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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가?
어떠한 마법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중력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 질문에 여기 한 명의 흑마법사가 말한다.
소드마스터의 힘을 빌리면 가능하다고.
콰아아아아앙!
짧은 비행을 마친 자르칸이 굉음과 함께 착륙했다. 뒤통수와 정수리를 통해 안정적인 ‘우득!’ 착륙을 ‘우직, 쾅, 드드드드드득!’ 이뤄낸 자르칸이 머리의 절반을 땅에 파묻은 채 경련했다.
그 요란스러운 착륙에 휘말린 건물이 쿵, 쿠웅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가운데, 나진은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깜빡였다. 내가 뭘 본거지?
“끄으으··· 어?”
나진 뿐만이 아니었다.
나진에게 멱살이 잡혀 비명을 지르던 어느 흑마법사 역시 비명을 잠시 멈추곤 ‘내가 뭘 본 건가?’ 하는 표정으로 땅에 처박힌 자르칸을 바라봤다.
“허억, 자르칸 님?”
그가 땅에 처박혀 있는 게 자신들의 보스라는 걸 깨닫곤 눈을 부릅떴다. 멱살이 붙잡힌 상황에서도 제 보스를 먼저 걱정하는 충성심에 나진은 감동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우득. 나진이 흑마법사의 목을 꺾었다. 축 늘어진 흑마법사를 옆으로 치우고선 나진은 땅에 박혀 꿈틀거리는 자르칸을 흘겨봤다. 저거, 살아는 있는 건가?
‘목이 직각으로 꺾였는데, 저거 살아있는 거 맞아요?’
-어······ 의심스럽긴 한데, 움직이는 걸 보니까 살아 있는 거 아닐까?
‘목이 저렇게 꺾이고 살아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닌 거 아니에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던진 말.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진의 말은 정답이었다.
꿀렁.
경련하던 자르칸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액체가 직각으로 꺾인 자르칸의 목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우득, 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자르칸의 목이 원래 위치를 찾았다.
‘사람 아닌 거 맞았네.’
나진이 혀를 내둘렀다.
몸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구정물. 소위 마기(魔氣)라 불리는 악마들의 전유물이었다. 눈앞의 저자가 악마를 소환해 낸 그 흑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가 왜 내 앞에?
나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르칸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발더노스 고성의 최상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고성의 꼭대기에서 여자 하나가 나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새하얀 백발의 여자. 유엘 라지안이었다.
-진짜 제대로 미친년일세······.
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고, 나진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기서 여기까지 사람을 집어던졌단 말인가. 정신 나간 육체 능력이로군.
“쿨럭, 컥. 퉷.”
흙먼지를 걷으며 자르칸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목에 찬 핏물을 뱉어내며 입가를 닦았다. 그만한 높이에서, 그만한 속도로 땅에 내려꽂혔음에도 자르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정확하게는 있었지만 없게 됐다.
저 볼품없는 꼴을 보고 있자면 믿기 어렵지만, 놀랍게도 자르칸은 강력한 흑마법사다.
8서클부터 대마법사로 분류되는 마법사들의 사회에서 자르칸은 6서클의 경지에 올랐다. 그 강함은 무시할 게 못됐다. 만약 지금과 같이 자르칸의 본진에서 그를 토벌하는 상황이라면, 최소 분대 단위의 엑스퍼트와 소드시커급의 강자가 둘은 필요했다.
거기에 악마까지 더해지면? 악마를 전문으로 사냥하는 악마 사냥꾼이나, 이단심문관들의 도움이 없다면 자르칸을 토벌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변수 덩어리인 악마 계약자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자르칸은 분명한 강자다.
‘분명 그럴 텐데.’
나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조금 전 그 꼴사나운 착륙을 보고도 상대를 경계하기란, 언제나 진지한 나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썩을.”
자르칸이 욕설을 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손짓을 한번 하자 흙먼지가 걷혔다. 그는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주변을 쓸 훑어봤다. 제 부하들의 시체가 사방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네 놈 짓거리냐? 넌 또 뭐야?”
나진을 노려보며 자르칸이 으르렁댔다.
몸 주위로 퍼져 나오는 마기와, 일대를 찍어 누르는 사나운 기세. 나진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였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스릉.
나진은 검을 들어 올림으로써 자르칸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한 거 맞다고. 그리고, 넌 누구냐는 질문에도 나진은 친절히 답해주었다.
“나진.”
들어 올린 검 위로 별자리가 피어올랐다.
“여명성이다.”
여명성, 밤의 끝을 알리는 별.
밤하늘에서 두 개의 별이 빛났다.
악마 계약자. 악마와 계약해 그 힘이나 권능 따위를 빌려올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와 나진은 한 번이지만 맞붙어 본 적이 있었다.
악마 기사 베른하이겐.
나진이 엑스칼리버로 토벌한 상대.
당시 소드 엑스퍼트였던 베른하이겐은 악마와 계약하며 소드 시커급의 강자가 됐다. 결계를 펼치고 악마의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소드 시커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하는 강함을 가졌었고.
-원래 그렇게 극적으로 강해지진 않아. 그때 걔가 계약했던 악마가 좀 급수가 높아서 그렇지.
고대의 악마 아르칸드.
당시 베른하이겐이 계약을 맺었던 악마가 특출나게 강한 존재였기에 그런 성장이 가능했다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나진은 생각했었다.
베른하이겐에게서 승리를 거둔 건 자신의 강함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엑스칼리버’라는 반칙에 가까운 수단을 동원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엑스칼리버 없이 그자를 이기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할까? 소드 시커에 오른 뒤로도 나진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결계 안에서 보았던 베른하이겐은 압도적이었으니.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할 기회가 찾아왔다.
‘멀린.’
-응.
‘저 자르칸이란 흑마법사, 얼마만큼 강합니까? 그때의 베른하이겐과 비교하면 말이에요.’
-비슷할걸? 그때 걔보다 조금 더 강하긴 하겠네. 계약한 악마가 아직 모습을 안 드러내서 잘은 모르겠는데, 마기로 봐서 중위급은 안 넘을 것 같거든.
결계를 펼쳤던 베른하이겐보다 강하다.
그 대답에 나진은 만족스레 웃었다. 자신의 성장을 증명할 기회였다. 악마기사 토벌로부터 대략 반년의 시간. 그 반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나진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나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흑마법사, 자르칸이 여전히 나진을 향해 으르렁대고 있던 순간이다. 나진이 검을 낮게 끌었다. 자세를 낮추었다. 팔을 등 뒤로 당긴 채 짧게 숨을 삼켰다.
한 번의 호흡.
삼켰던 숨이 내뱉어진 순간.
자르칸의 눈동자가 나진의 움직임을 놓쳤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서 나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오직 나진만이 자르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혀온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자르칸이 두른 마기와 나진의 검기가 맞부딪친 순간 굉음이 터졌다. 검을 휘둘러 만들어냈다기엔 지나치리만치 요란한 소리. 소음과 함께 자르칸의 두 발이 공중에 떴다. 마기는 검기의 반발력을 이겨냈지만, 자르칸의 육체는 반발을 견디지 못한 까닭이다.
상대의 투구를 망치로 내려쳤을 때, 투구는 살짝 찌그러지고 말지만 그 안의 머리가 깨지거나 진탕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컥!”
불시의 일격에 자르칸이 막힌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나진이 공격을 이어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자르칸이 팔을 휘둘렀다. 그는 무형의 충격파를 다루는 역장학파에 속했던 마법사이며, 흑마법에 입문했다 한들 주로 다루는 주문은 변치 않았다.
역장을 팔에 두른 채 그가 나진의 검을 후려쳤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자르칸이 뒤로 쭉 밀려났다.
“······.”
자르칸이 제 팔을 힐끗 바라봤다.
역장과 마기를 둘렀음에도, 팔의 뼈가 부러져 있었다. 금세 차오른 구정물이 부러진 뼈를 맞췄으나 자르칸은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뭉텅이로 깎여나간 마기와 마나가 느껴졌으니.
악마의 힘은 무한이 아니다. 설령 저 외륙에 사는 악마들의 힘이 무한할지언정, 그들에게서 자르칸이 빌려올 수 있는 힘은 무한하지 않다. 이 마기가 다 떨어진 순간 자신은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순 없지.
자르칸이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은 검기를 늘어트린 채 이쪽을 겨눌 뿐,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자르칸은 짜증을 느꼈다.
저 애송이와 싸우는 게 다 무슨 소용이지?
저놈을 쳐 죽인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을 길은 없다. 만약 저 애송이가 약했더라면, 빨리 치워버리고 도주라도 시도해 봤을 테지만······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랄 같군.
자르칸의 표정이 구겨졌다.
차라리 나진을 무시하고 도주하고자, 그의 눈동자가 주위를 살피려던 순간이다.
-아, 한가지 이야기해 드리는 걸 잊었군요.
자르칸의 귀에 목소리가 울렸다.
자르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귀에 울리는 목소리는 유엘 라지안의 것.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말했다. 저 먼 거리를 뛰어넘어 어떻게? 소드마스터의 초월적인 마나 통제력이 있기에 쓸 수 있는 기술, 전음이었다.
마나에 실려 전달된 목소리는 말했다.
-그 소년을 이기면 살려드리겠습니다.
-확정된 죽음 앞에서도 전력을 다하는 고결한 인간도 있는 법이지만, 당신은 그런 쪽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전력을 다할 것 같군요.
유엘의 목소리는 조금이지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희열로.
-제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요.
-부디 전력을 다해주시길.
제대로 미친 여자로군. 하지만 자르칸은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게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저 말을 믿어보는 편이 나았으니.
‘교단의 처형인은 미치광이에 변덕쟁이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진 않는다.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자르칸이 나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위대한 마르포스이시여.”
힘을. 자르칸이 그리 중얼거린 순간 그의 등줄기가 찢어졌다. 찢어진 등줄기에서 손가락이 일곱 달린 팔 세 개가 솟구쳤다.
중위 악마, 마르포스(Marphos).
일곱 손가락의 팔 일곱이 달린 악마.
관장하는 개념은 굴절.
마르포스와 계약해 그의 팔 세 개를 수여받은 자르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상위의 존재와 연결됐다는 전능감이 그에게 희열을 가져다줬다. 6서클이 아닌 7서클의 마법까지 다룰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인간의 두 팔. 악마의 세 팔.
열 개의 손가락과 스물한 개의 손가락.
제 열 손가락을 통해 역장을 다루는 역장학파의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손가락과 팔이 하나 늘어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다. 하물며, 그것이 악마의 팔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역장 학파가 괜히 선혈 학파와 더불어 가장 많은 악마 계약자를 배출해 내는 학파인 것이 아니다. 역장 학파와 악마는 상성이 좋았으니.
“————하!”
웃음을 터뜨리며 자르칸이 팔을 휘둘렀다. 등가죽을 찢고 솟아오른 악마의 팔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 마냥 자르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에 역장 하나. 본래 다루던 열 개의 역장에 21개의 역장이 더해졌다.
카가가가가가가각!
지면을 마구잡이로 쥐어 터뜨리며 역장이 나진을 덮쳤다. 그 모든 변화를 ‘기다려주던’ 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제 길잡이에게 질문했다.
‘저게 전력 맞습니까?’
-응. 계약한 악마를 불러냈네. 중위 악마 마르포스. 관장하는 개념은 굴절. 딱 보니 역장학파 같······.
‘그만 알려줘도 됩니다.’
-뭐?
나진이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래서야 훈련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위험해 보이면 그때 한번 말해주세요. 그전까진 한번 시험해 볼 생각이니.’
-뭘?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 몸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별을 손에 넣고, 용을 죽여 용혈(龍血)을 취한 다음 나진은 아직 제 전력을 다해보지 않았다. 이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러니 알아야 했다.
외륙으로 떠나기 전에, 이 몸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 파악해 놔야 했으니. 그 대답에 멀린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든가.
밀려드는 무형의 충격파. 투명한 충격파는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약간의 일렁거림과 공기의 흐름으로 나진은 충격파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곤, 탁.
밀려드는 충격파를 두고 나진이 선택한 방식은 정면 돌파다. 나진의 검기가 역장 하나를 찢어발겼다. 터져 나오는 섬광과 함께 나진이 약진했다.
성채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유엘은 땅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비추는 것은 자르칸과 맞부딪치는 나진의 모습이다.
검과 충격파가 맞부딪치며 튀어 오르는 파편.
기분 좋게 울리는 ‘카앙!’ 하는 소리와, 튀어 오르는 피.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피어오른 흙먼지를 역장이 밀어내고, 검기가 가르며 전투는 이어진다. 그 모든 움직임을 유엘은 제 눈동자에 담았다.
“흐······.”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희열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렸다. 유엘은 피와 살인을 사랑하나, 그것들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전투 역시 사랑한다.
그런 그녀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 바로 서로가 피를 흘리는 접전 끝에, 한 끗 차이로 이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이의 몸을 가를 때, 자신의 몸이 사(死)에서 생(生)으로 기울어지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유엘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격렬한 싸움일수록,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그 끝에 손에 넣는 삶은 더욱 강렬하다. 그 강렬함만이 유엘의 즐거움이었고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지금 저 아래에서 강렬한 빛을 내보이는 소년에게 흥미를 느낀다. 수많은 사람, 수많고 수많은 생명체를 죽이다 보면 특유의 생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나 삶에 진중한가. 얼마나 삶에 집착하는가. 또 얼마나 제 삶을 소중히 여기는가.
누군가는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
유엘은 그것을 생기라 불렀다.
죽는 순간 육체를 떠난다는 점에선 같았으므로.
죽음 앞에 대부분의 이들은 기꺼이 자신을 굽힌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본래의 형태조차 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삶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허나, 극소수의 기사는.
죽음을 앞둔 고결한 기사의 생기는 흐릿할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붉게 타오른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신념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성좌에겐 자신의 위업이.
악마들에겐 자신의 개념이.
마녀와 용들에겐 자신의 신비가.
간혹가다 자기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의 생기는 빛난다. 더없이 아름답게. 자신들이 봐왔던 수많은 영혼을, 생기를 떠올리며 유엘은 나진을 다시 바라봤다.
처음 보는 것이다.
처음 보는 종류의 빛이다.
알 수 없기에 흥미롭다. 흥미롭기에 알고 싶다. 지금 당장 저 소년을 죽여 저 빛을 꺼트려 보고 싶기도, 저 빛이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기도 하다. 1초에도 수십번 치솟는 살의에 유엘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를.
어서 내게 결투를 신청해 주길.
나와 동등한 위치에 올라 접전을 치러주길.
그 끝에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해주길.
혹은, 나를 죽여주기를.
모순된 감정이 제 안에서 충돌한다. 그 충돌이 가져오는 고뇌와 자극마저 유엘은 즐거움으로 느꼈다. 삶에는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이 없는 삶이란 죽음보다 못한 것이니.
유엘은 온 신경을 나진에게 집중했다.
만에 하나라도 흑마법사가 나진을 죽이고 말 상황이 오거든, 개입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껴둔 먹잇감을 빼앗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그렇게 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유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개입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올 것 같았기에. 악마를 상대해 본 건 한 번뿐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악마가 부리는 권능에 애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아쉽군요. 더 지켜보고 싶었는데.
그리 생각하며 유엘이 개입을 결심한 순간이다.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아?”
유엘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기울였다.
한순간 나진이 보인 움직임. 그 움직임이 전투의 판도를 뒤집었다. 밀리던 나진이 돌연 흑마법사의 팔 하나를 베어 가르며 미끄러졌다.
-일단 하나.
그리 중얼거리는 나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모든 움직임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그려본 유엘은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소드마스터의 예상조차 벗어난 움직임이었으니.