라봤다.

-넌 그러지 마. 알겠어?

‘예?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사실 만들려 해도 못 만들걸? 내가 염탐하고 있으니까.

눈앞에서 당당하게 널 염탐하겠다고 선언하는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나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모닥불을 뒤적였다. 타닥, 튀어 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던 나진은 투구기사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직 잠에 들진 않은 모양이었다.

“주무십니까?”

“아직.”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냐.”

“환락제가 대체 뭐 하는 성좌입니까? 악명이 높던데.”

잠깐의 침묵.

직후 투구기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환락제(歡樂帝), 뜻 그대로의 존재다.”

그 투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곱절은 무거웠다. 한마디 한마디에 증오가 담겨있었으니.

“자아를 얻은 악마. 악마들의 제왕, 마왕(魔王)이기에 그년의 이름에는 제(帝)라는 단어가 붙지. 그렇다면 그 앞에 놓인 환락이란 무엇인가?”

투구기사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광대라는 뜻이다. 제 아무리 숭고한 이야기도 환락제의 입을 통해 이야기 되는 순간 광대극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지독하기 짝이 없는 별자리지.

거기까지 말한 뒤 투구기사는 침묵했다. 더는 그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붙였다.

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투구기사와의 기묘한 동행은 한동안 계속됐다. 나진으로서도 딱히 그 동행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나진은 투구기사와의 동행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 습격은 어떻게 할 거지?”

“습격이라뇨? 저희는 정문으로 방문할 뿐인데 습격이란 단어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럼 방법은?”

“정면 돌파 말고 더 있겠습니까?”

“뭘 좀 아는군.”

투구기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진에게 주먹을 들이밀었고, 나진이 그 주먹에 제 주먹을 맞부딪쳤다. 처음에야 투구기사의 기행에 당황했던 나진이지만 이젠 나진도 기행을 즐기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어디서 주워 온 랜스를 들고 나진은 투구기사와 함께 랜스차징을 갈겼다. 갑작스레 두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된 흑마법사와 악마 추종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보다 나진의 검과 투구기사의 창이 조금 더 빨랐다.

“우리한테 왜 이러는데!”

그들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잘 먹히지는 않았다. 그들이 고문하고 실험하던 인간들의 시체를 보노라면 대화할 마음이 싹 가시곤 했으니.

“흑마법사가 말도 하는군.”

“대화는 사람이랑 하는 겁니다. 짐승이 아니라.”

“그거 꽤 괜찮은 말이군. 나도 인용해야겠어. 들었나? 짐승들아. 여담이지만 난 사냥대회에서 우승을 밥 먹듯 했지. 짐승을 사냥하는 데 도가 텄다는 뜻이다.”

즉석에서 사냥 대회가 열렸고, 짐승들의 비명이 한동안 울려 퍼졌다.

“음, 오늘도 보람찼군.”

낭만을 아는 기사인 투구기사와 함께하는 일은 나진에게도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함께 흑마법사와 망자들을 사냥할 때 투구기사는 좋은 동료였으며······.

“아, 거기선 창을 이런 식으로 쥐면 좋다. 조금 더 자세를 낮추고······.”

“이런 식으로?”

“어? 아니, 그게 맞긴 한데··· 어떻게 했나? 이게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

“제가 좀 칩니다.”

“정말 얄밉긴 하지만 부정할 순 없군. 허어.”

기술이나 외륙에서의 상식을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했다. 좋은 동료이자 스승. 외륙에서 투구기사를 마주친 게 행운이란 사실을 나진은 인정했다.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

“나진, 그쪽으로 간다!”

“말 안 해도 압니다!”

“알면 임마, 좀 막아봐라!”

외륙에는 악마, 악마 추종자, 망자들뿐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외륙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나머지 변형된 마수들. 요컨대 망자처럼 별을 탐하는 마수들이 득실거렸고, 투구기사와 나진은 종종 그런 마수들에게 쫓기곤 했다.

“이걸, 시발, 어떻게!”

들개에게 쫓기며 나진은 비명을 질렀다. 세상 어느 소드 시커가 들개에게 쫓기겠냐마는, 그 들개의 크기가 어지간한 성의 망루만 하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 법이다.

촤아아아아아악!

경사를 타고 미끄러지며 나진이 검기를 뽑아냈다.

“막아 세우란 겁니까!”

“하면 하잖냐? 마무리는 내가 짓지.”

나진의 검기가 스걱, 하고 들개의 발목을 절단 내고 지나갔다. 경사를 타고 굴러떨어진 들개가 일어서려는 찰나, 들개의 등에 올라탄 투구기사가 들개의 목을 절단 냈다.

“그나저나 말투가 가벼워졌군. 원래 좀 더 무게를 잡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기사 흉내를 내는 거고요. 이쪽이 제 원래 말투긴 합니다.”

“그러냐?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군. 전자는 너무 무게를 잡아대서 별로더라고.”

“당신 말투도 크게 다르지 않던데요?”

“나는 임마. 관록이 붙었잖냐. 이 멋진 투구와 투구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봐라. 무게감이 절로 만들어지지.”

“아, 예에······.”

인간이 아닌 짐승을 상대하는 법.

거대한 대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법 역시 나진은 자연스레 익혀갔다. 투구기사와 동행하는 건 나진의 성장에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동행하던 어느 날.

나진은 문득 투구기사에게 질문했다.

“외륙에선 뭘 먹고 삽니까? 사람의 심장 말고요.”

“뭘 먹느냐니?”

“식사 말입니다. 식사. 외륙에 들어온 이후 뭘 먹질 않은 것 같은데··· 배고픔이 안 느껴져서요.”

그 질문에 투구기사는 잠시 멈칫했다가 ‘아’ 하고 짧게 내뱉었다.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 잊고 있었군. 외륙에선 기본적으로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 별을 가지고 있다면 말야.”

그가 하늘의 별을 가리켰다.

“별이 양분이고 곧 식량이다. 그냥 별빛만 쬐고 있어도 허기가 가라앉고 갈증이 해소되지. 몸이 그런 식으로 진화한 거야. 별을 얻었을 때 몸이 바뀌는 걸 느끼지 않았나?”

“느끼긴 했습니다.”

“그게 다 인간을 벗어나는 과정이야. 너나 나나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거지.”

요컨데 식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신기하다는 듯 나진이 턱을 매만지고 있자니, 나진의 옆에 걸터앉아 있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뭔갈 먹고 싶을 때도 있······.

“하지만 뭔갈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지.”

참 우연찮게 투구기사와 목소리가 겹쳤다.

할 말을 빼앗긴 멀린이 확, 고개를 돌려 투구기사를 째려보는 가운데 투구기사는 멀린의 시선을 무시하곤 말을 이었다. 사실 무시라기보다는 투구기사의 눈에는 멀린이 안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랜만에 거하게 잔치를 하는 것도 괜찮겠군.”

“좋죠. 먹을만한 게 있습니까?”

“아니? 지금부터 구해야지.”

그가 말하기 무섭게 멀린이 나진의 어깨를 빠르게 두들겼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 알아. 외륙에서 내가 자주 먹던 게 있거든? 알려줄게. 그거 맛이 생각보다 괜찮아.

투구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진은 멀린과 함께 잠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신이 난 멀린이 이 나무, 저 나무를 가리키며 채집 방법을 가르쳐줬다.

-저건 나무 몸통을 정확하게 십자로 쪼개면 꿀이 흘러나오는데, 그걸 병에 받아서 먹으면 괜찮아. 딱 십자로 잘라야 해! 안 그러면 독이 나오니까.

외륙의 식물이라 그런지 그 채집 방법도 범상치 않았지만, 어찌 됐든 멀린의 추천대로 나진은 한동안 숲속을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진의 품에는 꿀이나 과일, 열매 따위가 한가득 채워졌다.

그것들을 들고 투구기사에게 돌아오니, 투구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그건.”

“먹을 거리입니다.”

나진이 과일을 아삭거렸다. 맛이 제법 괜찮았다. 그 모습에 멀린이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투구기사는 제 투구를 긁적였다.

“그걸로 속이 차나? 잔치 기분을 내는데 과일만으로는 부족한 법이지. 그건 간식거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릇 잔치라면 고기를 뜯어야지. 따라와라.”

“여기, 거인들의 땅으로 향하는 방향 아닙니까?”

“그렇지.”

“거인이랑 싸우는 거, 귀찮으니 엮이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그런데 여길 왜?”

“우린 오늘 거인의 식량 창고를 턴다.”

“예?”

“가자.”

투구기사가 결연히 앞장서 걸었다.

“아니, 걔네 식량 창고를 왜 텁니까?”

“그놈들이 고기 손질을 참 잘해두거든. 양념도 끝내주지. 외륙에서 제일로 뽑히는 별미다.”

거인, 용과 마녀를 더불어 태생적으로 신비를 가진 이들. 다만 용과 마녀들이 망가졌듯 거인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망가져 버린 생명체기도 했다. 그 망가짐의 방향이 앞선 둘보다 심각하기도 했고.

신화시대의 거인들은 인간과 같은 수준을 지녀 정말로 거인(巨人)이라 불릴 만했지만, 작금의 거인들은 인간 수준은 고사하고 짐승만도 못한 수준의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어어어.

으어어.

가히 트롤 수준의 지성. 이 시대에 거인들이란 단지 몸집이 큰 트롤에 불과했다. 조금 인간을 닮긴 했지만 인간들은 차마 저 침 줄줄 흘리는 거대 트롤들을 자신들과 닮았다고 여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인이 아닌 거대 트롤 정도로 불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존재들이 살아가는 영역.

거인들의 땅에 나진과 투구기사는 숨어 들었다.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 거인들의 눈을 피해 두 사람은 어느 동굴로 향했다. 털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닌지 투구기사는 순식간에 식량 창고를 찾아냈다.

“밖에 망 좀 보고 있어라. 내가 챙길 테니.”

투구 기사가 고기가 담긴 항아리를 주섬주섬 챙기는 동안, 나진은 동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성벽만 한 크기의 거인들이 걸을 때마다 ‘쿠웅’ 하고 땅이 울렸다.

그런 거인들이 족히 수십 마리.

한두 마리 정도야 상대하라면 상대하겠지만, 저만한 수의 거인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진이 투구기사를 재촉했다.

“빨리 좀 챙기십시오.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데.”

“아, 기다려봐라. 이건 챙겨야······.”

그때였다. 식량 창고 앞을 어슬렁거리던 거인 하나가 몸을 숙였다. 자세를 낮춰 식량이 담긴 항아리를 꺼내려던 거인과 나진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

“······.”

잠깐의 침묵.

직후, 나진이 제 이마를 탁 하고 두들겼다. 이런 시발. 나진이 그리 중얼거림과 동시에 거인이 입을 열었다.

우어어어어어어어!

제 동료들을 모으는 포효.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포효 사이로, 나진은 제 검집을 긁으며 거칠게 검을 뽑아 들었다.

“들켰습니다! 빨리 대비······?”

그렇게 검을 뽑아 들며 뒤를 돌아본 나진은 침묵하고 말았다. 항아리 하나를 등에 쥔 투구기사가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으니. 어디로? 동굴의 반대편으로.

병사들의 훈련 교본에 실어도 될 만큼 완벽한 자세의 달리기였다. 뒤도 안 돌아보고 전력으로 도망치는 투구기사를 나진은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저 양반이?

“지금 뭐 하는······.”

“뭐하나, 안 도망치고!”

투구기사가 소리쳤다.

동굴 맞은편 출구로 전력 질주하는 투구기사의 모습에 나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